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익수 May 30. 2022

사의 찬미

이영혜

2017년에 출판된  책의 제목은 저자가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의 이름과 같다. 온라인 카페 ‘사의찬미 이름과는 달리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나누는 일상의 소소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로 가득  있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 10년전인 2007 부터 저자는  카페를 오픈하여 지금도 카페지기로 활동하고 있다. 어느날 저자와 가까운 온라인 카페 회원이 카페의 이름과 연관된 죽음을 주제로 책을 출간해보라고 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책이 쓰여졌다.

‘사의찬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이 일본에서 취입한 노래의 제목이다. 이 노래는 너무나도 고단한 삶에 지친 윤심덕이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고 쓸쓸하게 죽음을 암시한다. 윤심덕은 삶이 어려울 때 의지했던 김우진과의 이루어 질수 없던 사랑을 비관하여 일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에서 두사람이 함께 대한해협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첫번째장인 ‘죽음’ 은 6.25 전쟁중에 일어난 아버지의 실종과 오빠의 죽음, 남은 가족이 피난하여 내려간 진주여고 학창시절 이야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도 명확하고 피할수 없는 죽음은, 모두가 언급을 피하고 싶어하는 주제이지만 삶의 엄연한 일부이다. 이 책은 죽음, 사랑, 삶의 세장으로 구성되었다. 죽음과 삶은 동일한 하나의 붙어 있는 이름이다.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은 너무 귀하다. 유한한 삶의 가치나 의미를 파고드는 것은 삶이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죽음보다 살아있다는 것이 몇백배 더 신비롭고 경이롭다. 심장이 쉬지않고 뛰고, 몸이 따스하고, 기뻐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고, 슬프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이 모든 육체와 마음의 변화무쌍함이 죽음 보다 더욱 신비롭다. 그래서 사의찬미는 본질적으로 삶의찬미이기도 하다. 사의찬미가 말하는 죽음은 살아 있는 삶이기에 말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 모짜르트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오선지에 옮긴 진혼곡 레퀴엠(Requiem) 중의 라크리모사(눈물의 날) 선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처연해서 아름답다. 그래서 마음 깊이 무겁고 슬플 때 레퀴엠을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씻겨지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는 죽음처럼 깊고 위대해서 아름다운 이 음악을 작가 덕분에 접하고 깨달았다.

저자가 30 중반에 행정주사 K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만난 K씨의 3 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3 아들은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병약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힌 청년이었다. 책을 많이 읽은 나머지 이상에 사로잡혀 자살을 말하는 그는 항상 죽음을 품고 살았다. 그렇다고 죽을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살을 희망처럼 꿈꾸면서도 삶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저자와는 나이 차이가 꽤 아래였지만 지적인 수준이 통했던 청년이 어느날 저자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죽을 수 있다.” 청년은 죽음을 늘 유희하다가 그 시점에 자기대로의 그런 답을 도출해냈던가 보다. 비틀거리는 청년을 지탱해 준 것은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 청년(고선욱)이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저자에게 보낸 진리와 지식과 인식에 대한 깨달음을 적은 편지 전문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젊은 남녀 사이에 주고 받은 연예편지가 아니라 조금은 아쉽지만, 젊은 청년이 인생에 대하여 깊이 사색한 결과에서 나온 명문장이다.

두번째 장인 ‘사랑’에는 저자의 젊은 시절,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이기적이었던 남자와의 첫사랑 이야기는 가슴이 무척 아리다. 사회적으로 재산을 모아 살만해진 후에도 젊었을때 이기적인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끝까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 나는 처음부터 다양한 소설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흉내를 내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이 모방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울 때는 충분히 그리워했고, 슬플때는 절실히 슬퍼했다. 비극적인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는 충실히 비극적이게 사고 했다.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면서 다 느끼고 있었다. 」

저자의 감수성과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랑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글은  재미가 있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사랑은 죽음이나 삶보다 한수 위이다. 세상을 포섭할만한 힘이 있다. 사랑은 신비롭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하나다.

선남선녀들이 첫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의 종국에 이르는 과정을 저자는 실감나게 그려낸다. 첫사랑 이후 일련의 과정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자아낸다. 저자의 이 부분 글을 거의 그대로 요약하여 옮겨 본다.

「 첫사랑이라고 일컬을 만한 사건은 사춘기적 현상으로, 병을 앓듯이 한 번 거쳐가는 하나의 통과의례여야 바람직하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무슨 명언 같이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아직 인격이 온전히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만난 사람이 서로에게 맞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한 사람을 어떻게 내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이성(異性)간에 사랑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다. 사랑은 행위 이전에 염원이다. 끊임없이 그를 생각한다. 그와 관련된 것은 다 궁리하고 알려고 애쓴다. 그의 행동, 손짓 하나, 그가 했던 말 한마디까지 모조리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급기야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로 연결된다. 쉬지 않고 그 작업을 계속한다. 때로는 '이제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조그마한 사건 하나, 행동 하나가 큰 의미를 남기기 때문이다. 한없이 이 일을 반복하다 보면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번갈아 맛보게 된다. 기쁨 보다는 고통이 훨씬 크다. 사랑의 기쁨을 느끼는 시간은 한 순간이고 거의가 괴로움의 연속이다. 왜일까? 그것은 믿지 못해서 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자기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사랑은 괴롭다. 사랑이 고정돼있지 못한 것은 사랑만이 가진 숙명이다.

사랑은 미지에의 탐구다. 남자는 여자를 모르고 여자는 남자를 모른다. 서로에 관하여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궁금하고 알고 싶다. 그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사랑하는 행위가 아닐까. 하나씩 알아가면서 서로 행복해 하면서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마치 정상을 향하여 열심히 올라가는 등반자의 행태라고나 할까. 그렇게 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만나는 주기에 따라 그 속도는 빠르기도, 느리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얼마가 걸렸든지 고지에 다다르면 더 모르는 것도 없고, 신비감도 없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도 뜨거운 감정이 남아 있을까. 그때 부터는 매너리즘의 연속이다. 그리고 참다운 연애는 끝난다. "인간은 모든 것의 극치를 구한 후, 그것의 종국을 본다." 」

치열하게 평생을 달려온 저자가 가지고 있는 죽음과 사랑과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이 책을 쓰는 것을 계기로 글에 담았다. 아래는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글쓰기의 이유이다.

“정의가 무었인지, 진정으로 추구할만한 가치는 무엇인지, 언제나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다. 그것들을 탐구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생각이 아니고, 읽기와 쓰기라는 답을 얻었다. 이 책은 그 결과로 세상에 태어났다. 평생 책과 음악을 양식처럼 먹으며 살았다. 늘 글이 쓰고 싶었지만 70이 넘은 2011년에 ‘수필문학’에 작가로서 등단했다. 늦게 시작했지만 오랜 세월 곰삭은 각성이 빛을 뚫고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신념으로 깊은 사유의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삶을 대하고 살아온 저자는 70 은퇴 이후에도 지적인 탐구과 욕구는 여전하였다. 어떠한 자리에서든 기왕이면 주인공이 되고자 노력하고, 크던 작던지 자신과의 약속도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데  힘을 다하고, 결국 달성해 내고야 마는 분이다. 가족이라도 가능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하여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 편이다. 음악, 그림, 수필, 노래, 인문, 한문, 피아노, 늦게 시작한 게이트볼의 공인심판자격을 따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이 뛰어난 저자는 나의 장모님 이시다.  나가던 친구분들에 비하여 사회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도 누구 보다도 빈틈없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온 훌륭한 분이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사람도 기본적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는 백년손님이라는 사위라서 특별한 배려를 받았던  조차도 젊었을 때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많이 연로해지어 예전만큼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시기에 오히려 마음이 더 쓰인다. 이제는 마음에 안드는 것이 혹여 보여도 너그럽게 내려놓는 마음의 여유와 함께, 몸 아프지 않고 계속 건강하기만 하시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