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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Apr 06. 2021

위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무엇이든 계속 해 봐야지


그거 별거 아니래. 아휴, 걱정 마. 별일 아니다.  

내 주변에서도 갑상선암에 걸린 사람들이 있는데 다 괜찮아.  

우리나라에서는 갑상선암 과잉 진료하는 경향이 있잖아, 충분히 알아 본거지? 

지금은 힘들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다들 열심히 일 하며 모두 잘 살아. 

갑상선암은 착한 암이라잖아. 다른 암에 비해 치명적이지도 않고. 

-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지인이 갑상선암 수술을 했다며 수술 경과에 대해 말해주고 모두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며, 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거였다. 다른 암보다 덜 치명적이고 흔하기 때문에 수술도 잦고 경과도 좋다는 점을 알려 주기도 했고 과잉진료에 대한 폐해를 예로 들며 수술 결정에 대해 재차 묻는 이도 있었다. 모두 다, 나를 위한 말이었다. 내가 걱정되어 꺼내는 말들, 나를 안심시키려 하는 말들. 지금에서야 이렇게 글로 고백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의 기저질환은 유육종증으로 희귀 질환이다. 내가 병명을 이야기하면 모두가 다 고개를 갸우뚱했고 나는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다시 풀어 말했다. 나조차 생경한 질환이었기에 나 자신도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고(그리고 지금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 지인들은 쉽게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갑상선암은 달랐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어본 질병이었고 주변 사람들이 수술을 했거나 질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에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어떤 사람은 나보다 더 슬퍼하는 것 같아 오히려 내가 그를 위로했다.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KBS에서 방영하는 생로병사 프로그램을 보았다. 마침 갑상선암에 대한 내용이었고 지인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며 추천했다. 방송을 다운로드하고 한참 뒤에야 용기를 내어 보았다(갑상선암 관련 영상을 몇 개 유튜브에서 찾아보다가 어느 순간 알고리즘이 갑상선 질환으로 뒤덮인 적이 있었다. 넘쳐나는 정보가 힘겨울 때였는데 화면에 가득 찬 영상이 무섭게 다가 왔다. 알고리즘을 변화하기 위해 다른 영상을 연속으로 재생했었다). 방송에 따르면, 갑상선암을 경험한 사람들 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유 중에서 주변에서 갑상선암을 흔하고 치명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갑상선암 중 생명에 치명적이고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될 경우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있으나, 발병률이 높지 않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방송을 보면서 나는 왜 주변 사람들이 건네는 말들이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닐 수 있음을 짐작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갑상선암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하면서 병의 무거움을 덜어내려 했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갑상선암 경험자는 일상생활에 큰 문제없고 더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으니, 나도 곧 회복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을 거다. 만약 내가 아픔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 내 주변 누군가가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면 나 역시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갑상선암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묘해졌다. 그럼 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이토록 많이 걱정하는 걸까. 부질없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쉽게 질병에 대한 고민을 나누지 못했다. 별 것 아니라는데 내가 뭘 더 말하겠나. 또한 ‘일상으로의 복귀’가 머릿속에서 턱턱 걸렸다. 그때만 해도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멀리 있는 미래와 같았다. 한편으로는 돌아갈 수 있는 일상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왜 나는 그때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나, 지금의 이 순간이 문제가 있어서인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은 그럼 일상이 아닌가? 내 질병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살면서 마주해야 하는 것인데, 왜 아픔의 상태는 예외 상태가 되고 한시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타인의 말이나 행동이 있을까. 내 기억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딱히 가슴을 달래는 위로의 말은 없었다. 애써 고맙다는 말을 서둘러 한 순간이 더 많았다. 한참 뒤에야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위로를 받을 마음 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위로의 말이 상처로 다가온 적이 더 많았다. 나도, 상대방도 처한 상황과 축적된 경험이 달랐기 때문에 어쩌면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타인의 배려가 있다면, 그건 타인이 내 옆에 있어주겠다는 지속적인 신호였다. 그저 내 말을 천천히 들어주기만 해도 되었다. 사실 거창하고 수려한 말은 필요치 않았다. 손을 꼭 잡아 주거나 내가 팔을 벌릴 때 안아 주거나 감정에 솟구쳐 눈물이 나올 때 그저 묵묵히 받아주는 거였다. 또, 맛있는 밥을 먹고 달달한 디저트를 먹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기대고 싶을 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나에겐 최고의 위로였다. 물론 나는 혼자 알아서 해결하는 것에 더 익숙하지만 외로움이나 두려움이 커질 때 붙잡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는 것도 사실이고 아프면서 기대는 것에 더 익숙해져야 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나에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 전 은평성모병원 유방센터로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 거의 1년 만의 방문이었다. 2019년 가을, 담당 의사는 유방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폐와 겨드랑이 쪽 임파선이 커져 있으니 추가 진료를 위해 호흡기내과를 안내해 주었다. 내 질병을 최초로 발견한 순간이었다.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들으러 진료실로 들어가니 여전한 모습으로 담당 의사가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요?”라는 의례적인 물음에 잘 지내고 있다고 우선 답했다. 궁금했던 검사 결과를 모두 듣고 필요한 검진을 진행하는 그에게 작년 가을에 갑상선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의사는 조금 놀라며 수술 경과는 어떤지, 어떻게 수술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순간 왜 수술을 했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싶어 조마조마했는데 그는 “잘하셨어요.”라고 얘기하며 나를 보고 짧게 웃었다. 그 순간, 가슴에 얹혀있던 무언가가 밑으로 쑥 빠지는 것처럼 개운하고 따뜻함이 밀려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 어떤 말보다 나를 토닥이는 위로였다.      

 

의사는 그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을지 모른다. 이미 수술한 나에게 잘했다는 말 이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금의 뜸도 들이지 않은 채 나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건넨 긍정의 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큰 보상이었다. 불확실한 가능성 중에서 확실하기를 바라는 하나의 기회를 선택하며, 선택한 후에도 끊임없이 불안하고 초조했던 그 마음에 대한 화답처럼 느껴졌다. 고민을 하느라 모두 닳아버린 마음 한편을 메워주는 것 같았다.      


나는 예전의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돌아가야 할 일상이란 없을지도 모르겠다. 새롭게 루틴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일상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을지도. 또한 도움이 잘 안 되는 위로를 받으면 예전보다 진심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늘었다. 왜냐하면 위로를 받으면서 씁쓸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 위로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상처 위에 뿌리는 소금처럼 따가운 위로를 한 사람들이 생각이 나서 화가 났다. 그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동시에 나를 토닥이기 위해 마음을 건냈던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씩 그려졌다. 그들의 진심을 잘 알았기에 내 글이 혹여나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결국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거의 1년이란 시간 동안 글쓰기를 멈추었다. 


이런 마음의 어려움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힘드셨겠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어 나에게 얘기하듯 질문했다. "아픈 것도 힘든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는 건 더욱 힘든 일 아닐까요?"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의 말을 들으면 애써 그 상황을 넘기거나 빠르게 얼버무렸던 순간이 많았다. 상대방의 진심을 해치고 싶지 않았고 이게 위로가 잘 되지 않는다고 내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일이 고단하기도 했다. 그저 웃거나 침묵으로 동의하는 것이 편했고 아픈 몸으로 살며 위로를 받는 것이 나도 처음이라 복잡하면서 미묘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어려웠다. 하지만 아픈데 상대방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짚어준 그의 말을 회귀하며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그만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위로는 여전히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위로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위로하는 사람의 자기만족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위로받는 사람의 마음과 처한 상황에 각자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적절한 말이어도 충분히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과 나는 처음이었고, 나도 위로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다. 물론 무엇이 서로를 위한 위로인지 곱씹어보는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위로를 멈추란 것은 아니다. 진심이 엇갈린 위로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계속 해 보아야 느는 것일 테니까. 잘 위로를 하는 것도 그리고 잘 위로를 받는 것도.           





목요일마다 업데이트를 하겠다고 약속한 다음 주부터 지각입니다. 

에잇, 누가 기억하겠어 싶어 알림을 드리지도 않았어요. 

앞으로는 지각하지 않고 만약 하게 된다면 미리 양해를 구할게요. 

목요일 업데이트가 어려울 것 같아 매주 화요일에 찾아가도록 할게요. 

기다려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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