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기대는 시간' 매거진을 시작하려고 해요
지난해 ‘안녕 사르코이드’라는 매거진을 브런치에 연재했다. ‘질병’과 ‘아픈 몸’을 마주하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생겨났고 여러 생각이 찾아왔으며 그러다 넘쳐흘렀다. 글을 쓰고 싶고,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내 몸 바깥으로 자꾸만 나오고 싶어 하는 말들을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지금을 기록하고 싶었고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말을 걸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말을 걸고 싶기도 했지만 누군가 말을 걸어와 주기를 바라는 하나의 신호였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아직 만나지 못한 존재를 찾고 싶었다.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에 ‘과연 내 아픔으로 글을 써도 될까?’란 우려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이 정도 아픔쯤은 그냥 넘겨야 하는 게 아닐까. 내 고민과 생각이 누군가에게 사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더 아파야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아픔이나 고통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며 한 사람이 겪는 고유하고도 특별한, 그 사람이 아니라면 꺼낼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음을 서서히 알아갔다. 물론 치명적인 병을 경험하는 분들도 있기에 그 앞에서 섣불리 고통의 정도를 운운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아픔이든 그것은 몸을 관통해 경험하는 사람만이 느끼고 감당해야 하는 몫이기에, 함부로 타인이 겪는 아픔의 정도를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싶었다. 우려스러운 부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왜 나는, 내 아픔의 정도를 섣불리 판단하려고 했던 걸까. 나 정도의 아픔이면 괜찮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몇 달 고생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이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결과라고만 믿었던 걸까. ‘잘 지내고 있어?’라는 물음에 꼭 잘 지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또, 어떤 아픔은 드러내도 괜찮고 어느 정도의 아픔은 숨겨야만 할 것 같다고 누가 정해 주었을까. 상처가 몸 밖으로 드러나거나 한눈에 보기에도 ‘아파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왠지 자신 있게 아픔을 주장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미묘한 어려움은 무엇일까. 반대로 언뜻 보기에 아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혹은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온 걸까.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고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아픔에 인색하다. 나 역시 그랬다. 아프면 얼른 회복해야 하고 ‘건강해요’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힘이 되는 말이라고 당연시 여겼다. 그랬기에 아픈 몸은 피해야 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기피의 몸으로 느꼈다. 음 아니다. 아플 수 있다는 상상 특히 젊은 나이에도 아플 수 있다는 몸과 삶의 형태를 그리지 못했다. 아픔은 노년 그 어드메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으니 아프다는 몸의 신호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이 정도쯤이야 이겨 내야지. 이건 아픈 것도 아니야. 아픔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가 아픈 몸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질병이 어느 정도 진척된 이후였다.
다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었다. 여전히 아픈 몸과 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글이 될 것 같다. 그러면서 파르르 진동하는 마음의 이유들을 하나씩, 그러나 다양하게 찾아가 보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젊고 아픈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지, 아픈 몸을 무감각하게 바라보게 하는 다층적인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고 이 문화가 다시 내 몸과 마음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이 커다란 질문, 내가 던져놓은 질문에 과연 내가 얼마나 해석하고 답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던져두었으니 차근차근 내 앞에 있는 것부터 마주하며 해보고자 한다.
아픈 몸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피로감을 높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주제도 아니고 가끔은 읽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할 테니까. 하지만 삶에 있어서 생로병사는 운명과도 같은 것인데 지금까지 아픔이나 질병에 대한 이야기와 글은 상대적으로 너무 적었으니까, 나 하나쯤 덧붙여도 나쁠 것이 없다 싶었다. 내 앞에 놓인 운명을 슬기롭게 마주하기 위해, ‘나 하나쯤이야’라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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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늬바람입니다. 오랜만이지요 :)
'안녕 사르코이드'매거진을 닫은 이후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비슷하지만 또 다른 글을 써보고 싶어서 새로운 매거진을 만들었어요. '몸에 기대는 시간' 매거진 글은 매주 목요일에 업데이트 하려고 해요. 분명 업데이트를 시기를 놓치고 혼자서 안절부절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만 음, 일단은 이렇게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으랏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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