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학용 Nov 19. 2020

#10 일상과의 단절로부터 우리들은

라다크 레, 문명의 이기들 앞에 서서

시골마을 홈스테이와 라마유르(Lamayuru) 트래킹에서 8일 만에 돌아온 아이들은 레(Leh)를 대한민국의 어느 한 도시처럼 편안하게 생각했다. 해발고도 3520미터의 이 오래된 도시가 우리들을 고산병과 낯설음으로 꽤나 괴롭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숙소에 침대가 있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고, 유사 한국음식점 아미고 Amigo에서 먹는 짝퉁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만으로도 그저 열광했다. 기껏해야 구멍가게와 재래시장일 뿐이지만 그들은 문명의 이기(利器)가 되어 행복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도시가 무엇보다 아이들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와이파이’ 일 것이다. 게스트하우스나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찾아들면 어김없이 와이파이가 가능하고, 그것은 한국의 어느 도시와도 바로 소통을 시작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카카오톡’으로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인터넷 창을 열어 궁금했던 한국의 연예계와 스포츠 소식을 흡수한다. 


참으로 놀랍다. 10여 년 전, 내가 배낭여행을 할 때를 떠올려보자면. 몇 개월에 한두 번 대도시에만 있는 전화방에 들러 부모님께 안부전화만 겨우 드리던 기억. 인터넷 카페에서 이마에 참을 인(忍) 자를 새겨가며 몇 개의 메일을 읽고 한두 개의 답장을 쓰고 나면 1시간이 휙 지나가던 기억. 


편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다. 문명의 이기들이, 여행이 우리들에게 주는 어떤 ‘단절감’을 뺏어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일상과의 단절로부터 오는 외롭지만 고고한 이방인의 정서를 가볍게 만들고, 단절이 끝나는 날 느끼게 될 해방감과 일상에 대한 고마움의 크기를 줄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쩐지 오래된 여행자는 길 위에서 만나는 문명의 이기들이 늘 반갑지만은 않다.     

라다크 레의 거리
숙소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데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다.-(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유진)         
‘아미고’라는 한국식당에 갔다. 반찬으로 김치랑 계란말이랑 가지볶음과 땅콩 튀김이 나왔는데, 너무너무 맛있었다. 특히 얼큰한 된장찌개는 진짜 한국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한국에서 1100원짜리 흔하디 흔한 라면 하나도 여기서는 얼마나 맛있는지… 진짜 국물까지 후루룩 다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엽서 4장을 사고, 망고도 샀다. 시식(?)으로 자두도 2~3개 먹어보고 70루피를 주고 망고 1kg을 샀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민아)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Wi-Fi’가 되는 식당으로 가서 아빠와 통화를 했다.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엄마 아빠께 다 전화를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누나와 형들이 8시간이나 더 일찍 온다 해서 허겁지겁 정리하고 방을 옮겼다. 오랜만에 형, 누나들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다시 ‘아미고’에 갔다. 이번엔 다 같이 먹었다. 또 라면을 먹었더니 역시나 또 맛있었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우현)       
점심 먹으러 와이파이가 터지는 식당을 찾아갔다. 이때 유진이만 스마트폰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현, 솔지, 나만 핸드폰에 집중하였다. 유진이는 속으로 소외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순간의 내 감정에 충실했지만 점차 미안해졌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수경)     


이제 레에서 아이들의 날갯짓은 자유다. 모둠별로 받은 용돈의 범위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어떤 음식이든 사 먹을 수 있다. 물론 원치 않는다면 하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굶을 수도 있다. 스스로 여행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여행에 대해, 자신에 대해, 혹은 세상에 대해 스스로의 생각과 느낌을 채워갈 수 있기를. 

라다크 레, 길 위의 와이파이

덕분에 아이들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게스트하우스를 나선다. 모두들 어디론가 나가고 늦잠을 잔 민아와 유진만이 남아있다. 그들과 함께 초모 성과 레 곰파 및 왕궁에 올랐다. 트래킹 이전이었다면 꽤나 힘들었을 언덕이지만, 가뿐하다. 초모 성과 곰파는 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만큼 전망 또한 장쾌했다. 흙으로 빚어진 도시가 히말라야 설산 품에 평화롭게 안겨 있고, 손에 닿을 듯 가까운 하늘에는 오색 타르초가 파랗게 휘날리고 있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사는 사람들 마음은 어떨까? 


사원 바람벽에는 주황색 승복을 입은 젊은 스님이 기대어 섰고, 벼랑 끝 바위 위에는 금발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서양 여행자가 가부좌를 틀고 걸터앉았다. 투명하다. 그들의 마음이 파란 하늘처럼 투명하게 내게 와 닿는다. 민아는 어느새 위태로운 바위 위에 올라서 손을 흔든다. 찰칵. 아마도 아름다운 사진이 되겠지. 여행길에서 풍경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 역시 투명하므로. 


왕궁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라네 모둠 아이들을 만났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으니 왕궁은 벌써 둘러보았고, 이제 시장에 엽서랑 과일이랑 사러 가는 길이란다. 오늘 저녁에는 과일을 먹으며 고국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엽서 글을 쓰는 그들의 모습을 감상하게 될 모양이다. 다른 모둠 아이들을 보았냐고 서로에게 물어본다. 설산으로 둘러싸인 이 낮고 작은 하늘 아래 그들은 또 어디를 걷고 있을까. 이 도시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길을 찾고 길을 잃고, 무언가를 사기 위해 서툰 흥정을 하고, 눈 밝은 여행자들을 만나 그리 중요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길게 나누기도 하겠지. 자신들만의 여행 이야기를 하나둘 쌓아가면서.        

라다크 레, 초모 성에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
하늘이 가까운 땅 라다크 레

여행학교에는 단지 두 가지 규칙만이 있다. 일기 쓰기와 약속시간 엄수하기.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몇 달러씩의 벌금이 부가되고, 그렇게 모인 돈으로 기부를 할 예정이다. 말하자면 여행을 즐기고 조직하는 것은 자유지만, 여행의 나날을 성찰하는 것은 의무라는 뜻이다. 


오늘은 성찰의 또 한 단계로서 '중간 돌아보기'를 하는 날이다. 늘 그렇지만 프로그램은 간소하다. 여행 일정이 절반을 지나는 시점에서 각자 자신의 여행을 성찰하는 글을 쓴 후에 모든 친구들 앞에서 한 명씩 낭독하고, 또한 경청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1시간이 넘게 방바닥에 일기장을 대고 끙끙대며 글을 쓴다.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목소리가 수줍게 떨린다. 


여행 떠나와 11일 만에 전화통화했던 날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생각했다는 아이. 트래킹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마침내 고개 정상에 선 순간 스스로가 그보다 더 자랑스러울 때가 없었다는 아이. 여행에서 돌아가면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갈 수 있을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하던 아이…. 그리고 사고 없이 여기까지 여행해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던 나의 글. 

그날 우리들의 글은 진솔했고 저마다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의 깊이와 무게는 서로의 가슴에 가닿았다. 글을 쓰는 사이에 자신이 처음 여행을 떠나왔던 이유를 기억해내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고, 길과 바람이 가슴에 새겨놓은 이야기를 꺼내보았겠지. 또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자신이 생각지 못했거나 미처 글로 옮기지 못했던 것들을 함께 나누고 느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밤 우리들의 시간은, 함께 여행했지만 각자 다르게 보고 듣고 느꼈을 것들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행 12일째, 우리들은 여행의 굴곡진 계곡을 지나 깊고 푸른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고작 10일이 흘렀는데 일기장을 펴 첫날의 내용을 보고는 너무 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나 보다. 나에게 이번 여행은 기쁨과 고통이 극적으로 함께 했다. 제일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것은 4박 5일 트래킹이다. 매일 밤 ‘아, 여기를 벗어나게 해 주세요. 눈을 뜨면 내 방 침대에서 고구마 냄새를 맡으며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나를 위로했다. (중략) 트래킹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인내와 무한 자신감, 끝날 것 같지 않은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희망, 나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용기, 고통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 준 동료들, 삼촌과 이모. 난 어쩌면 이런 것들을 바랐기에 트래킹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진실)     
정호네 방으로 모두 모였다. 아이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글도 있었고, 나름 최선을 다한 글도 있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쓴 글, 그래서 울컥하게 만든 글도 있었다. 두 줄 혹은 다섯 줄 일기에서 한쪽 글을 쓴 우리 정민이,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해준 예인 오빠, 트래킹에서 누구보다 고생한 진실이, 이 여행에 대한 걱정과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던 삼촌의 글, 삶의 무게감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이모의 글, 자신의 글을 읽는 자리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새롭게 느끼고 다시 기억할 수 있는 것 같아, 좋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아라)      
처음 인도는 어떤 곳이고 라다크는 어떤 곳일까 기대하며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를 타면서 진짜 가는구나 실감이 났다. 하루-이틀-사흘이 지나면서 점점 재미있어지고 점점 여행 온 재미에 빠져드는 순간 트래킹을 갔다. 트래킹도 나쁘진 않았지만 조금 힘들고 아팠다. 하지만 재미도 있었다. 멋진 풍경과 계곡에서 노는 것과 트래킹 하며 수다하는 것과 텐트에서 형들과 자는 것 모두 다 즐거웠다. 당나귀와 말들도 우리와 똑같은 길을 잘 간다는 게 신기했다. 트래킹이 끝나서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좋은 건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는 거고, 아쉬운 것은 원래 가려고 했던 트래킹 코스를 못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다. 이제 고산지대에 적응되었으니 남은 여행을 재미있게 시작할 것이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정민)


매거진의 이전글 #9 여행이란 때론 다시 와야 할 이유를 남기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