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도식화로 말하자면, 과거 많은 한국 영화는 연수 '엄마'로 보여주던 이야기를 경아의 '딸'로 시선을 돌린다. 엄마를 구해내거나, 용서하거나, 사랑하는 이야기는 관계의 회복, 가족의 회복이다. 부정적으로 보면, 익숙하게 반복해온 과거 회귀다.
딸은 다음 세대다. 경아와 연수는 이어져 있지만, 결코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둘의 차이는 갈등을 낳지만, 상처 없는 발전은 없다. 발전이다. 관계의 회복 외 영화는 세대에 따른 변화를 이야기한다.
고통스러운 이 현재 사건에 일말의 희망이나 따뜻함이 거짓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휴머니즘'에 위선이 읽히지 않는 영화는 드물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는 '가난 포르노' 등 감정 과잉에 매몰되거나, 군데군데 뉴스를 보는 듯 프로파간다가 되기 쉽다. 다큐멘터리 정도만 예외다.
그렇지 않다는 건, 재능 있는 감독이란 건데, 그 전에 좋은 사람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말이 이어질 때와 끊길 때가 좋다. 그때의 표정이 좋다.
강한 주제 자체가 관객에게 폭력으로 다가올 우려가 있는데, 감독은 영상의 공격성을 최대한 줄인다.
+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국가가 중국 정도로 망 통제 권력을 가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불가능에 가깝고, 위험합니다. 모자라지만 현실적인 방법은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에티켓 교육을 실시하는 걸 텐데요. 수험 공부 대신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게 위험이 되지는 않겠죠.
+ 형량이 낮은 이유는 가해자가 어느 정도 악의가 있었는지, 재발 우려는 어떤지 등에 있어 높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교육과 함께 사회인식이 같이 변하기를 바랍니다.
---이하 스포(약함)---
연수는 친구나 엄마에게 관계 영상을 보냈다는 폭력만으로 괴롭지만, 일상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경아가 교직을 그만둔 이유는 해석할 수 없는 시선을 해석하려는 데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다.
인터넷. 영상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는 건 아닐 테지만, 동시에 누구든 자신을 알아볼 수 있다.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시선은 택시를 타면 해결되지만, 수업할 때 자신만 바라보는 학생들은 어렵다. 일상을 회피, 파괴해야 한다.
- 연수, 피해자의 과실
경아는 이해할 수 없다. 대체 왜 관계하는 영상을 찍는 데 동의한 건지. 딸은 똑똑하다. 착하다. 자랑이다. 그런 딸이 어떻게 이런 천박한 행동을 한 건지. 받아들이지 못해 연수에게 따져 묻는다.
촬영에 동의하면 찍은 사실로는 처벌받지 않는다. 가해자에게는 유포에 대한 죄만 묻는다. 이 자체는 합리적이다. 문제는 동의라는 이유로, 피해자를 무조건 연민할 수는 없다는 사이버 대법관과 같은 시선이다. 과실에 따른 책임을 감수하라는 것. 이들은 나무망치가 아닌, 송곳을 들고 다닌다.
폭력에 쓰인 렌즈와 화면은 관객이 보는 렌즈와 화면과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이 기술은 선의와 악의, 또는 사이, 그리고 변한다.
경아는 이해할 수 있을까. 사진은 일기장이나 메모같이 일상을 기록하는 간단한 수단이다. 연수에게는 영상도 그랬다. 가해자는 2년을 사귄 남자다. 일상을 공유하던 사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딸은 사귀는 동안, 순간순간 행복했다. 삶에서 모든 위험을 배제하고 살 수는 없다. 일기가 다른 사람의 손에 갈 걸 우려해 조심스럽게 적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연수는 '밤에는 택시 타지 마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종종 무시한다. 피곤해서다. 촬영 동의도 그 정도의 위험 감수였을 거다. 택시 우려는 직접적인 성폭행이나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러게, 밤에 택시를 타지 말았어야지" 말하는 사람은 없다. 촬영 동의에 대한 피해자의 과실이 존재할까.
- 경아, 폭력의 내면화
걸레. 분노한 순간, 경아의 입에서 이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 말은 폭력을 일삼던 남편이 자신에게 하던 말이다. 남편은 술을 마시면 자신을 때렸고, 동의 없이 관계하며 이 단어로 자신을 욕했다.
한국에서 자신의 성관계에 관대한 부모는 많지 않다. 딸이 성인이 된 뒤에도 이런저런 단속을 이어가고, 혼전순결을 권장하는 부모는 흔하다. 그럼에도 경아는 연수의 친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극성이다.
경아의 일상은 학대였다. 남편이 자신을 욕하고, 동네 주민이 자신을 욕했다. 남편의 학대 이유 중 하나는 의처증이었을 거다. 외부에서는 이유 없는 의심이 아닌, 확실한 증거에 따른 분노로 여겼다. 걸레.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다.
경아는 딸이 이런 소문에 괴로워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문이 아닌 사실로 딸의 이야기를 접한 그는 "걸레가 따로 없더라"며 딸을 해한다. 이 순간, 연수는 엄마에게서 아빠를 본다.
똑똑한 연수는 아빠에게 당하고 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자신밖에 없으니까. 지켜주고,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연수는 경아에게 몸을 기대지만, 떨치고 그대로 자빠진다.
- 연수의 탓 내면화, 자책과 미안함
경아는 삶이 오르막길이다. 뭐가 이리 힘든지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모두 자신의 탓으로 수용하기를 택한다. 모두 자신의 원죄이기 때문에 뭘 그렇게 항상 열심히 한다. 노력 여하를 떠나 폭력은 남편의 학대는 죽어서야 (물리적으로) 끝났고, 연수에게는 그게 여러모로 답답하다.
연수는 온라인 수업 학생 혜진*을 만나 밤산책을 한다. 남자친구가 관계를 원한다며, 자신의 첫경험은 어땠는지 묻는다. 미안했다고 답한다. 엄마를 배신했다는 생각에서다. 역설적으로 혜진에 대한 우려가 줄어든다.
극 초반 생리통을 핑계로 체육 수업을 빠져 남자친구와 노는 학생에게, 연수는 혼내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또 바뀌었냐며 가볍게 핀잔을 준다.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와 달리 아이들을 이해하는 교사였다.
비슷한 변명으로 수업에 빠지고 남자친구와 놀러 간 혜진에게는 다르게 반응한다. "남자친구와 있는 거 아니냐" "부모님께 확인해도 되냐" 질책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 독하게 공부해 열린 마음으로 살던 자기(self)는 연수의 전부는 아니다. 학대 가정에서 자라고 보수적인 성 관념을 주입받은 연수.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을 마주하자, 무의식 속 웅크리고 있던 자책이라는 씨앗이 움튼다.
연수는 왜 혜진을 만났을까. 혜진의 남자친구, 잠깐 화면으로 본 그 남자애는 별로 믿음직하지 못하다. 그 애에게 상처받는 건 아닐까. 경아가 연수에게 가진 우려처럼, 연수는 혜진이 걱정됐다.
혜진은 자신의 걱정과 고민을 말한다. 연수에게 어떤 조언 비슷한 걸 요청한다. 연수는 자신의 첫경험과 엄마가 연결돼 있었다는 걸 상기한다. 그래서 혜진에게 조심을 말하는 대신 그 애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연수는 혜진의 해맑음에 힘을 얻고자 했을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두렵고, 알던 지인조차 껄끄러운 연수다. 그렇지만 멈춘 삶을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는 밖을 나가야 하고, 누군가 만나야 한다. 그 선택으로 혜진을 만나 일종의 위로를 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기댈 데 없는 삶은 너무 버거우니까.
- 역할 윤리에 대한 단편
경아는 요양 보호사다. 치매 노인을 돌본다. 성실한 태도에 노인의 딸이 고마워한다. 그는 변호사다. 성실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변호사는 연수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간다.
연수는 교사다. 수업 준비를 꼼꼼히 한다. 학생을 평등하게 대한다. 당연히 학생들도 이를 알고 따른다. 평소 인품을 아는 동료 교사 상순은 연수를 책망하지도, 경아에게 번호를 알려주지도 않는다. 단지 응원한다.
치매 노인의 딸은 아빠에게 담배를 한 보루 사 간다. 아빠는 몸이 좋지 않다. 기침하는 걸로 보아 천식이나 다른 호흡기 질환을 안고 있을 테고, 담배는 치명적이다. 화내며 용돈을 뺏고 담배를 버려보지만, 별 소용없다. 어쩌면 적절한 타협이 필요한 건 아닐까.
경아는 엄마다. 학대를 견뎠다. 극 중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내 주변에는 '이혼은 자식 앞길 막는 일'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경아는 오래 살아온 그 집을 떠나기로 한다. 셋이 찍은 가족사진, 남편의 옷가지를 버린다. 자기 삶을 살기로 한다. 딸이 방문할 때 따뜻할 집이 될 수 있도록.
연수는 딸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할까. 부모의 뜻이, 어른의 말은 항상 옳은가. 아빠는 싫었고, 엄마는 간혹 버거웠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서 한 얘기란 건 안다. 그런데 집 앞에서 기다리다 하고 싶을 말을 쏟아내는 건, 학교 앞으로 찾아온 전 남자친구랑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걸까.
- 끝인사, 상순 합시다.
많은 계단과 오르막길 끝에, 연수는 초록불 신호등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꽃길에서, 꽃길로. 그녀의 횡단을 응원한다.
* 온라인 수업 학생 이름을 몰라 편의상 배역을 맡은 박혜진 배우의 이름을 빌렸다.
+ 부분 '영화적 허용'으로 넘겨야 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연수나 경아가 상자를 그대로 버리는 장면, 연수가 노트북을 버리고 가고 경아가 그걸 수리하는 장면, 혜진 남자친구의 행동들 등.
+ 어색한 장면도 있다. 신상과 번호 유출은 피해자가 몹시 두려워하는 상황이고, 큰 위험, 실제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장면은 이런 필요에 의해서만 들어간 듯, 어떤 영향--연수의 무너짐, 경아에게 전달되는 소문, 가해자 가중처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