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가 처음인 당신에게 추천하는 최고의 선택
가장 훌륭한 판타지 대작으로 꼽히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이 개봉한지도 23년이 지났다. 그러나 개봉일자와 상관없이, 덕질은 느닷없이 시작되는 것이다. 늦여름에 벼락처럼 찾아온 <반지의 제왕> 덕질을 시작해 23년 전 작품의 인터뷰와 비하인드, 코믹콘 영상까지 찾아보던 날들 중,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반지의 제왕> 필름콘서트 영상을 보게된다.
관객이 찍은 이 필름콘서트 영상은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에서 수적 열세를 겪는 곤도르를 돕기 위해 로한의 기마대 '로히림'이 나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로한의 왕, 세오덴이 죽음을 불사하고 진격하자는 연설을 끝으로 'Death!'를 외치며 달려나가는 장면인데, 이를 보는 오케스트라 관객들도 다함께 'Death!!!!'를 외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연극이나 뮤지컬, 오케스트라에서 시체관극(소음이나 미동없이 관람하는 태도)이 기본 매너로 여겨지고 있기에,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치 영화관의 싱어롱과 같았다. 생각해보면, 필름콘서트는 영화 상영과 오케스트라 연주를 동시에 보여주는 형식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 영상을 보고 나도 오케스트라를 듣고 싶고, Death를 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찾아보니 반지의 제왕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오픈되는 두 개의 콘서트는 다음과 같다.
1. 블록버스터 영화음악콘서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로 유명한 해리포터, 쥬라기공원, 반지의 제왕 등의 ost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2. 반지의 제왕 필름콘서트: 1년에 1편씩, 총 3년에 걸쳐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모든 ost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블록버스터 영화음악콘서트는 주로 매년 상반기에 열려서, 나는 2024년 9월에 열린 반지의 제왕 필름콘서트를 다녀왔다.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인 콘서트
일시: 2024년 9월 28일(토) 7pm / 9월 29일(일) 1pm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러닝타임: 210분 (인터미션 20분)
상영정보: 반지의 제왕 2편 두개의 탑
사실 서사적으로 최애는 3편 왕의 귀환이고, 가슴 속 최애는 1편 반지원정대인데 올해는 2편 두개의 탑을 연주해준다고 해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본격적으로 입덕하고 나서 해주는 공연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2024년 9월 29일 오후 1시 회차를 예매했다. 대극장 내부에 스크린이 설치되는 거라 좌석에 따라 시야방해가 있다고 해서, 3층 D열 50번대를 선택했다.
거의 4층에 가까운 좌석이었지만, 일단 뮤지컬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 개개인의 표정을 볼 일은 잘 없으니 괜찮았다. 스크린 시야방해도 없었으며, 아무리 뒤쪽이어도 어느 파트에서 연주를 하고있는지는 충분히 식별 가능했다.
약 3시간 반에 걸친 필름콘서트는 정말 ... 내 세상이 넓어지는 경험이었다. 당신이 듣고 있는 모든 음악을 오케스트라가 연주해준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오프닝 음악부터 영화 상영이 끝난 후 10여 분에 달하는 엔딩크레딧까지, 모든 음악을 말이다.
기존 클래식 연주 비평과 같은 방식은 무리겠지만, 반지의 제왕 세계관이 잘 드러나는 테마별 연주 특징을 위주로 후기를 써보고자 한다.
아이센가드 테마 (Isengard Theme)
반지의 제왕 속 악의 군대, 오크족과 우룩하이족이 등장하면 나오는 모든 테마를 보통 아이센가드 테마로 칭한다. 반지의 제왕 3부작 속 메인빌런은 크게 사우론(반지의 제왕)과 그를 따르는 사루만(타락한 마법사)이다. 사루만은 사우론의 명령을 받아 중간계를 정복하기 위해 아이센가드 탑에서 오크족을 훈련시키고 우룩하이족을 창조한다.
이 과정에서 사루만과 부하들은 아이센가드의 나무를 베고, 지하에서 철로 무기를 만든다. 그래서 아이센가드 테마는 '철의 테마'와 같다. 오크족과 우룩하이족의 육중한 무게, 칼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군대, 어둠 속에서 힘을 키우는 거대한 악의 세력 등을 표현하기 위해 관악기와 타악기 위주로 연주가 진행된다. 또한 실제로 쇠사슬을 사용해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드는 소리를 표현하는 '쇠사슬' 연주가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사이로 쇠사슬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다. 아이센가드 테마 자체가 굉장히 웅장하고 무게감 있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참고로 아이센가드 테마가 가장 잘 들리는 영화는 2편 <두개의 탑>보다는 1편 <반지원정대>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센가드의 군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인간 테마 (Man Theme)
반지의 제왕 속 대표적인 인간, 아라곤이나 로한·곤도르 군사들이 등장할 때 나오는 테마를 내멋대로 인간 테마로 칭해보았다. 현악기 위주로 연주되며, 인간 테마라 그런지는 몰라도 성악을 많이 활용한다. 특히 인터미션 이후 2부에서 로한의 펠렌노르 평원 전투가 시작되며, 본격적으로 소프라노와 어린이 합창단이 많이 활약한다.
엘프 테마 (Elf Theme)
엔트(나무수염)를 포함해 중간계의 모든 요정족을 포괄하는 테마와도 같지만 주로 엘프가 많이 등장하기에 엘프 테마로 칭한다. 엘프하면 떠오르는 신비로운 이미지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하프를 메인으로 한 현악기 연주와 소프라노 합창이 돋보인다. 인간 테마랑 비슷한듯 다른데, 엘프 테마는 하프의 아름다운 선율을 강조하면서 그야말로 천상의 소리를 들려준다.
엔트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기본 엘프 테마 베이스에 실로폰 연주가 추가된다. 영화 내 사운드트랙에는 실로폰처럼 튀는 소리가 없지만, 오케스트라 연주 과정에서 임의적으로 더한 듯하다. 메리와 피핀이 엔트랑 대화하는 장면에서 엉뚱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전투로 인해 긴장되었던 극의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준다.
간달프 테마 (Gandalf Theme)
역시 내멋대로 간달프가 등장할 때 나오는 테마를 간달프 테마로 이름 붙여보았다. 간달프 테마는 한마디로 황홀한 신의 느낌이다. 인간 테마와 엘프 테마를 적절히 섞은 듯한 느낌에, 현악기와 관악기 위주로 연주된다. 황홀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간달프가 반신족 마법사인 '마이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간달프 테마는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에 나오는 hope and memory다. 피핀을 피신시키기 위해 곤도르로 달려가는 간달프의 모습 뒤로 들리는 사운드트랙으로, 2분이 안 되는 짧은 길이임에도 섀도우팩스를 타고 초원을 가르는 간달프의 멋진 모습이 저절로 연상된다. 내년에 열릴 <왕의 귀환> 필름콘서트에서 꼭 내 귀로 듣고 싶다.
결론적으로, <반지의 제왕> 팬으로서도, 필름콘서트 초심자로서도 정말 좋았던 공연이었다. 장장 3시간 30분의 오케스트라가 끝나고 기립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클래식 연주는 지루할까봐 망설이고 있다면 /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처음이라면 / 좋아하는 영화의 모든 음악을 수제로 말아주는 경험이 하고싶다면 필름콘서트를 적극 추천한다. 꼭 좋은 자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만족하며 즐길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모든 연주가 끝나고 나서는 2025년에 열릴 3편 <왕의 귀환> 예고 포스터가 떴다. 사실 매년 해주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확정을 받으니 정말 기뻤다. 나는 내년에 또 보러갈 거다. 중간계의 왕이 귀환하신다는데 다들 대관식에 참석할 거라 믿고, 내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만남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