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올해의 사자성어, 도량발호의 '들보 량'
매년 교수신문에서는 한 해를 대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는다. 2024년의 사자성어는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뛰다”라는 뜻의 도량발호(跳梁跋扈)다.
이 성어는 '도량'과 '발호'가 결합한 말로, 뛸 도(跳)와 들보 량(梁), 밟을 발(跋)과 따를 호(扈)를 쓴다. 跋에는 밟는다 외에도 뛰어넘는다는 뜻이 있으며, 扈는 통발의 뜻으로 썼다. 도량은 살쾡이나 족제비가 집의 들보를 제멋대로 건너뛰는 모습이며, 발호는 큰 물고기가 통발을 제멋대로 뛰어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도량은 장자가, 발호는 후한의 황제 질제가 쓰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질제는 어린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대신인 양기를 '발호장군'이라고 불렀다가 양기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교수들은 이 사자성어로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하며 사적으로 남용하고 주변 사람들을 짓밟는 모습을 풍자하려 했는데, 12월 2일 설문조사 종료 후 하루 만에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발동해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12월 9일 교수신문에 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할 때, 정태현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추천사에서 계엄령을 도량발호의 최악의 사례라고 꼬집어 말했다.
이 도량발호에 들어가는 한자들은 모두 형성자다. 뛸 도(跳)는 억조 조(兆)가, 들보 량(梁)은 비롯할 창(刅)이, 밟을 발(跋)은 달릴 발(犮)이, 따를 호(扈)는 지게 호(戶)가 소리를 나타낸다. 이 중 억조 조(兆)는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나머지 세 한자들에서 파생된 한자들을 세 편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이번 편은 비롯할 창(刅)의 차례다.
刅은 현대에는 비롯할 창(創)으로 대체되어 쓰이지 않는 한자로, 칼을 나타내는 칼 도(刀)에 점 두 개를 찍은 모습이다.
이 두 점을 칼날을 강조하는 부호로 보아 양쪽에 날이 선 날카로운 칼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고, 핏방울을 그린 것으로 보아 칼날에 다친 상처를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진(晉)계 문자에 속하는 중산왕착호의 명문에서는 설 립(立)과 칼날 인(刃)을 합한 회의자로 나타냈고, 《설문해자》의 혹체에서는 지금 쓰는 글자인 創, 곧 칼 도(刀)가 뜻을 나타내고 곳집 창(倉)이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로 나타냈다. 한나라의 예서에서는 刅과 創을 모두 볼 수 있는데, 현대에는 創만이 살아남았다.
刅, 創의 원래 뜻은 '다치다'로, 《설문해자》에서는 '다치는 것이다. 칼날 인(刃)과 한 일(一)의 뜻을 따른다. 創은 혹 칼 도(刀)가 뜻을 나타내고 곳집 창(倉)이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이 뜻이 아직도 남아 있는 낱말이 창상(創傷)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대부분 '비롯하다' 또는 '짓다'의 뜻으로 쓰고 있다. 창조(創造), 창작(創作) 등이 그 예다.
《설문해자》로 돌아가면, 刱이라는 또 다른 한자가 있다.
刅과 우물 정(井, 丼)이 합한 한자로, 《설문해자》에서는 “법을 만들고 사업을 세우는 것이다. 井의 뜻을 따르고 刅은 소리를 나타낸다. 읽기는 創과 같이 읽는다.”라고 풀이한다. 이 한자가 '비롯하다', '짓다'의 뜻을 지니고 있는 創의 원래 형태인 것이다. 우물이 '비롯하다'의 뜻을 나타내게 된 까닭으로는, 바이두백과에서는 사람이 농사를 지으려면 먼저 우물부터 파야 했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시한다. 나중에 創이 刱의 뜻까지 흡수하면서 創에는 '다치다'와 '비롯하다'라는 두 가지 별개의 뜻이 생기게 되었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이 두 뜻의 성조가 다르다.
刱을 가시 형(荊)의 원 글자로 보고, 刅이 뜻을 나타내고 井이 소리를 나타낸다는 반대의 주장도 있다. 이에 따르면 刅(創)과 刱 모두 다치는 것이 원 뜻이 된다. 《집운》에서는 刱을 '다치는 것이다. 본래는 刅으로 썼다.'라고 풀이하는데, 刱의 원 뜻이 무엇이든 나중에는 刅, 創, 刱을 모두 같은 글자로 통용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롯할 창(刅, 급수 외 한자)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刅+井(우물 정)=刱(비롯할 창): 인명용 한자
刅+木(나무 목)+水(물 수)=梁(들보/돌다리 량): 양목(梁木: 들보), 교량(橋梁) 등. 어문회 준3급
梁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梁+木(나무 목)=樑(들보 량): 양두(樑頭: 대들보가 기둥을 뚫고 나온 부분), 동량(棟梁/棟樑) 등. 어문회 2급
梁+米(쌀 미)=粱(기장 량): 고량주(高粱酒), 고량진미(膏粱珍味) 등. 어문회 1급
들보 량(梁)은 물 수(水), 나무 목(木)이 뜻을 나타내고 비롯할 창(刅)이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다. 원래의 의미는 교량(橋梁)이라는 낱말에서 보여주듯이 다리로, 《설문해자》에서도 물을 건너는 다리라고 풀이한다.
금문에는 木 없이 水와 刅으로만 구성된 ⿰氵刅의 형태가 처음으로 출현하며, 진(晉)계 문자에서는 刅을 간략화한 칼날 인(刃)을 쓰고 水 대신 고을 읍(邑)을 쓰기도 한다(진계 문자 1). 초계 문자는 刅을 그대로 쓰며, 진계 문자와 마찬가지로 水 대신 邑을 쓰기도 한다. 《설문해자》 고문은 마치 물 위를 나무로 이어서 다리를 설치한 모습을 그려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梁의 변천사에서 물 수(水), 나무 목(木), 비롯할 창(刅)을 골라내서 정리한 소전의 형태가 예서를 거쳐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梁은 물을 건너는 다리인데, 배로 물을 건널 수 있게 하는 시설인 나루와 묶여서 진량(津梁)이라는 낱말을 만든다. 이 진량은 둘 다 물을 건너게 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이에서 형편이나 기회, 또는 바쁘게 뛰어다님, 또는 부처가 중생을 구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중국의 카이펑(開封, 개봉)시의 이름은 옛 춘추 시대 정나라 때부터 나타나지만, 이 이름은 얼마 못 가 전국 시대에 대량(大梁)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된다. 카이펑, 곧 대량은 운하를 많이 파서 수운이 발달한 도시로, 대량이란 이름은 물길 위에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을 도시의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대량이란 이름도 이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전국 시대 대량을 지배한 나라는 위(魏)나라로, 원래는 황하 동서에 걸쳐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울도 황하 서쪽인 안읍(安邑, 현대의 윈청시 융지현)에 두고 있었으나 이웃한 진(秦)나라와 대치 끝에 황하 서쪽의 영토를 점차 잃으면서 위험해진 안읍 대신 이 대량으로 천도했다. 천도 이후 위나라는 새 서울의 이름을 따 양(梁)나라라고 하기도 하며, 《맹자·양혜왕》편에서 맹자가 알현해 대화를 나눈 것으로 유명한 양혜왕이 바로 대량으로 천도한 위나라 왕이기에 양혜왕으로 기록에 남은 것이다.
대량은 수운이 발달한 도시인데 이를 뒤집으면 수공에 취약하다는 것이고, 진나라도 위나라를 멸망시킬 때 위나라가 대량에서 끝까지 남아 항전하자 대량을 수공으로 쓸어버려 대량을 황폐하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나라가 망한 후에도 위나라 왕족 중 일부는 서울인 대량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 양(梁)씨를 일컬었고, 현대의 양씨의 시조 중 하나가 되었다.
梁은 전국 시대 문자에서는 水 대신 고을 읍(邑)을 쓰기도 했는데 나무로 고을과 고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를 만들었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전국 시대의 양(梁)나라 이전에, 춘추 시대에도 양(梁)이라는 이름을 쓰는 작은 나라들이 몇 있었는데, 두 지역을 서로 이어 주는 다리 구실을 하는 땅이라는 뜻으로 양나라라고 했을 것 같다. 이 서로 다른 양나라의 공족들이 현대의 양씨의 시조들이 된다.
한편 한국의 양(梁)씨는 대부분 제주도의 토착 양(良)씨들이 글자만 바꾼 것으로 중국의 양씨와는 혈연 관계는 없지만, 굳이 梁이라는 글자를 고른 것은 중국 양씨의 영향일 것이다. 되짚어보면 다리라는 글자에서 지금의 양씨가 나온 것이다.
梁이 들보로 쓰인 용례 중 하나는 올해의 사자성어인 도량발호 말고도, 도둑을 일컫는 고사성어 양상군자(梁上君子)도 있다. 이 이야기는 후한에서 태구현장을 지낸 적이 있는 진식에게서 유래한다. 당시 흉년이 들어 진식의 집에 도둑이 몰래 들어와 들보 위(양상樑上)에 있었는데, 진식이 이를 보고 모른 척 하고 자손들을 불러모아 “불선한 사람은 본성이 꼭 그런 것이 아니라, 습관이 성격이 되어 그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저 들보 위의 군자(양상군자樑上君子)를 보라!” 도둑이 매우 놀라서 바닥으로 내려와 죄를 빌자, 진식은 용서해 주고 비단 두 필을 주었고, 그때부터 현 내에 도둑이 사라졌다고 한다.
위에서도 나오듯 이 이야기의 유래인 후한서 원문에서는 樑上君子로 쓰고 있으나, 지금은 梁上君子로 쓰는 게 보통이다.
梁은 고대 한국어를 한문으로 쓴 자료에서는 '돌'로 읽기도 한다. 이 돌은 도랑의 옛 말인데, 지금의 도랑뿐만 아니라 다리라는 뜻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순신이 12척의 판옥선만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무찌른 명량 해전의 무대인 명량(鳴梁)의 순우리말 지명이 '울돌목'이다. 울 명, '돌 량'이니 울돌목인 것이다. 또 한강의 주요 나루터였던 노량진 역시 순우리말로는 '노들나루'라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가야 말로는 문을 梁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가야어로는 문을 '돌'이라고 했다는 것인데, 이는 옛 일본어로 문을 뜻하는 '토'(戶)와 비슷하다. 이와 비슷한 여러 증거들을 바탕으로, 당시 한반도 남부인들은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쓰고 있었으나(일본과 한 나라라는 말이 아니다! 오키나와도 일본어와 같은 계통의 류큐어를 쓰나 1872년 일본에 멸망하기 전까지는 일본과 다른 나라였다) 신라, 백제 등 인근의 고대 한국어 사용 국가들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점차 한국어권으로 편입되었다는 '반도 일본어설'이라는 가설이 나왔다.
刅(비롯할 창)은 創의 원 글자로 칼날에 점 둘을 찍어 칼날을 강조하거나 칼날에 다쳐 흘리는 피를 나타냈다.
刅에서 刱(비롯할 창)·梁(들보/돌다리 량)이 파생되었고, 梁에서 樑(들보 량)·粱(기장 량)이 파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