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다, 꾸짖다, 어린아이 등
12월 14일 오후 5시, 대한민국 국회는 대통령을 다시 한 번 탄핵(彈劾)할 것을 의결했다. 노무현, 박근혜에 이어 세 번째 탄핵 의결이다. 이로써 12월 3일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격랑은 일단 잦아들 수 있게 되었고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하루빨리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며, 탄핵의 핵(劾) 자의 소리를 맡은 돼지 해(亥)의 자원과 이에서 파생된 한자들을 살펴보겠다.
亥는 십이지의 마지막 한자로, 다른 간지 한자들과 같이 갑골문부터 쓰여 왔다.
문제는 이 亥가 무엇을 본뜬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설문해자》에서 나온 것으로 식물의 뿌리를 본뜬 것이며 풀뿌리 해(荄)의 원 글자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돼지를 본뜬 것으로 돼지 시(豕)와 비슷한 글자였다는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亥를 새 추(隹)와 어울려서 ⿰亥隹처럼 쓰기도 했는데(갑골문 왼쪽에서 3, 4), 웹사이트 〈소학당〉에서는 이 한자를 亥의 변천에 포함하고 있다. 갑골문과 금문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소전으로 가면서 오히려 문자가 더 복잡해져서 두 이(二) 아래에 ㄴ 자와 사람 인(人) 자 두 개가 놓인 모습이 되었다. 고문(설문해자 소전의 왼쪽에서 1)은 아직 복잡해지기 전의 금문의 형태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소전이나 예서보다 오히려 전국시대 초나라 문자(전국시대 왼쪽에서 2)가 현대의 亥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보통은 예서쯤 되면 현대의 해서 모양에 가까워지는데, 亥는 예서에서도 소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부수 중에 亠를 '돼지해머리'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한자가 亥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亥의 머리는 예서까지도 亠가 아니고 二 모양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지금도 亥의 머리를 亠가 아니라 二처럼 쓰기도 한다.
이 二가 머리에 있는 亥의 옛 모양을 파자해서 26660일 곧 73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국어로 '해유이수육신'(亥有二首六身)이라 하는데, 《춘추좌씨전》 양공 30년조에서 유래한다.
때는 기원전 543년, 진(晉)나라 대비가 기(杞)나라 임금의 딸이므로 진나라에서 기나라의 성을 쌓아줬는데, 성을 쌓는 부역을 하는 노인이 있어 관리들이 그 노인의 나이를 물으니 노인이 정확한 나이를 답하지 못하고 정월 초하루가 갑자일이던 해에 태어나서 갑자일이 445번 지나고 다시 20일이 지났다고 대답했다. 곧 60×444+20=26660일을 산 것인데, 역법을 관리하는 관직인 태사 사조(史朝)가 이를 두고 '돼지 해(亥)는 머리에 두 이(二)가 있고 몸에 여섯 륙(六)이 (세 개) 있으니, 二를 몸으로 내리(어 2666으로 배열하)면 그가 살아온 나이가 된다.'라고 대답했다. 亥의 소전은 ㄴ 모양과 두 개의 사람 인(人) 모양이 있는데, 이 人을 넷째 천간 정(丁)자로 쓰기도 한다. 옛날에는 가로획을 다섯 오(五)로, 세로획을 한 일(一)로 삼아 六을 표현하기도 했기 때문에, 亥의 몸을 이루는 ㄴ과 두 丁을 모두 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진나라의 시각장애인 음악가인 사광(師曠)은 노인의 대답을 듣고 사조가 26660일이라고 파자로 대답하기에 앞서 바로 노인의 나이가 햇수로는 만 73세임을 맞추었다. 놀라운 암산 능력인데, 이 사광과 사조의 계산과 파자에서 비롯해, 亥로 26660일 곧 만 73세를 나타내기도 하고, 사조의 말인 '해유이수육신'이나 더 간략하게 '해(亥)의 나이'라는 뜻인 해수(亥壽)를 73세를 나타내는 데 쓰기도 한다.
이게 기원전 543년의 일이니, 亥는 춘추시대에 이미 머리에 두 이(二)가 있는 등 소전과 비슷한 형태로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국티베트어족 연구에서도 亥의 어원은 위의 두 가지, 곧 뿌리와 돼지로 나뉜다. 먼저 뿌리라는 설에서는 이 한자에서 파생된 씨 핵(核)에 초점을 맞춰, 티베트어 རག་ཙེ (rag tse), 카르비어(인도에서 쓰이는 중국티베트어 계통의 언어) rak과 견주어 본다. 돼지라는 설에서는 중국티베트어족은 아니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크메르어에서 돼지의 해를 뜻하는 កុរ (kol), 원시베트남어에서 돼지를 뜻하는 guːrʔ 또는 kuːrʔ 에 견주고 있다. 이 말에서 베트남어로 돼지를 뜻하는 cúi가 나왔는데, 현대에는 잘 쓰이지 않는 옛날식 표현이다.
돼지 해(亥, 해년(亥年: 돼지해), 신해혁명(辛亥革命) 등. 어문회 3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亥+人(사람 인)=侅(이상할 해): 김해(金侅: 조선 초기의 문신. 《조선왕조실록》) 등. 인명용 한자
亥+刀(칼 도)=刻(새길 각): 각인(刻印), 시각(時刻) 등. 어문회 4급
亥+力(힘 력)=劾(꾸짖을 핵): 핵론(劾論: 허물을 들어 논박하다), 탄핵(彈劾) 등. 어문회 1급
亥+口(입 구)=咳(기침 해): 해수(咳嗽: 기침), 진해(鎭咳) 등. 어문회 1급
亥+土(흙 토)=垓(땅가장자리 해): 해(垓: 경의 만 배), 해자(垓子/垓字) 등. 어문회 준특급
亥+女(계집 녀)=姟(백조 해): 해(姟: 만의 만 배, 억의 천 배, 조의 백 배. 옛날에는 수사가 바뀔 때마다 10배씩 수가 커졌다.《국어》) 등. 인명용 한자
亥+子(아들 자)=孩(어린아이 해): 해아(孩兒: 어린아이), 영해(嬰孩: 어린아이) 등. 어문회 준특급
亥+日(날 일)=晐(갖출 해): 허해(許晐: 조선 태조 때의 인물. 《조선왕조실록》) 등. 인명용 한자
亥+木(나무 목)=核(씨 핵): 핵(核), 원자핵(原子核) 등. 어문회 4급
亥+欠(하품 흠)=欬(기침 해): 경해(謦欬/謦咳: 헛기침), 광해(廣欬: 큰 기침) 등. 인명용 한자
亥+疒(병들어기댈 녁)=痎(학질 해): 해학(痎瘧: 이틀마다 발작하는 학질) 등. 인명용 한자
亥+目(눈 목)=䀭(눈큰모양 해): 허해(許䀭: 조선 세종 때의 인물. 《조선왕조실록》) 등. 인명용 한자
亥+糸(가는실 멱)=絯(묶을 해): 위물해(爲物絯: 외물에 속박됨. 《장자》) 등. 인명용 한자
亥+艸(풀 초)=荄(풀뿌리 해): 근해(根荄: 뿌리. 《다산시문집》) 등. 인명용 한자
亥+言(말씀 언)=該(갖출/마땅 해): 해당(該當), 당해(當該) 등. 어문회 3급
亥+貝(조개 패)=賅(갖출 해): 오장육부해(五臟六腑賅: 오장과 육부를 다 갖추는 것. 《상촌집》) 등. 인명용 한자
亥+阜(언덕 부)=陔(섬돌 해): 해여총고(陔餘叢考: 청나라 조익이 쓴 역사 고증 책) 등. 어문회 특급
亥+頁(머리 혈)=頦(아래턱 해): 함해(頷頦: 아래턱. 《일성록》) 등. 인명용 한자
亥+馬(말 마)=駭(놀랄 해): 해괴(駭怪), 경해(傾駭/驚駭: 뜻밖의 일로 놀람) 등. 어문회 1급
亥+骨(뼈 골)=骸(뼈 해): 해골(骸骨), 유해(遺骸) 등. 어문회 1급
亥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대부분 전국시대나 소전 이후의 문자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 갑골문의 한자들 중에 亥를 구성 요소로 삼는 한자들이 있다.
갑골문에는 亥의 기원 중 하나로 추정하는 豕와 亥를 같이 쓴 위 그림의 문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 문자는 얼핏 보기엔 亥가 豕와 같은 기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亥가 풀뿌리의 모양을 본뜬 한자로서 이 한자에서는 소리를 맡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豕와는 다른 종류의 돼지를 본떴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 외에도 亥가 들어가는 갑골문의 문자들은 다음이 있다.
이 중 다닐 행(行) 사이에 亥가 끼어 있는 문자는 현대에 亥에서 소리를 딴 문자들과 같은 짜임으로 보이며, 나머지 문자들은 소리 성(聲)에서 뜻을 나타내는 귀 이(耳)를 亥로 바꾼 것과 유사해 亥가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亥는 어쩌면 현대보다도 과거에 더 다양하게 활용된 것 같다. 지금은 亥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찾기 어렵기에.
현대에는 咳는 기침, 孩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달리 쓰지만, 《설문해자》에서는 두 한자를 모두 '어린이의 웃음소리 해'라는 같은 한자로 풀이했다. 孩가 고문, 咳가 소전이다. 예서에서도 두 한자를 혼용하고 있다. 또 《사기》 등에서 咳를 지금의 孩처럼 어린이의 뜻으로 쓰고 있다.
지금처럼 咳를 기침의 뜻으로 쓰는 것은 당나라 때부터 확인되며, 원래는 하품 흠(欠)이 뜻을 나타내는 기침 해(欬)를 통가해서 쓴 것이다. 떨어버릴 거(祛)를 쓰는 낱말로 가래를 치료할 때 쓰는 말인 거담(祛痰)을 들었는데, 이 낱말은 홀로 쓰이기보다는 기침·가래를 같이 치료하는 약인 진해거담제(鎭咳祛痰劑)처럼 진해(鎭咳)와 같이 쓰이는 게 보통이다. 이때 진해라는 말이 기침을 억누른다는 뜻이다. 원래의 한자 뜻대로라면 欬를 써서 진해(鎭欬)라고 했겠지만, 咳가 어린아이란 뜻 대신 기침이란 뜻으로 欬를 밀어내면서 진해(鎭咳)가 되었다.
씨 핵(核)은 《설문해자》에서는 “(나무 이름인데) 오랑캐가 이 나무의 껍질로 상자를 만들며, 모양이 염준(籨尊)과 같다”라고 풀이했다. 염(籨)이란 화장품을 놓는 경대를 가리키는 한자로 奩과 같은 한자며, 尊은 기물로는 술통 준(樽)과 같은 한자인데, 염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옥재는 《설문해자주》에서 현대의 뜻인 씨는 원래의 의미가 아니며 핵실할 핵(覈)을 통가한 것으로 核의 원 의미가 사라졌다고 했다. 《시경·상호지습》에 核을 열매의 의미로 쓴 “효핵유려”(肴核有旅) 즉 안주와 과일이 차려져 있다는 싯구가 있는데, 후한의 학자 반고나 채옹은 이 구절의 核을 覈으로 바꾸어 적었다. 중국어로는 나무 이름의 의미로는 gāi로, 핵심이나 조사하다는 의미로는 hé, hú로 달리 읽는다.
꾸짖을 핵(劾)은 《설문해자》에서는 “죄를 법으로 벌하다”라고 풀이했다. 원래는 죄인을 정죄하는 의미였고, 더 나아가서 죄상을 낱낱이 밝혀내는 행위까지도 뜻하게 되었다.
탄핵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1」 죄상을 들어서 책망함. ≒탄박.
「비슷한말」 논핵(論劾)
「2」 『법률』 보통의 파면 절차에 의한 파면이 곤란하거나 검찰 기관에 의한 소추(訴追)가 사실상 곤란한 대통령ㆍ국무 위원ㆍ법관 등을 국회에서 소추하여 해임하거나 처벌하는 일. 또는 그런 제도.
이 풀이를 보면 탄핵이라는 낱말에서 劾은 기본적으로는 확장된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죄를 낱낱이 밝혀내는 것은 곧 해임하거나 처벌하는 것, 즉 정죄하기 위한 것이고, 2번 의미에서 보듯이 보통의 절차로 정죄할 수 없는 관료들을 정죄하기 위한 절차가 탄핵인 것이므로 원래의 뜻으로도 쓰인다 할 수 있다.
亥에서 파생된 한자들에는 荄의 뜻을 따라 뿌리, 근원의 뜻을 지니는 한자들이 있다. 이를 주장한 조너선 스미스는 열두째 지지로 쓰이는 亥 역시 근원에서 막 피어오르는 것처럼 달이 막 떠오르는 초승달을 가리키면서 열두째 지지의 의미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亥는 달로는 음력 10월을 가리키는데, 한 무제가 기원전 104년에 역법을 바꾸기 전까지는 이 10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
孩(어린아이 해)는 子(아들 자)가 뜻을 나타내고 亥가 소리를 나타내며, 荄의 뜻을 따라 사람의 근원인 어린아이를 뜻한다.
核(씨 핵)은 木(나무 목)이 뜻을 나타내고 亥가 소리를 나타내며, 亥의 뜻을 따라 나무의 근원이 되는 열매나 그 열매의 씨앗을 뜻하고, 더 나아가 열매의 씨앗과 같은 핵심, 핵심을 캐내는 행위를 뜻한다.
骸(뼈 해)는 骨(뼈 골)이 뜻을 나타내고 亥가 소리를 나타내며, 亥의 뜻을 따라 사람의 근원이 되는 뼈를 뜻한다.
刻(새길 각)은 刀(칼 도)가 뜻을 나타내고 亥가 소리를 나타내며, 核의 뜻을 따라 씨앗을 파내듯 칼로 새기는 것을 뜻한다.
劾(꾸짖을 핵)은 力(힘 력)이 뜻을 나타내고 亥가 소리를 나타내며, 核의 뜻을 따라 씨앗을 파내듯 죄를 캐내어 꾸짖는 것을 뜻한다.
이상의 관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亥는 돼지나 식물의 뿌리를 본뜬 상형자다.
亥에서 侅(이상할 해)·刻(새길 각)·劾(꾸짖을 핵)·咳(기침 해)·垓(땅가장자리 해)·姟(백조 해)·孩(어린아이 해)·晐(갖출 해)·核(씨 핵)·欬(기침 해)·痎(학질 해)·䀭(눈큰모양 해)·絯(묶을 해)·荄(풀뿌리 해)·該(갖출/마땅 해)·賅(갖출 해)·陔(섬돌 해)·頦(아래턱 해)·駭(놀랄 해)·骸(뼈 해)가 파생되었다.
亥는 파생된 한자들에 뿌리나 근원과 관계된 뜻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