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8)
경시제와 제후왕들의 내전에서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그러나 그 승자를 기다리고 있는 건 적미의 위협이었다.
전한과 후한 사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잠깐 들어선 또 다른 한나라가 있었다. 그 한나라의 황제는 광무제의 팔촌 형인 경시제 유현이었다. 공신들에게서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져, 큰 전공을 세운 광무제와 그 형을 누르고 추대되었다.
그러나 경시정권의 어지러운 통치에서 유수, 적미의 유분자, 성의 공손술 세 황제가 더 탄생했고, 경시정권은 유수와 적미에게 패퇴를 거듭했다. 경시제는 장안을 버리자는 제후왕들의 의견을 거부하고 스스로 장안 방비 체계를 구축했으나, 반발하는 제후왕들과 경시제의 정치적 음모가 엇갈리며 갈등은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경시제를 협박하려 했다가 도리어 죽을 위기를 간신히 벗어난 장앙·요담·호은. 그들을 주축으로 한 반경시제 세력과 경시제 세력은 이제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송·성단·진목·왕광은 적미를 막으러 출진했다. 다른 제후왕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먼저 유씨 왕들부터 보자. 연왕 유경·원씨왕 유흡은 봉국으로 가지 않고 장안에 머물고 있었다. 정도왕 유지도 마찬가지였는데, 막 방망의 난을 진압하고 수도로 귀환한 직후였다.
한중왕 유가는 아직 한중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경시제 패망 후에도 26년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여음왕 유신은 봉국 여음(현 허난성 푸양시)을 떠나 장강을 건너 예장군에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훗날 계양태수 장륭에게 격파된다. 여음왕이 떠난 여남과 영천 일대에는 유씨 일족인 유무가 자리를 잡았다. 유무는 용릉병의 일파며 유연·유수 형제의 7촌 아저씨이지만 유수보다도 어렸다.
완왕 유사는 남양군 완현에 육부병을 거느리고 주둔하면서 관동을 진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적미가 완을 공격해 완현 현령을 죽이는 사태를 막지 못했다. 더욱이 육부병들도 유사를 떠나 흩어지면서 육양현으로 물러났다.
이제 유씨 혈연이 아닌 이성왕들을 보자. 의성왕 왕봉은 왕에 봉해진 뒤로 사료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며, 영음왕 송조도 마찬가지다. 영음현(현 허난성 쉬창시)은 광무제의 공략 기사도 없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어떤 정권 교체가 일어났는지 사료만으로 구체적으로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무음왕 이일, 늠구왕 전립은 좌대사마 주유·토난장군 소무와 함께 낙양에 주둔했다. 이일은 유수에게 투항하려다가 주유에게 적발되어 죽었다. 나머지도 낙양에서 후한 군에 포위되어 경시제와 연락이 끊겼다.
서평왕 이통과 등왕 왕상은 유씨 왕인 완왕 유사와 함께 형주 안정이라는 업무를 맡았다. 이들에게는 왕호·장군호·행직(行職)·지절(持節) 같은 권한이 필요에 따라 결합되었으며, 이런 권력 위임은 후한 말·위진남북조의 분열기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유사했다.
왕상은 행남양태수사로서 생살을 포함한 상벌 재량까지 위임을 받았고, 적어도 자기 열전에서는 “준법으로 남방에서 칭송을 받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형주·남양 전역이 군벌과 적미의 압박으로 파편화된 조건을 고려하면, 이 칭송은 전면적 안정의 성과라기보다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최소 질서를 세운 상대적 성취가 서사화된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 같은 남양군에서 군 통제에 실패한 완왕 유사와 나란히 놓이면 그 대비가 더욱 도드라진다.
이통은 지절을 지닌 채 “형주를 진무하라”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구체적 치적이나 행적의 흔적이 사서에 나타나지 않고, 다만 광무제가 황제가 되면서 부름[徵]을 받아 위위에 임명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언왕 윤준(윤존이라고도 함)은 언현(郾縣, 현 허난성 뤄허시 옌청구)[1]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경시제 패망 후에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통과 왕상은 《후한서》에 열전이 남아 있어 경시정권이 제후왕에게 어떤 방식으로 권한(왕호·장군호·행직·지절 등)을 결합해 부여했는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더 나아가, 왕도 아니고 녹림 출신도 아니지만 공을 세워 제후가 된 포영도 상서복야를 겸하고 행대장군사를 맡았으며, 지절을 부여받아 하동·병주·삭부 일대를 안집(安集)하는 직임을 수행했다. 이처럼 특정 지역의 군정·민정 권한을 결합해 맡기는 방식은, 경시정권의 권한 위임이 제후왕이나 녹림 핵심 인물에 한정된 특례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정리해보면, 유가·유신·윤준은 장안과 떨어져서 자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유사·이통·왕상은 남양군 일대에서 형주 통치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일·전립은 낙양에서 광무제에게 포위되었고, 유경·유흡·유지는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장앙·요담·호은은 경시제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성단·진목·왕광은 적미를 막으러 출진했다. 왕봉·송조는 사료에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공손술은 촉에서 성나라 황제를 일컬었고, 유수는 하북에서 또 다른 한나라 황제에 올랐다. 양나라 왕 유영 역시 경시제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자립을 모색해, 제나라 지역의 장보, 동해군의 동헌, 산양군 경내의 교강 등과 연합해 중원과 산동 일대를 경시제에게서 이탈하게 했다. 천수로 돌아간 외오는 농우를 자기 세력으로 재확인했다. 형주에서도 진풍·전융 등 토착 세력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특히 형주와 장안을 잇는 무관이 적미에게 장악돼 장안에서 형주로 가는 길이 끊겼다. 회남에서는 이헌이 여전히 왕을 일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시제의 제후왕들도 외부 세력을 제어하기는커녕 자기 거점이나 겨우 수비하면 선방하는 수준이었고, 장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참여할 여력은 없었다.
장앙·요담·호은은 병사들로 장안의 시장을 약탈하게 하고, 저물 무렵 문을 불태우고 궁중으로 난입해 경시제와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는 경시제가 대패해,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처자와 수레와 기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 장인인 우대사마 조맹이 있는 신풍에 이르렀다.
신풍에는 조맹 외에도 왕광·진목·성단이 각자 군영을 차리고 주둔하고 있었다. 경시제는 이 세 제후왕들도 모두 장앙과 공모했으리라고 의심해, 이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그런데 왕광은 아직 안 오고 진목과 성단만 왔을 때 경시제는 이 둘만을 베었다. 두려움에 빠진 왕광은 소환령에 불응하고 신풍을 떠나 장안으로 가서 장앙과 합류했다. 경시제의 두려움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것이다. 경시제가 고향에서 곤란한 일을 겪어 평림으로 도망왔을 때 받아주어 자기 부하로 삼았던 평림병의 대장 진목은 이렇게 경시제의 칼에 인생을 마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경시제의 명령을 받아 방망의 난을 진압했던 승상 이송은 경시제 편에 서 추에서 신풍으로 왔다. 이렇게 장앙·요담·호은·왕광은 장안성을 장악했고, 경시제·조맹·이송은 신풍에서 세력을 추슬렀다.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군 경험이 있는 유지와, 집금오로서 수도 방위군을 거느리고 외오를 공격했던 등엽 역시 경시제 편에 서서 싸웠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경시제가 장안성에서 패배했을 때 주력이 된 군대도 등엽이 지휘한 수도 방위군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송은 이일과 함께 이통의 종형제로, 셋 중 유일하게 제후왕에 봉해지지 않았다. 외지에 나가 있던 이통·이일과 달리 이송만은 경시제를 직접 보좌하는 친위 세력이 된 것이 눈에 띈다. 경시제는 왕광·진목·성단도 불문곡직 죽여버리려 할 정도로 제후왕 전체를 불신하고 있었기에 제후왕을 제외한 관료들을 주축으로 자기 세력을 만든 것이다. 그 중에는 제후왕이 아니었으나 그들처럼 녹림 출신인 중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후왕과 제후왕 아닌 신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후한서·유현열전》을 보면 반경시제 제후왕 세력은 장앙의 목소리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경시제에게 남양으로 도주하자고 제안한 것도, 거부당하자 경시제를 협박한 무리들 중 필두로 기록된 이도, 그리고 경시제와 대치하는 장안성의 제후왕들 중 필두로 기록된 이도 장앙이다. 처음 경시제를 옹립할 때 왕상 등 유연을 지지한 사람들의 논의를 차단한 이도 장앙이었다. 녹림 제후왕 세력의 행동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유연에 맞서 경시제를 추대한 그가 이제는 경시제와 맞서 싸우는 제일선 대장이 된 것이다.
경시제는 조맹·이송과 함께 군대를 수습하고 장안성으로 쳐들어가 장앙 등과 맞서 싸웠다. 싸움은 쉽게 결정되지 않았고, 장안성 내의 시가전은 무려 한 달을 넘게 끌었다. 정현까지 온 적미도 장안에서 더 가까운 고릉까지 천천히 나아가며 이 싸움을 관망만 할 뿐이었다.
기나긴 내전의 승자는 경시제 측이었다. 왕광 등은 패주했고, 경시제는 장안성의 주인이 되어 장신궁을 거처로 삼았다. 장안에 있던 모든 반경시제 제후왕들이 죽거나 쫓겨났고, 경시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취급하는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경시제는 드디어 황제로 자립하게 되었다.
코앞에 적미가 있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를 빼면 말이다.
경시제의 숙청과 이어진 내전에서 목숨을 건져 달아난 왕광과 장앙 등은 바로 고릉(현 시안시 가오링현)에 있는 적미에게 투항하고 길라잡이가 되어 적미를 장안성으로 끌어들였다. 한 달 넘게 장안성에서 내전을 벌인 대가로 경시정권은 적미를 막을 병력과 권위를 모두 소진해버린 상태였고, 왕광과 장앙 등의 배신은 치명적이었다.
경시제는 자신은 성을 지키고 이송에게 출전해 적미를 막도록 했으나, 전사자만 2천 명에 달하는 패배를 겪었고 이송마저 적미에 사로잡혔다. 이때 이송의 동생 이범이 성문교위로 있었는데, 적미는 형의 목숨으로 이범을 협박해 강제로 성문을 열게 했다.
그렇게 음력 9월, 적미가 장안성에 들어왔고, 경시제는 단기로 성문을 나와 도망쳤다. 장앙과 왕광을 몰아내고 꼭두각시 황제를 벗어났다는 정치적 성과는 장안 함락으로 소멸했다. 경시제가 몸을 숨길 곳을 찾는 사이, 낙양에 고립되었던 전립은 이미 8월에 유수에게 항복했고, 끝까지 버티던 주유도 음력 9월 26일 신묘일(율리우스력 11월 5일) 소무와 함께 유수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경시정권은 붕괴되고 그 중핵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다만 이것이 경시제 개인에게 충성하던 관료들이 곧바로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포영과 상당태수 전읍(田邑)은 경시제의 생사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경시제의 이름을 붙들고 뒤늦은 저항과 혼란을 연출하다가 마침내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전읍과 포영 사이의 편지 논쟁, 그리고 이미 사망한 경시제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저항을 정당화하려 한 포영의 행위는, 정보 단절과 정통성 공백 속에서 벌어진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그들이 끝까지 경시제에게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경시제의 최후를 보기 위해, 《후한서·유현열전》에서 경시제가 장안성에서 도주하는 장면부터 따라가 보자.
경시제가 주성문(廚城門)으로 빠져나가자, 부녀자들이 뒤따르며 외쳤다.
“폐하, 마땅히 말에서 내려 성에 하직 예를 올리십시오!”
경시제는 말에서 내려 절하고는 다시 말을 타고 떠나갔다.
당초, 시중 유공은 적미가 자기 동생 유분자를 황제로 세우자 죄를 자처해 조옥에 갇혀 있었다. 경시제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풀려나와, 도보로 따라 고릉에 이르러 전사에 머물렀다. 우보도위 엄본은 경시제가 적미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해, 병사들을 거느리고 바깥으로 나와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경시제를 가두어 두고 있었다.
적미는 조서를 내렸다.
“성공(경시제의 자)이 항복한다면 장사왕(長沙王)에 봉하겠다. 스무 날이 지나면, 받아주지 않겠다.”
경시제는 유공을 보내 항복을 청했고, 적미는 장수 사록을 보내 가서 받아들이게 했다. 음력 10월, 경시제는 마침내 사록을 따라 육단, 곧 중국 고대의 항복 예절에 따라 상반신의 옷을 벗고 장락궁으로 적미가 세운 황제 유분자를 찾아뵈어 옥새와 인끈을 바쳤다.
적미는 경시제를 앉히고 뜰 한가운데에 두어 장차 죽이려 했다. 유공과 사록이 나서서 만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경시제를 끌어냈다. 유공이 쫓아가며 외쳤다.
“신은 진실로 힘을 다했으니, 청컨대 먼저 죽게 하소서.”
그러고는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다. 적미의 우두머리 번숭 등이 함께 유공을 구해 멈추게 하고, 이에 경시제를 사면해 외위후(畏威侯)에 봉했다. 유공이 다시 한사코 청하니, 결국 장사왕에 봉했다. 경시제는 늘 사록에게 의지하여 지냈고, 또 유공이 그를 끼고 보호했다.
삼보 지역은 적미의 포학함에 괴로워해 경시제를 연민했다. 적미에게 투항한 장앙 등은 이를 근심해, 사록에게 말했다.
“지금 여러 군영의 우두머리들 중 성공을 빼앗으려는 자가 많소. 하루아침에 그를 잃게 되면 병력을 모아 공을 공격할 테니, 이는 곧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오.”
사록은 수하 병사들과 함께 경시제가 교외에서 말을 치게 하다가, 명령을 내려 목을 매어 죽였다. 유공은 밤중에 와서 그 시체를 거두었다.
광무제는 이를 듣고 슬퍼해, 대사도 등우에게 명령해 패릉(한문제의 능과 이름이 같음)에 장사를 지내게 했다.
이상이 경시제의 죽음까지를 다루는 유현열전의 서술이다. 경시제가 도망을 다니다가 도로 적미에게 투항하고, 왕에 봉해지고, 죽는 동안 경시제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동정을 받았다. 비록 그 동정 중 일부는 적미가 경시제보다 더 정치를 못 했기 때문에 경시제가 상대적으로 나아 보인 것이 이유이지만, 유공 등 끝까지 경시제를 보호하려 했던 인물들이 있어서 경시제는 비참하게 죽은 이후에도 그나마 추모를 받을 수 있었다.
외위후, 곧 위엄을 두려워하는 제후라는 치욕적인 이름의 작위를 경시제에게 내려주려 한 적미와 대비해, 광무제는 경시제가 장안에서 쫓겨나 떠돌고 있던 때인 음력 9월 6일(율리우스력 10월 16일)에 조를 내려 회양왕(淮陽王)에 봉해, 형(유연)의 원수이긴 하지만 한때 황제로 모셨던 그를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제도적으로 정리했다. 동시에 이 조서는 적미가 세운 유분자를 가짜 황제로 규정하고, 광무제 본인이 정통 황제임을 공적으로 명문화한 것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경시제가 죽은 이유가 경시제가 유자영을 죽인 이유와 겹친다. 사대부 중 경시제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유자영을 세웠기 때문에 경시제는 유자영을 죽였다. 적미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경시제를 연민했기 때문에 적미는 경시제를 죽였다. 경시제가 유자영을 죽인 것은 필연적인 권력의 논리였지만, 그 결과는 경시제에게도 그대로 다가왔다.
경시제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치다가 적미에게 생포된 이송은 동생 이범이 형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성문을 열어준 것도 무색하게 《후한서·이통열전》에서는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좌승상 조경(曹竟)도 적미에게 항복하지 않고 칼을 들고 맞서다 죽었다. 연왕 유경도 난병 중에 살해되었다. 조맹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사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외오를 공격했던 등엽은 우광과 함께 광무제에게 귀순해 후한의 장수가 되었다. 유지는 경시제가 항복했을 때 몰래 몸을 빼내 낙양으로 달아나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등엽과 유지는 유공(劉恭)과 더불어 경시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귀순 이후에도 후한 조정의 서사 속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경시제의 다른 종실 제후왕들인 유순·유흡·유종, 그리고 외오가 경시제에게 정권을 맡기고자 했던 유량 등도 각자 낙양으로 달아나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는 자신의 일족이기도 한 이 유씨 종실들을 왕후로 봉했다.
완을 잃고 육양에 머물고 있던 완왕 유사는 광무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무관으로 가서 경시제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경시제의 처자를 보호해 낙양으로 갔고, 26년에 신후(愼侯)에 봉해졌다. 경시제의 세 아들들, 유구(劉求)·유흠(劉歆)·유리(劉鯉)도 각각 양읍후(襄邑侯)·곡숙후(穀孰侯)·수광후(壽光侯)에 봉해졌고, 유구가 아버지의 제사를 맡았으며, 훗날 성양후(城陽侯)로 옮겼다.
그런데 이 경시제의 아들들 중 유리가 훗날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 유리는 광무제의 아들 패헌왕 유보(劉輔)의 총애를 받았는데, 부친의 죽음을 적미 정권과 그 황제인 유분자 일가의 책임으로 돌리며 원한을 품었다. 당시 광무제의 제후왕들이 다투어 빈객을 널리 불러들이던 분위기에서, 유리는 유보를 매개로 빈객을 규합해 유분자의 형 유공을 죽였다.
유공이 자살 기도까지 해가면서 경시제를 살려 달라고 매달렸고, 적미 패망 후 사록을 죽여 경시제를 죽인 복수를 하고 광무제에게 사면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원수의 형이라고는 해도 아버지의 은인을 죽인 셈이다. 그렇지만 복수의 논리는 대개 이렇게 사실관계를 편의적으로 재배열한다.
광무제는 유보를 사흘 간 조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고, 여러 왕들의 빈객들 수천 명을 이에 연좌해 주살했으며 건무 28년(52년) 유보를 장안을 떠나 패국으로 부임하게 했다. 이 사건은 경시제 대 유분자의 대를 이은 가문의 원한에 국한되지 않고, 후한에서 제후왕의 빈객 운용을 국가가 강하게 제약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유리 본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공과 유리의 복수극 사이에서, 경시제를 죽인 교사자 장앙의 이름은 조용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록에게 경시제 살해를 사주한 후의 행적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록을 죽인 유공이나, 다시 유공을 죽인 유리의 칼날이 장앙에게까지 향했는지도 더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경시제의 복수는 그렇게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젊었을 때엔 빈객을 모아 일족의 복수를 하려던 기개도 있던 경시제. 황제에 즉위할 때에는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만 긁고 있었다. 천하가 경시제에게서 다 떨어져 나가고, 경시제에게 실망한 사람들이 새로운 황제를 모셨을 때부터 뒤늦게나마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고, 자기를 꼭두각시로 부리면서 한편으로는 정권의 방패가 되기도 한 녹림의 제후왕들과 제살 깎아먹기 내전을 벌인 끝에 잠깐의 제왕 노릇을 하다 적미에게 쫓겨나 죽음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유연을 죽였을 때부터 경시제의 선택지는 급격히 제한되었다. 물론 유연은 경시제의 강력한 경쟁자이긴 하다. 그러나 경시제가 녹림 제후왕들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깥의 도움이 필요했다. 유연이 경시제와 경쟁한다는 의미는 실제로는 녹림 제후왕들과 대립한다는 것이었으므로, 경시제가 거꾸로 유연에게 손을 내미는 길도 열려 있었다고 본다. 그런 유연을 죽인 후에는 녹림 제후왕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졌다. 경시제가 잠깐이나마 실권을 되찾을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도 이 제후왕들이 정치를 어지럽히면서 스스로 자기 세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정치에 능수능란했다면 경시제는 그대로 녹림 제후왕들의 손에 질식했을 것이다.
유연에게는 한나라를 다시 세우자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유연을 죽인 경시제와 녹림 제후왕들은 그 꿈을 이어받지 못했다. 권력은 누렸지만, 목적을 상실한 정권을 세웠다. 녹림 제후왕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미래가 없다는 경시제의 뒤늦은 깨달음은, 도리어 적미를 막아낼 권위와 병력을 정권 내부의 숙청과 재편에 소진하게 했다. 그 결과는 경시정권, 그리고 그 자신의 최후를 더 앞당겼을 뿐이었다.
경시제는 제후왕들을 무찌르고 장안성을 회복했으나, 곧 음력 9월 적미의 침입을 받아 잠깐 도주한 후 음력 10월에 항복했다.
적미는 경시제를 외위후를 거쳐 약속대로 장사왕에 봉했으나, 두 달 만인 음력 12월에 목매어 죽였다.
경시제의 아들들은 광무제에게 항복해 열후가 되었으나, 훗날 셋째아들 유리가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적미 황제 유분자의 형이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던 유공을 죽였다.
25년, 장앙·요담·호은 등이 경시제를 공격. 경시제, 신풍으로 도주.
25년, 경시제, 신풍의 진목·성단을 살해. 왕광, 장앙 일당에 합류.
25년, 경시제·조맹·이송, 장안성의 장앙 등을 공격. 한 달여 끝에 경시제 승리. 장신궁에 입궁.
25년, 장앙·왕광, 고릉의 적미에 항복.
25년 음력 9월, 적미가 장안에 입성. 경시제, 장안에서 탈주.
25년 10월 16일(음력 9월 6일), 광무제가 경시제를 회양왕에 책봉.
25년 11월 5일(음력 9월 26일), 낙양의 주유·소무, 광무제에 항복.
25년 음력 10월, 경시제가 적미 황제 유분자에게 항복.
25년, 적미가 경시제를 외위후에 봉함. 다시 장사왕에 봉함.
25년 음력 10월, 광무제가 낙양에 입성해 정도함.
25년-26년, 경시제·광무제의 종실들이 광무제에게 귀순함.
25년 음력 11월, 양왕 유영이 황제를 일컬음.
25년 음력 12월, 적미의 사록이 경시제를 목매어 죽임. 광무제, 경시제를 패릉에 장사지냄.
26년, 경시제·광무제의 종실들이 왕과 열후에 봉해짐. 경시제의 아들들도 이 무렵에 열후에 봉해진 것으로 추정.
(연도 불명), 유공이 사록을 죽여 복수하고 광무제에게 사면을 받음.
52년, 경시제의 셋째아들 유리가 패헌왕 유보의 빈객들을 모아 유분자에게 복수하고자 형 유공을 살해. 광무제는 제후왕들의 빈객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유보를 봉국으로 부임.
그림 1: 中央研究院,《中華文明之時空基礎架構系統》第一版,(台北,2002年9月)。경시·적미·유수 동향은 글쓴이 편집/추가.
그림 2: 中央研究院,《中華文明之時空基礎架構系統》第一版,(台北,2002年9月)。경시·적미 동향은 글쓴이 편집/추가.
그림 3·4: Google Gemini 생성.
[1] 한자로는 郾城區로, 당대 지명인 郾縣을 유지한 채 성(城)이 덧붙고 행정구역 단위만 바뀐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