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욱·잠혼의 계보 만들기와 강동 사족의 탄생
삼국지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는 전 황제 손휴의 조카였기에 본디 황제가 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264년, 손휴가 죽었을 당시 손휴의 태자 손완의 나이가 어렸고 또 동맹국 촉한이 전년 263년에 멸망했기에 대외 정세가 급박해 황제가 될 수 있었죠. 이때 손휴의 중신인 복양흥과 장포에게 손호를 황제로 추천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만욱(萬彧). 오정현령 시절 오정후로 있던 손호와 교류가 있었기도 합니다.
만욱은 손호에게 복양흥과 장포가 손호를 황제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참언해 제거하고(《삼국지·오지·제갈등이손복양전》 중 복양흥전), 육개와 함께 좌우승상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육개와 사이가 나빴는지, 진수가 그 전승의 사실성에 의심을 제기하면서도 육개전에 수록한 손호와 육개의 문답에서는 육개가 만욱을 매우 낮게 평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욱은 자질이 자질구레하고 범용하며, 집안의 종이었다가…(후략)” (《삼국지·오지·반준육개전》 중 육개전)
만욱은 삼국지 오지나 그 주석에 별도의 전기도 없고 자도 따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이 육개의 말을 따라 만욱이 종 출신이었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한 족보에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만욱을 시조로 삼는 집안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비릉 만씨(毘陵萬氏)의 족보인 《강소비릉만씨종보》(江蘇毘陵萬氏宗譜)에서는 자기 가문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비릉은 한자를 毗陵으로도 쓰며, 현 창저우시에 해당합니다).
제1세
욱(彧)
동한 율양후(溧陽侯) 수(修) 공의 5세손, 자는 문빈(文彬), 호는 좌산(佐山)이시다. 율양현 금연 단석교에 사셨다. 삼국 오나라를 섬겨 처음 오정을 다스리셔 오정후 손호와 알고 지내셨고, 손호가 즉위하자 공은 전군으로 정사를 맡아 우승상이 되셨다. 손호가 화리에 놀러 나가 병사들이 수고하고 원망하자, 공께서는 누차 간언하셨으나 황상께서는 듣지 않으셨다. 공께서는 나라를 잃을까 염려하셔 이에 장군 유평과 함께 은밀히 이윤과 곽광을 본받아 어진 임금을 세우고자 하셨으나, 누설되어 살해되셨고 율양 동쪽 안산에 장사되셨다. 진 태강 3년(282년) 상서복야 산도가 묘비명을 쓰다. 아내는 부인에 봉해지셨으며, 아드님 두 분이 계셨으니 사흥(士興)과 사창(士昌)이시다.
즉 비릉 만씨의 시조는 만욱이며, 그 만욱은 만수(萬修)의 5세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만수(萬修, 萬脩)는 후한의 광무제를 도와 한나라를 재건한 운대 28장(雲臺二十八將) 중 한 명입니다. 엄밀히 말해 후한은 전한의 복벽을 내세웠기에 만수는 '개국공신'이라기보다 한 왕조를 다시 세운 '복벽공신(또는 중흥공신)'이라 부르는 것이 그 정치적 명분에 더 부합할 것입니다. 만씨 족보는 자신들의 뿌리를 바로 이 영광스러운 왕조 복원의 주역에게 두고 있는 셈이지요. 또한 아내가 부인에 봉해졌다는 기록은, 만씨 집안이 만욱의 불명예스러운 죽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신분 회복을 시도했으며, 이를 대외적으로 천명하고자 했던 가문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만수는 경시정권 당시 하북에 있는 신도현(信都縣, 지금의 헝수이시 지저우구 소재)의 현령으로, 하북을 제패한 왕랑(王郞) 정권 대신 광무제를 섬기면서 왕랑 격파에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서기 26년 남양군 공격 중 일찍 병사했지만, 생전에 이미 열후에 봉해졌었고 복벽 공신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가문의 전승을 염두에 둔다면, 육개가 만욱을 '집안 종'이라 멸시한 것은 실제 신분이 노비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정적에 대한 정치적 비하나 영락했던 처지를 들춰낸 공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원문에 등장하는 '가례(家隷)'는 단순한 노비를 넘어 식객 등 유력 가문에 의탁하던 군식구까지 포괄하는 표현인데,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몰락한 이들이 대성 가문에 예속되어 가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욱이나 그 자손들이 자기 집안을 좋은 집안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후한의 개국공신 만수를 자기 조상으로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 나오는 만욱은 손호의 학정을 뒤엎으려다가 숙청된 충신으로 나타나는데,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이에 인용된 《강표전》에서는 이 일을 다르게 묘사합니다.
여기서는 만욱·유평·정봉(丁奉) 등이 단지 손호가 화리에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자신들끼리 정무를 보기로 했고, 이 일이 발각되어 손호가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이미 죽은 정봉을 제외한 유평과 만욱에게 독주가 하사되었고, 유평과 만욱은 둘 다 독살을 면했으나 만욱은 근심하다가 자결했고 유평도 1달 만에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즉 단순히 놀기 좋아하는 황제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이 구국의 결단처럼 미화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 족보는 집안의 조상인 만욱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보다 집안의 명예를 기리려는 목적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사실성에 의구심을 지니고 읽어야 합니다. 그럴 때 과연 당시 서진에서 이름 높은 죽림칠현의 일원 산도(山濤)와 오나라에서 승상을 지낸 만씨 집안이 어떻게 인맥이 있어서 만씨 집안의 묘비명을 산도가 써 주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282년이면 오나라가 진나라에 망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이므로 구 오나라의 관료와 원 진나라 사대부 사이에 교감이 생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로 추측컨대, 만씨 집안에서 자신들의 묘지명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산도의 이름을 빌렸을 수 있습니다.
의심의 눈으로 본다면 만수가 율양후(溧陽侯, 율양현은 현 창저우시 리양시 소재)라고 한 것도 걸립니다. 만수는 율양후였던 적이 없거든요. 조의후(造義侯)와 괴리후(槐里侯, 괴리현은 현 싱핑시 남동 소재)에 봉해졌을 뿐입니다. 만수가 우부풍 무릉현(현 싱핑시 북동) 사람이니 고향 근처에 봉해진 셈이고 이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율양은 단순 오기일 수도 있지만, 만욱이 율양 사람이라 했으므로 이 고을과 만수의 연관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율양후라는 작위를 만수에게 부여했을 것으로 의심이 됩니다.
비릉 만씨의 본적 비릉은 후한 ~ 삼국 시대 기준으로 오군(吳郡) 비릉현이고, 만욱의 고향 율양은 단양군(丹陽郡) 율양현이지만, 현재는 둘 다 창저우시에서 관할하니 서로 이웃한 고을입니다.
삼국 시대 오나라에는 이와 비슷한 집안이 또 있습니다. 바로 손호 대의 간신으로 유명한 잠혼(岑昏)의 가문 잠씨입니다. 《신당서·재상세계표》에서는 당나라 때 재상을 배출한 잠씨 집안의 족보를 정리하면서 그 시조를 후한의 또 다른 복벽 공신이며 운대 28장인 남양군 극양현(현 신예현 북동) 출신의 잠팽(岑彭)에게 두었습니다.
잠팽은 신나라에서 극양현령을 지냈다가 후한 재건 운동을 일으킨 유연(광무제의 형)에게 투항했고, 유연이 암살된 후 경시제 휘하의 지방 관료를 지내다 광무제에게 귀순했습니다. 귀순 후 주로 형주 방면의 전선에서 활약했고, 형주로 쳐들어온 성나라 군대를 격파한 후 성나라의 중심지를 휩쓸다가 35년 성나라 황제 공손술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됐습니다.
이 표에 따르면, 잠팽의 현손이 남양태수 잠예(岑豫)고, 잠예의 아들은 후한 말 당고의 화에 연루된 청류파 선비인 잠질(岑晊)입니다. 잠질은 오군으로 이주했고, 그 손자 잠가(岑軻)는 오나라에서 여러 군의 태수를 지냈으며, 그 둘째 아들이 바로 잠혼입니다.
만욱과 잠혼의 사례는 후한 말-위진남북조 시대 중원의 혼란에 중원을 떠나 강동-강남에 정착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문을 중원의 명문 사족에 연결시켜, 강남 정착 이후 정통성·위신을 문헌화함으로써 현지 사족들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하려 한 시도로 보입니다.
주목할 것은 비릉 만씨 족보에서 만수를 만욱의 조상이라 하면서도 가문 자체의 족보는 만욱을 1세로 하여 적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비릉 만씨의 세계를 거슬러올라가면 만욱까지는 검증이 되지만 그 윗대는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비릉 만씨 집안이 비릉에 정착해 후손들을 낳으며 집안을 이어나간 시작은 실제로 만욱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명문 가문 중 하나인 범양 노씨(范陽盧氏)도 비슷한 족보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문의 먼 조상은 춘추오패의 일원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고위 관료 고혜(高傒)라 하지만, 족보를 거슬러올라가면 가계가 닿는 뿌리는 후한 말의 명사며 유비의 스승으로 유명한 노식(盧植)입니다. 가문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먼 선조와 실제로 가계를 이을 수 있는 시조가 따로 있는 구조로, 만수와 만욱을 각각 먼 뿌리와 시조로 내세우는 비릉 만씨와 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범양 노씨의 시조 노식은 행적이든 관위든 어느 면으로도 흠을 잡기 어려운 시조로 이상적인 인물인 데 반해, 비릉 만씨의 시조 만욱은 비록 우승상을 지냈으되 그 과정에서 전임자들을 참언했고 폭군의 총신이 되었으며, 그 임금의 눈밖에 나 자살했다는 가문의 시조로는 명예롭지 못한 행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릉 만씨의 족보에 수록된 산도의 묘지명은 이런 아픈 과거를 덮고 조상을 가문의 시조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만수와 만욱 사이의 혈연적 연결 고리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지만, 비릉 만씨 가문이 자신들의 뿌리를 '한나라 공신(만수)'으로 소급하려 할 때, 현지 정착의 시조인 만욱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였습니다. 결국 이 족보는 굴곡진 삶을 살았던 조상 만욱을 '충신'으로 재포장함으로써 가문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후손들의 처절한 생존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https://www.lulugu.com/wan/2620.html
https://wl.yesx.org/column/wu-wanyu.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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