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책》

인류 최고의 발명품, 그 물리적 실체에 대한 기록

by 이원규


32506045395.20241018071054.jpg 《책의 책》, 키스 휴스턴, 2019, 김영사


지식의 전달 수단으로 여겨지는 책의 기능과 내용에서 눈길을 돌려, 책 그 자체를 인류의 발명품으로서 이야기하는 책, 《책의 책》입니다.


“이 책은 묵직하고 복잡하고 매혹적인 공예품, 인류가 1,500년 넘게 쓰고 인쇄하고 제본한 책의 역사, 책 제작, 책다움에 관한 책이다. 당신이 보면 아는, 바로 그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책의 책》, 17쪽, 굵은 글씨는 원문 그대로)


머릿말의 이 마지막 문장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책을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분해 가능한 부속품의 결합체이자 기술의 산물로 바라보며 그 역사를 추적합니다. 파피루스·양피지·종이라는 기록 매체, 필기와 활자 인쇄라는 재현 기술, 삽화와 사진 인쇄라는 시각적 확장의 역사를 각각 독립적인 역사로 세밀하게 파헤칩니다. 마지막 부에서는 이 기술들이 통합되어 우리가 아는 책의 형태(코덱스, 장정, 판형)가 되어 온 여정을 이야기하며 서술을 마무리합니다.


이 책은 독자들이 책을 어떻게 읽어 왔는지, 책이 어떻게 인류의 지성을 바꾸었는지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내용을 담은 그릇 그 자체, 곧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실물로서 책의 매력을 이야기합니다. 책꽂이 한 켠에서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은 책들에, 한 권 한 권마다 오랜 세월 발전한 기술과 공력이 담긴 물건이라는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책을 이루는 각 요소들의 역사를 추적할 때 문헌 자료에만 의지하지 않고 고고학 자료와 기술적인 점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례로, 중국에서 처음 나온 종이로 전해지는 채후지를 서술할 때는 채후지 전의 종이 유물을 제시함으로써 채륜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지술을 체계화하고 표준화한 인물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종이를 뜨는 기술과 종이에 나타나는 무늬의 관계를 근거로 채후지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을지에 대한 기록의 공백을 메웁니다.


기술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분께는 어려울 수 있지만. 책을 공예품이자 공산품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면서 기술이 책에 미친 영향을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이 관점은 인쇄술을 다루는 대목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책에 따르면,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의 아버지가 아닐뿐더러 활자 인쇄술의 발명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 혁명을 이뤄낸 점에는 가동 활자를 처음으로 착안한 중국과 달리 로마자 알파벳 수가 적고 금속활자에 적합한 유성 잉크를 이미 사용하고 있던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뿐만 아니라, 산업 혁명기에 축적된 다양하 인쇄 공정과 관련된 발명가들의 흥망성쇠에서는 기술 발전이 추상적인 기술 문서가 아니라 시장과 상업 속에서 이룩한 현실의 산물임을 알게 합니다. 석판 인쇄술이 목판에서 시작하는 전통 인쇄술의 발달 경로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는 점도 흥밋거리입니다. 현대 인쇄술의 주류가 된 오프셋 인쇄의 발견에서는 인쇄 기술의 계보에 예상치 못한 우연과 시행착오 역시 큰 몫을 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술 이야기를 강조하면서도 역사의 뒷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점도 이야기의 매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기독교와 이슬람에 얽힌 종이 이야기입니다. 처음 종이가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 세계로 전파된 곳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과 투쟁을 반복하는 이베리아 반도였습니다. 이곳에서 기독교도들의 제지 공장이 처음 세워졌을 무렵에는, 시칠리아에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종이에 쓴 것은 공문서로 효력이 없다고 하고, 이베리아의 카스티야 왕국에서도 종이는 가치가 낮은 공문서에만 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도들은 이 무슬림들이 소개한 새로운 문물을 미심쩍어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도 종이를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종이는 기독교에서 이슬람 세계로 역수출되기도 했습니다. 책에 따르면, 십자가 워터마크가 들어간 종이에 쿠란을 인쇄하는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기독교도가 생산한 종이를 사용해도 좋은지에 율법적인 견해(파트와)를 표명해야 했다고 합니다.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책의 책”이라는 제목답게 책의 각 구성 요소들의 이름을 소개하는 방식입니다. 표지부터 제목, 책머리, 부제, 책발 등 인쇄 과정에서 쓰이는 부속들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책의 마지막에는 콜로폰을 통해 재질이나 판형 등 책 자체의 정보들을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책을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에 가능한,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책 자체의 어휘’를 제공하는 부분입니다.



《책의 책》은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사랑하는 애서가들, 그리고 공산품으로서의 책과 그 이면에 숨겨진 기술의 역사를 탐구하고자 하는 분께 권할 만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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