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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규 Oct 18. 2024

일할 로(勞)에서 파생된 한자들

건지다, 큰 물결, 중독 등

등불반짝거릴 형(熒)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으나 熒의 파생자에서 빠진 한자가 있으니 바로 일할 로(勞)이다.

글자 꼴은 熒에서 아래에 있는 불 화(火)를 힘 력(力)으로 바꾼 모습이다. 《설문해자》에서도 勞를 '힘쓰다라는 뜻이다. 力과 熒의 생략형을 따랐다. 불꽃으로 집을 태운다. 힘을 쓰는 것을 勞라 한다.'라고 풀이했다. 이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북송의 학자 정초는 《육서략》에서 熒 대신 경영할 영(營)의 뜻을 따라 경영하기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단옥재 역시 《설문해자주》에서 정초의 해설을 따랐다.

그러나 熒과 勞의 옛 모양이 발견되면서 위의 모든 풀이는 새롭게 다시 고쳐야 했다.

勞의 변천. 출처: 小學堂
勞의 옛 형태. 왼쪽부터 ⿱炏衣, ⿳炏衣廾, ⿱炏心, ⿱⿱炏冖⿱衣心. 출처: 小學堂

지난 글에서도 살펴본 대로, 熒의 금문은 지금과는 달리 火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엇갈린 횃불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勞의 갑골문과 금문은 명백하게 火 두 개가 나타나고 있다. 이로써 熒과 勞는 서로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勞의 갑골문은 火 두 개 아래에 옷 의(衣)와 점 3개가 보이는데, 이를 현대의 형태에 가깝게 예변(隷變)할 때에는 점은 빼고 ⿱炏衣로 나타낸다. 금문에서는 아래에 받치는 손을 추가해 ⿳炏衣廾처럼 쓰기도 하고, 더 시간이 지나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면 衣를 마음 심(心)으로 바꿔 ⿱炏心으로 쓰기도 한다. 이게 간백문자로 넘어가면 衣와 心을 둘 다 쓰는 ⿱⿱炏冖⿱衣心이라는 변형을 만들어낸다.

《설문해자》에 수록된 고문은 《강희자전》에서 ⿳炏冖悉로 예변했는데, 衣가 분별할 변(釆)으로 와전된 것 같다. 그리고 소전에서 드디어 지금의 勞의 형태가 나타나는데, 衣나 心이 힘 력(力)으로 바뀐 것이다.


勞의 초기 형태인 ⿱炏衣는 등불 아래에서 옷을 꿰매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이에서 '힘쓰다', '일하다'의 뜻이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손을 추가해서 동작을 강조하기도 하고, 마음을 추가해서 노심초사하는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현재의 형태인 勞는 힘을 들이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衣가 생략되었는데, 옷을 꿰매는 구체적인 작업이 생략되어 등불 아래에서 힘을 들이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황을 나타내게 되었다.


勞는 갑골문에서는 지명으로 쓰이기도 했고, 큰물결 로(澇)를 통가해서 홍수를 뜻하기도 했다. 금문에서는 지금처럼 일하다는 뜻으로 쓰였고, 또 '노심초사'라는 단어에서 나타나듯이 마음으로 애를 쓴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위에서 말한 心을 쓰는 전국시대의 금문 勞, 즉 ⿱炏心가 바로 마음으로 애쓴다는 문맥에서 쓰인 것으로, 노심초사라는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心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일할 로(勞, 노동(勞動), 근로(勤勞) 등. 어문회 준5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勞+手(손 수)=撈(건질 로): 노해작업(撈海作業), 어로(漁撈) 등. 어문회 1급  

勞+水(물 수)=澇(큰물결 로): 구로칠한(九澇七旱: 중국의 우임금이 겪은 아홉 번의 홍수와 탕왕이 겪은 일곱 번의 가뭄) 등. 인명용 한자  

勞+牛(소 우)=犖(얼룩소 락): 낙락(犖犖: 분명한 모양), 탁락(卓犖: 뛰어난 모양) 등. 인명용 한자  

勞+疒(병들어기댈 녁)=癆(중독 로): 노점(癆漸/勞漸: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수척해지는 증상), 척수로(脊髓癆: 척수매독) 등. 급수 외 한자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

이외에도 고전에서 드물게나마 찾아볼 수 있는 한자로는 지껄일 로(嘮), 대이름 로(簩), 발기름 료(膋), 쓰름매미 로/참매미 료(蟧)가 있다. 簩는 특별히 독이 있는 대나무를 가리키고, '발기름'이란 발에 있는 기름이 아니라 짐승의 내장지방을 말한다.


膋는 膫로 쓰기도 하고, 蟧는 '참매미 료'라는 훈음으로는 蟟와 같은 한자다. 형성자의 성부로는 勞와 횃불 료(尞)가 서로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癆는 지금은 결핵이나 몸을 상하게 했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흥미롭게도 《설문해자》에서는 약·독을 가리키는 조선의 말이라고 적고 있다. 즉 고대 한국어를 음차한 한자인 것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이 말이 우리말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독을 뜻하는 순우리말이 이렇게 중국인들의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수고롭게 일을 많이 하는 데에서 비롯해 '크다'나 '많다'를 뜻하기도 한다.

嘮(지껄일 로)는 口(입 구)가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수고롭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뜻한다.

澇(큰물결 로)는 水(물 수)가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물이 수고롭게 많이 움직이는 것인 큰 물결, 홍수를 뜻한다.

癆(중독 로)는 疒(병들어기댈 녁)이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수고롭게 일해 몸이 상한 것을 뜻한다.

이렇게 크다, 많다의 뜻과 관련이 되는 위의 한자들과는 달리, 蟧는 작은 매미나 작은 소라를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이 한자는 매미 제(蝭)와 같이 써서 제로(蝭蟧)라는 매미의 한 종류를 뜻하는데, 이 매미는 중국어에서 혜고(蟪蛄)라고 하는 털매미라고 한다. 쓰름매미나 털매미나 다 매미 중에서는 작은 종이다.


한편 본래 한국어에서 나온 癆는 또 다른 한자에 독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簩(대이름 로)는 竹(대 죽)이 뜻을 나타내고 勞가 소리를 나타내며, 癆의 뜻을 가져와 독이 있는 대나무의 한 종류를 뜻한다.


이상의 관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勞는 원래 등불 아래에서 옷을 수선하며 일한다는 뜻의 회의자였고, 현재는 힘 력(力)이 옷을 대신했다.  

勞에서 撈(건질 로)·澇(큰물결 로)·犖(얼룩소 락)·癆(중독 로)가 파생되었다.  

勞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크다'나 '많다', 또는 癆의 영향으로 '독'의 뜻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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