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를 망가트린 사람들에 대하여

비겁한 방관자

by 김윤담

브런치에 내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처음에는 서러움에 북받쳐 과거를 쏟아냈다. 그 속에는 엄마에 대한 미움이, 반대로 외면하고 싶은 모정에 대한 갈구가 서려있었다.


글에는 치유에 힘이 있다더니, 덮어두고 애써 모른척하며 살았을 때에 비해 지금은 훨씬 담담해졌다. 비단 글이 아니라 공감 어린 댓글과 위로의 말에 힘이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이전 글에서 엄마에 대한 미움마저도 희미해졌다고 고백했었다. 그것이 엄마에 대한 애정마저도 놓아버렸기 때문인 듯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이 조금이나마 정리되고 나니 내 기억 속 엄마 이외의 인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병든 자식의 마음조차
돌보지도 못할 만큼
괴로워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말이다.


어린 눈에도 기가 찰 만큼 옹색하고, 치졸했던 그 어른들에 대하여. 오늘은 적어보려 한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무려 7년간이나 구애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탤런트 못잖게 아름다운 외모에 도도하기까지 했던 엄마는 주변에 대시하는 모든 남자들에게 퇴짜를 놓다 보니 어느덧 스물일곱 살이나 되어 있었고, 당시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남은 남자는 아버지뿐이라 결혼하게 됐다고 했다.


시작부터 수월하지 않은 결혼이었다. 친할머니는 홀어머니 밑에서 없이 자랐다고 엄마를 사사건건 무시했다.


신혼 시절에는 부모에게 손을 벌려 사업을 하겠다는 남편을 말리기 위해 돈을 빌려주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가, 네년이 뭐길래 돈을 주라 마라냐면서 귀를 물어뜯어 스무바늘이나 꿰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친할아버지는 대개 말씀이 없으셨고, 집안에서 목청을 높이는 건 늘 친할머니 쪽이었다.


언젠가는 내 남동생을 혼냈다고 친할머니가 엄마의 멱살을 잡고 밀쳤던 적도 있었다. 그 집안의 세 며느리 중 유독 엄마를 부려먹고, 못살게 굴었던 탓에 나도 친할머니에 대한 감정은 늘 좋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친가에 대한 기억은 5살 때쯤이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나 혼자 친가에서 자게 되었는데 너무 낯설고, 두려워서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던 기억.


어린아이였음에도 철부지처럼 울지 못하고 베겟잇을 적시며 훌쩍였더니 친할머니가 그런 나를 보고 애가 따르지를 않는다며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짧게 남아있다.


훗날 엄마에게 들은 얘기로는 친할머니가 엄마는 미워해도, 손주는 예뻐하니까 나를 며칠 맡겨두고 돈을 빌려보려는 속셈이었다고 했다. 그날의 서글픈 장면은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얼룩 같은 흔적이 되었다.


능력과 끈기, 비상함도 없이 사업을 하려던 아버지, 엄마와는 늘 돈 때문에 싸우면서도 겉멋에 취해 형편도 되지 않는데 지역 로터리 모임에 가입해 철마다 호사스러운 모임에 나가곤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집은 공과금을 밀렸고, 인터넷 요금도 내지 못해 어린 동생은 매일 아버지에게 전화해 오늘은 요금을 냈느냐고 물었다. 매번 물어도 매번 냈다는 거짓말에 동생은 애꿎은 컴퓨터만 탕탕 내리쳤더랬다. 나도 동생도 매번 알면서도 속았다.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은 점점 더 잦아졌고, 격해졌다. 아버지의 입에는 늘 육두문자가 함께했고, 엄마는 우리 앞에서 칼을 들고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둘이 싸우다 엄마가 기절해버리면 나는 울면서 엄마 코에 얼굴을 갖다 대고,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동생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래곤볼 만화에 열중해 있었다.


그때 엄마가 너무나 불쌍했고, 우리 셋만 살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아버지게 외박하는 날은 내게 너무나 평온한 날이었으나, 그가 다시 돌아오면 또 격한 언성 소리를 피해 이불속에 숨어들어 잠을 청해야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라인에 반 친구가 살았는데, ‘걔가 오늘도 우리 집 싸우는 소리를 듣겠구나.. ‘하면서.


그 소리가 너무도 싫어 어떤 날은 세탁소 옷걸이를 침대 헤드에 걸고 목을 넣어 숨이 막히게 해 본 적도 있었다. 목젖이 켁 막힐 때까지 머리를 끌어내려보다가 너무 괴로워 포기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날도 많았다.


그러다 엄마 좀 그만 괴롭히라며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내 팔을 꽉 움켜쥐던 아버지는 내 살을 분홍빛이 보일 만큼 움푹 파 놓곤 '지 어미 닮아 독한 년'이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집을 나갔다. 살의가 느껴지던 그 눈빛. 아마 진짜로 나를 죽이게 될까봐 도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리고 며칠 뒤에는 작은아버지와 함께 집을 찾아왔다(이 사연은 2화 '엄마는 왜 내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까'에). 다 큰 조카 앞에서 엄마에게 쌍욕을 내뱉는 것도 모자라 밀쳐대며 폭력까지 행사했던 작은아버지. 그때 내 아버지란 사람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며 태연히 라면을 끓여 후후 불어가며 먹고 있을 뿐이었다.


별거 이후 엄마는 암 판정을 받았고, 친가 식구들 누구 하나 먼저 연락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는 본인의 시댁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늘 교사 집안이라고 강조했지만 도대체 교사 집안이 뭐가 어떻기에 힘주어 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 잘난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와 고모, 큰 어머니. 그들은 결국 다 방관자일 뿐이었는데.


조각하는 예술가랍시고 개인전까지 열었던 작은아버지는 내 엄마에게 천박한 욕을 쏟아냈고, 목사인 고모부는 행여 병든 엄마가 친가에 손을 벌릴까 싶어 우리의 동향만 염탐만 했더랬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엄마가 제정신을 붙잡고 살기에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그 시절이 내게 어떤 상처로 남을지 모르고 살아냈다.


암 수술 이후 엄마는 10년 동안 재발 없이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아픈 몸에 여자 혼자 벌어 두 아이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됐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힘듦이다.


그래서 크는 동안에는 엄마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내 존재가 늘 엄마 등에 얹힌 짐 같아서 까치발로라도 내 힘으로 두 발 딛고 서고 싶었다.


그렇게 애쓰다 우리 둘 다 주저앉아버린 것 아닐까.


누구나 볼 수 있는 플랫폼에 지극히 사적인 나와 엄마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가면서, 가정을 파탄 낸 아버지와 그 일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버리고 방관했기에, 고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함께 망가졌고, 결국은 돌이킬 수 없을만큼 멀어져 버렸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상처가 상처인 줄도 모르고 지나온 세월, 그 기억들이 어디론가 증발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기억에, 가슴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더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불쌍하면서도, 다가설 용기가 나지 않는 나의 아이러니는

어디쯤 가야 끝을 낼 수 있을까.


이만큼 적어 내리고도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