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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Feb 23. 2024

당신의 첫 번째 거짓말을 기억하나요

난 비교적 어린 나이의 기억이 남아있는 편이다. 만 3살 정도의 기억도 어떤 부분에선 생생하게 남아있다. 

갓난아기였던 남동생을 구경하다가 별안간 심술이 나서 양 볼을 잡고 흔들었던 일,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살던 주인집 딸 언니랑 모나미 볼펜으로 낙서하던 기억, 밤마다 싸우던 부모님을 말리기 위해 아빠의 실크잠옷바지를 잡아끌었던 미끄덩한 감촉, 거실 겸 안방이었던 공간에서 이불을 덮은 채 '포청천'이나 '젊은이의 양지' 등의 드라마를 보던 기억, 어느 날 갑자기 한글이 터져서 동화책을 술술 읽게 되었던 순간,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싱크대에 올라가려다 뒤꿈치가 까져 엉엉 울었던 것, 주택이었던 할머니 집을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던 마룻바닥 소리, 눅눅한 냄새 등등 어떤 장면들은 아직도 촉감과 향까지 또렷하다. 


내가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 

첫 번째 기억도 꽤나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는 상당한 욕쟁이였는데, 그건 그의 집안 내력이었다. 엄마의 시어머니였던 할머니는 심사가 뒤틀리면 손주 앞에서도 거침없이 며느리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빠 역시 엄마와 싸울 때면 상스러운 억양의 찰진 욕과 존재를 비하하는 내용을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건 어린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니.. 아마도 만 5살쯤 됐을까. 유치원생이던 시절의 기억이다.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엄마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거나 혼나거나,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때 나는 문지방에 서서 마음속으로 욕을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못 듣게, 입가에서 아주 작은 소리로 그간 들었던 가장 나쁜 말들을 골라 읊조리곤 했다. 


그건 어린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자, 일탈, 혹은 장난이었는데 문지방을 드나들 때마다 남몰래 욕을 내뱉으면 스릴이 느껴지면서 꽤 큰 쾌감을 느끼곤 했던 것 같다. 

문지방을 지날 때마다 욕을 속삭이는 꼬마라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 기억으로 인해 깨달은 바는 있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마음이 무조건적으로 티 없이 맑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 문지방에 서서 욕을 삼키던 꼬마의 심경에는 분명 검은 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거창한 거짓말을 했던 기억도 남아있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 처음으로 동전을 모아두는 바구니에서 10원짜리 10개를 꺼내 문방구에서 달고나를 사 먹었다. 첫 번에는 걸리지 않자, 다음부터 꽤 자주, 대담하게 훔쳐 간식거리를 사 먹었던 것 같다. 200원, 300원..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동전 바구니에 손을 댔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고, 엄마는 매서운 눈으로 네 행동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뒤이어 아버지에게 내 만행을 고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비난과 욕의 행렬이 귓가에 맴돌았다. 청소털이개로 매도 맞았다. 나는 울며 무릎꿇고 손 들었다.

그때 느껴지던 두려움과 떨림, 수치심을 아직 기억한다. 


딸은 내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던 나이만큼 자랐다. 몸도 머리도 부쩍 자란 만큼 요즘은 하는 행동도 분위기도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아직 어린이이긴 하지만 조금은 더 성숙해진 느낌이랄까. 


실은 며칠 전부터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아침에 양치를 하고 오라고 하면 했다고 대답하는데 칫솔을 만져보면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있는 식이다. 몇 번 주의를 주고, 엄마를 속이지 말고 너의 치아 건강을 위해 이를 꼭 닦으라고 당부했는데, 감시를 하지 않으니 같은 일이 계속됐다.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양치를 했다고 해서 같이 외출을 했는데 나란히 앉아서 입냄새를 느껴보니 전혀 양치를 한 이에게서 날 수 있는 향이 아니었다. 


"너 오늘 양치했어?"

"응"

"아닌 거 같은데." 아이의 입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거짓말을 들켰을 때 아이 표정을 보면 아직 투명하다. 일단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볼은 상기된다. 시선은 불안하고, 손끝을 만지작 거리거나, 하품을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 모습이 웃겨서 피식 웃음이 새 나오려다가도, '이러면 안 되지'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엄마는 너를 믿고 몇 번이나 같은 잘못을 넘어가줬는데, 믿었는데, 어째서 오늘도 같은 일을 벌인 거야?"

"...."

"오늘은 정말 실망스럽다. 양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따로 검사도 하지 않는데 또 이런 일이 생겼네. 너한테 부끄럽지 않아? 엄마를 속이기도 했지만 너도 속인 거잖아."

아이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너를 믿고 싶어. 매일 양치했느냐고 물어보고 확인하면서 잔소리하고 싶지 않아. 네가 스스로 이를 닦는 아이였으면 좋겠어."

"이제 안 그럴게." 아이는 개미만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믿어도 될까? 정말 믿고 싶은데."

"응"


다그치고 싶기도 했고,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만 알려주고 싶었다. 양치질은 자신을 위생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게 엄마를 속이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그리고 아이도 알 거라고 믿었다. 


그 나이 때 어린아이에게 양치질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알기에.. 안 그래도 하기 싫은 일을 혼나기까지 하면 칫솔에 미리 물을 묻혀둔다던가, 치약으로 입에 향만 남도록 하는 등의 꼼수를 쓰는 쪽으로 튈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들기도 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그맘때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거짓말을 들켜 호되게 혼났던 날. 그러나 거짓말 한 아이를 차마 다그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란 내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아직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순진한 딸이 귀엽다. 이토록 쉽게 들키다니 고맙기까지 하다. 

이 아이는 자라서 아마 엄마인 나는 절대 모를 비밀을 하나 둘 만들어갈 것이다. 

양치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을, 발칙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는 이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다 훗날엔 양치질로 실랑이 벌이던 오늘을 추억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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