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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말 Jan 31. 2022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광주민주화운동과 '여성'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여성들의 활약과 그들이 이뤄낸 초석

미디어 매체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 운동에서 여성의 역할


필자는 5.18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 중에서 송강호 배우 주연의 <택시운전사>와 임창정, 엄지원 배우 주연의 <스카우트>를 가장 좋아한다. 두 작품 모두 5월, 광주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잘 표현하였는데, 다만 <택시운전사>와 <스카우트> 중에서 어느 작품을 더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스카우트>를 선택하겠다.

작품의 소재나 장르, 배우들의 연기와는 상관없이 <스카우트>가 <택시운전사>보다 5.1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배우 엄지원씨가 연기한 ‘세영’이라는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스카우트>는 1980년대 광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업야구 스카우터인 호창(임창정 분)은 광주에 괴물급 투수(선동렬!)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상사의 명령에 따라 그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가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세영(엄지원 분)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호창과 세영은 열렬한 사랑을 나눈 사이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세영이 호창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된다. 호창의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지만 사실 세영으로선 이유 있는 이별이었다.

영화 스카우트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여성 리더, '세영'

당시, 호창과 세영이 다니던 대학교에선 한창 대학 교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정보와 역사기록의 암흑기였는데 그는 긴급조치 9호를 통해 유신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민중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하지만, 독재에 대한 저항은 그치지 않았고 그 중심에는 대학교가 있었다. 대학교 역시 군부정권에 의해 많은 시스템이 제재를 받는 시대였는데, 예를 들면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교수들은 교직에서 해고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고 대학 총장 역시 유신정권에 충성하는 인사들로 채워졌다. 많은 학생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해체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권에 맞섰고, 학생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영화 <스카우트>에서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세영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위를 준비하던 세영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세영의 시위대 동료들이 대학교 야구부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자신의 연인 호창이 있었다. 당시에는 사복형사를 비롯하여 대학교 내에 몰래 잠입하여 교내 민주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시위대를 탄압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교내 민주화에 관심 없는 학생들을 선동하여 학생운동을 방해하는 데 앞장서게 하는 사례도 많았다. 호창이 시위대를 탄압하는 세력에 있었던 이유가 어떻든 간에, 남자친구의 폭력적인 모습에 크게 실망한 세영은 그렇게 이별을 통보하게 된다.

영화 <스카우트>에서 가장 주체적이면서 다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세영이다. 호창의 연인의 역할로 소비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학생 시절에는 교내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선 평범한 교사로 지내는 듯하였으나,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의 열기에 힘입어 다시 한번 시위대를 조직하고 그곳에서 리더 역할을 자처한다. 남자 주인공 호창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객체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비해 여자 주인공 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이렇게 ‘여성’이 주목을 받고 주체의 역할로 기록되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없다. 기왕 언급된 김에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여성 캐릭터가 맡은 역할을 잠깐만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택시운전사>의 주연에 ‘여성’은 없다. 그나마 조연으로 광주의 열혈 택시기사 캐릭터 황태술(유해진 분)의 부인 역할을 맡았던 배우 이정은 씨가 떠오르는데, 그마저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여 주체의 역할이 아닌, 미디어 매체에서의 여성의 평면적인 스테레오 타입(누군가의 부인, 엄마)을 담당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배우는 단역에 있다. 바로 ‘주먹밥 아줌마’ 役의 차미경 배우와 ‘주먹밥 여대생’ 役의 이새별 배우다.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 분)이 독일 신문기자 위르겐 히츠펜터(토마스 크레취만 분)를 태우고 민주화 시위대가 모여있는 광장에 도착하는데, 자신들의 소식을 전세계로 널리 알려줄 외국 기자의 등장에 시위대들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해주며 고마움의 표시를 위해 한 여성이 김만섭과 히츠펜터 기자에게 주먹밥을 나눠준다. 그녀는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는 물론, 자신이 나고 자란 광주라는 지역을 지키기 위해 시위대에 참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택시운전사>에서 그녀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여성 캐릭터가 작품 전면에 나서는 일은 그 이후로 전무하다.

왜 <택시운전사>에서 '여성'의 얼굴은 기억되지 않는 것일까

 <스카우트>와 <택시운전사>를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한 이유는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여성’을 기억하는 태도를 극단적으로 비교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택시운전사>가 여성들이 민주화 운동 내에서 수행한 역할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쁜 작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있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표현된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서론을 적어보았다. 이 서론에 힘입어 광주 민주화운동 내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한 번 적어보기로 해보겠다.


한국은 참으로 독특한 나라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의 산업화로 경제 성장을 이뤄냈고, 동시에 권력에 맞서 싸워 독재자를 물러나게 함으로써 민주화를 달성하였다. 그중에서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 항쟁, 87 6 민주 항쟁 등은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빌미로 국민을 탄압하면서 권력을 이어나가려 했던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찬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찬란한 역사의 면면들을 우리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알고 . 교과서에서, 미디어 매체에서, 연구자료에서 보았던 이들의 모습 대부분은 ‘남성 아닌가?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의 시선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폭발했던 1980 광주 민주화 운동을 여성의 시선으로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1980 광주민주화운동과 여성



1980년대는 여러모로 60~70년대 억압과 폭력으로 쌓여왔던 자유에 대한 염원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이는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민주화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여성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국가권력에 저항하였다. 하지만, 미디어 매체를 보아도 알 수 있듯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시민군의 모습도, 계엄군의 모습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 ‘택시운전사’를 떠올려 보셔도 좋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여성 운동가들의 이야기 없인 완성할 수 없다.


노동시장의 영역과 가정의 영역으로 철저히 구분되어 있던 남녀 성별의 역할은 1960대가 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경제적 성장을 위해 산업화가 활발히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광범위하게 노동시장(또는 사회적 생산)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으나, 저임금과 복지정책의 부재, 성별 이데올로기로 인한 차별 등과 함께 가족 노동(가사노동, 양육)까지 가중되었다. 하지만, 차별은 의식을 바꾸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는데, 70년대에 들어서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 투쟁에 활발히 참여하고, 성별 간 임금 차별철폐를 주장하는 듯 노동계급 의식이 성장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고, 80년대는 노동자 여성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던 인텔리 여성들이 약동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산업화와 함께 하였던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 하지만 그들은 값싼 임금과 과중된 노동환경에 노출되었다.

80년대 광주의 모습을 다룬 영화 <스카우트>의 주인공 ‘세영’은 대학교 내에서 조직적인 운동을 통해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시위를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는 등의 행동을 하는데, 이 시기에는 여러 대학교에서 총여학생회가 생기고, 여성주의 교지 활동, 여성주의 모임과 동아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다만, 여성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과거보다 훨씬 증가했으나, 이들이 그대로 노동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었다. 여성의 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전문교육을 받은 다수의 여성은 중간재계층 가정주부로 사는 삶에 귀속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는 생산직 분야의 저임금 노동에 한정되는 이야기였을 뿐 남성 중심의 사회는 여전히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정생활 속에서의 고립과 상대적인 생활의 여유는 여성 문제에 대한 자각과 함께 정치에 관한 관심을 일깨우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정리하자면 1980년대는 민주화 운동과 시민사회의 성장 속에서 전반적인 여성운동 조직이 양적, 질적인 부분에서 크게 발전하는 시기였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운동가들의 응집된 염원과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광주였을까? 1980년대 광주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농촌으로 둘러싸인 교육도시 / 소비도시였다. 학생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고, 여성 노동자 역시 섬유나 의류, 전자 산업 등 노동집약적 산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광주의 외곽에는 광범위한 기층 농민들의 생산지와 연결되어 저곡가 정책의 큰 피해를 입었던 농촌현장의 농민운동 세력과 자연스럽게 규합될 수 있는 공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에서 피해를 입었던 민중들 대다수가 노동자, 농민, 영세 상인이었다는 것은 광주라는 도시의 특성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국가가 일으킨 폭력의 잔상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상처로 남아있고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보여주기도 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하는 기록은 ‘부끄럽기 때문에 감추어야 한다’는 기득권 세력의 주장 아래 없는 역사인 것처럼 치부되나,  역사는 함부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사회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만 한다. 올바른 진실이 밝혀졌을 때 역사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니까.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광주 민중들을 상대로 벌였던 잔인한 폭력과 탄압을 잊어서는 안 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억하고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동시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여성들의 운동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여성 운동가들은 시간이 흘러 주변 가족과 지인으로부터 자신이 시위에 참여하였던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광주라는 지역에 대한 차별, 독재를 옹호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여성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봐주지 못하는 성별 이데올로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여성’은 잊혀 가는 존재로, 여성 운동가들 스스로는 물론이고 이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이 여성의 일을 ‘보잘것없는 일’ ‘보조적인 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성들이 가두행진에 나서고 총을 들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일을 했다고 한다면, 여성의 경우는 항쟁을 계속하게 하는 재생산 활동. 즉, 취사나 모금, 기타 보급 및 지원 활동이나 시체 염하기, 기타 보급 및 지원 활동에 주로 나섰다. 이런 일들은 항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필요한 일이나 역사는 가시적인 남성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고 여성의 활동은 지배 담론의 가부장적 인식에서 잊혀져 갔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가두방송 진행을 이끌었던 전춘심 운동가(1949~2021)

게다가 여성은 남성들이 침해되지 않는 다양한 방식의 상징적 폭력의 피해자였다. 바로 성고문이나 전시적 성폭력을 말하는데 남성과 여성 모두 잔인한 폭행, 구금, 고문 등을 당했지만 이에 더 나아가 계엄군들은 여성들에게 전시적 성폭력을 통해 민중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하려고 하였다. 젖가슴을 잘라내거나, 임산부의 배를 구타하였다는 기록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물리적 폭력은 아니었으나,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정신적, 상징적 폭력을 당한 희생자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전춘심 운동가이다. 그는 항쟁 시기, 가두방송을 통해 계엄군의 잔혹성을 시민군에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후 경찰에 연행되어 간첩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이들로부터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문제는 석방된 이후에도 전춘심 운동가를 둘러싼 주위의 오해와 폭력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한 폭력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그를 ‘간첩’이라고 오해하는 동시에 ‘여성이 함부로 행동하고 나선다’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전춘심 운동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고문’ ‘폭행’ ‘성폭력’의 사실을 ‘여성이 처신을 잘하지 못해서’, ‘집안의 수치’로 치부되어 숨겨야만 했다.

 

여성 운동가들의 역사는 이렇게 잊혀선 안되었다. 그들의 행동이 있었기에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고, 그들의 행동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시민의 책임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내에서 여성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몇 가지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송백회가 있다. 송백회는 광주의 여성. 특히 교사, 간호사, 가정주부, 여성 노동자, 학생운동 출신 지식인, 민청학련 구속자 부인 등 20명이 주축이 되어 1978년 12월에 창립된 민주 운동단체로서 민주 운동가 지원과 소모임(한국 근현대사, 환경공해, 기생관광문제 등의 사회현실 인식 공유) 활동을 지원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에도 송백회는 남성들과 함께 녹두서점과 YMCA라는 건물을 활동거점으로 삼아 광주 항쟁 지도부와 함께 시위를 지원해나갔다. 이들은 궐기대회, 가두방송, 대자보, 취사, 시체처리 등의 역할을 분담하고 대중을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청년 여성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송백회' (1979년 야유회 사진)

녹두서점이란 어떤 곳인가?

녹두서점은 70년대 후반기 청년운동권의 논의 구조가 모이고, 광주 민주여성 세력들이 집결하는 장소였다. 초창기 학생운동가들의 모임이었던 전남 구속청년협의회의 모임터이자, 각종의 독서그룹을 통해 학생운동가들을 배출하고 다른 지역의 역할을 담당하는 문지기 임무를 수행한다. 녹두서점의 송백회는 현대문화연구소의 산하 부서 개념이었는데 여기서 현대문화연구소는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고 근로 여성들이 주축을 이루는 ‘들불야학’과 ‘광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광주의 여성들은 송백회와 현대문화연구소를 통해 청년운동권의 학내, 학외 운동을 열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물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녹두서점의 위치는 광주시 동구 장동 58번지이며 현재는 서점의 기능을 하지 않으며 518 사적지 표지석만 서 있는 상태이다.


앞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80년대 광주는 대표적인 소비도시 중 한 곳이었다. 많은 수의 노동집약적 구조의 기업들이 분포하고 있었고 이에 비례하여 여성 노동자의 수도 많았다. 이들의 임금투쟁과 노조결성을 지원해주었던 조직이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였는데, 이들로부터 지원을 받던 일부 노동자들은 518항쟁의 주역이 되어 가두투쟁이나 집단적 차량시위에 참여하였고,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황폐해진 거리를 청소하거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특히 가두시위나 차량시위에 참여한 일원들은 대부분 남성의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구성원 중에는 분명 여성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성 운동가들의 개별적 저항이 있었다. 항쟁은 조직을 중심으로(송백회, 들불야학, 광대, JOC 등) 사회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은 맞으나,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 계엄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광주의 딸과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대다수의 일반 시민 여성들도 활동에 나섰다. 다친 이들을 위해 다 같이 헌혈에 동참하고, 배고플 시위대를 위해 취사를 하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시위대의 후방에서 보도블록을 깨서 전위에 날라주고, 부상자들을 응급처치하고, 부상자들을 운반하고 간호하고, 시체들을 염하였다. 계엄군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는 상황에서도 이들의 행동은 시위대의 연대감을 형성하는데, 나아가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게 한데 주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시대는 80년대를 넘어 90년대, 2000년대가 되면서 한국 여성들의 권리와 지위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성장하였다. 이는 수많은 여성 민중, 노동자들의 노력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확장되고, 확장된 민주주의는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낸다. 남성 중심의 민주주의에선 다뤄내지 못했던 여러 의제가 여성 정치인이 등장하고, 여성에게 필요로 하는 의제를 다루게 되면서 민주주의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성 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 이슈는 군사 독재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의 자유마저 억압되고 국가의 권력과 경제가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 그 누구도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위해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서슬 퍼런 총칼과 지독히도 매운 최루탄에 맞서 싸웠고 이를 당당히 쟁취해냈다. 그 중심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있었다.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고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은 많은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권리를 확장해 나가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이 존중받을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연대해야 한다. 과거, 수많은 여성이 자신과 미래세대들이 받을 차별과 무시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 묵묵히 광주의 시위 현장에 뛰어들었던 그때처럼 말이다. 이 글이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분들에게, 그리고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심심찮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마음 속 깊이 기억해 두어야 하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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