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산업'의 가짜 행복에 속지 말고, 진짜 행복을 찾아가기
당신은 행복한가? 아마 이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드물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 지수는 크게 높지 않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표한 '2022 세계 행복 보고서(2021 World Happiness Report)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146개국 중 59번째였다. 아주 높은 수치도, 아주 낮은 수치도 아닌 딱 중간. 국내총생산(GDP)과 기대수명 수치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사회적 지지, 자유, 부정부패, 관용 등의 항목에선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용어와 기준을 차치하고 개개인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언제 가장 행복한가? 행복이란 것만큼 추상적인 단어는 없지만, 사실 우리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오랫동안 원하던 결과를 얻게 되었을 때 등 우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실은 '진짜'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행복에 대해 연구하는 원론적인 과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이때, 당신이 행복을 느낀다고 했지만, 당신의 뇌에서 나오는 특정 신경전달물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전까진 그것을 확답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심장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느낀다. 다시 말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화학적 신호가 감정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엔도르핀, 도파민, 옥시토신.
우리가 어떤 행복을 느끼냐에 따라 나오는 신경전달물질도 다르다고 하는데
첫 번째로, 엔도르핀. 이는 쉽게 말해 우리가 '흥분'할 때 느끼는 짜릿한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응원하던 팀이 극적인 우승을 이뤄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짜릿한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등. 우리는 이럴 때 엔도르핀이 분출되어 흥분과 함께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참고로, 엔도르핀과 그 성격이 비슷한 마약물질인 헤로인도 사실 엔도르핀과 비교하면 그 강도가 약하다고 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흥분이 섞인) 행복의 정도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두 번째로, 도파민이 있다. 도파민은 '보상심리'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자신에게 긍정적인 상황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도파민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회사로부터 성과금을 받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뜻밖의 일로 칭찬을 받게 될 때, 심지어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일어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주말일 때 행복을 느끼지 않는가. 이런 보상심리와 함께 느껴지는 긍정적인 감정들이 도파민인 것이다.
세 번째로 옥시토신이 있다. 필자는 이 옥시토신이라는 물질이 좋다.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보다 구체적인 상황에 대입하여 설명할 수 있다면 옥시토신은 조금 추상적인 녀석이다. 옥시토신은 어렵다. 누군가를 존경하거나 소중히 여기는 마음, 유대관계, 연대하고 있을 때 옥시토신이 나온다고 하는데 필자는 우리 사회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옥시토신과 연관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거 같아 걱정이 든다.
무엇보다 현 사회는 도파민과 엔도르핀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만을 요구한다. 이는 행복산업이란 단어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 행복은 어떻게 변질되는가. 자본주의는 화폐가치의 축적과 물질적 소유를 중요시 여긴다. 많이 버는 것은 ‘성공’이고, 적게 버는 것은 ‘실패’이기에,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릴 수밖에 없고, 경쟁이 필수 불가결해진다.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지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행복산업이다. 행복이란 단어는 추상적인 감정에 불과하지만, 이 감정을 발현시키는 신경전달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을 ‘물질’로 만들어 시장에 판매하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산업인 것이다. 행복산업은 자본주의가 태동되는 시기부터 융성하였다. 드러그 푸드(drug food)라고 불렸던 설탕과 카페인은 유럽이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던 시기나, 산업혁명 때에도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의 노동 강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약물을 제공하였는데, 이에 대한 면역이 생겼을 때 카페인이나 니코틴 같은 각성제로 전환하여 신체에 큰 무리가 오지 않도록 조절한다. 카페인이나 니코틴을 섭취할 때 일순 느껴지는 흥분(그리고 행복)이 노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산업혁명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이 공장이나 농장, 탄광 같은 험지에서 일을 할 때 이들에게 커피나 홍차, 코코아, 설탕 등을 공급하며 노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통제하였다.
영국이 중국을 침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아편(물론 이는 drug ‘food’라고 하는 식품은 결코 아니지만) 역시, 인공적으로 이들의 행복을 조절하여 승리하였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식민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 역시 행복산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먼 과거의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의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피스 거리에 쫙 펼쳐진 카페들, 회사 탕비실에 놓여 있는 믹스커피와 비타민 음료.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레드불이나 몬스터와 같은 각성 음료. 우리는 이걸 마시고 ‘그래 좀 더 힘내자, 할 수 있어’라는 오묘한 행복한 감정과 함께 다시 노동을 이어나간다.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그 규모를 키운다면, 행복산업은 더욱 커질 것이고, 인간의 행복을 조절하는 기술의 발달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행복해질 수 있을까?
누군가를 통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행복산업의 역사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노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커피를 마시면 그 순간은 잠깐 행복해질지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더욱 피곤해진다. 심지어 커피를 한번 안 마시면 금단증세까지 생기지 않는가. 일종의 중독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중독에 빠지면서까지 일시적인 행복, 다른 말론 이 힘든 시스템에서 잠깐이나마 망각을 하고 싶어서는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마약과 전쟁을 지속적으로 취재해온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요한 하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정신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중독의 반대말은 깨어 있는 맑은 정신상태가 아니라 ‘연결’이다라고 말이다.
필자는 여기서 또 다른 행복의 신경전달물질, 옥시토신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연대할 때, 우리는 옥시토신을 통해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과거 국민의 1%가 마약중독자인 포르투갈은 2000년대 초, 중독자들을 격리시키는 대신 사회에 재결합하고, 다른 사람과 연결할 수 있는 정책으로의 예산을 책정하게 되는데, 결과는 마약중독자의 비율이 현결하게 줄어드는 성과로 나타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만의 시간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과 이어지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현 사회는 다른 사람과 관계할 수 있는 여유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 바쁘고, 경쟁해야 하니까. 커피 중독,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스마트폰 중독 같은 단어들은 갑작스레 생긴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행복을 위해 중독에 빠진 우리들을 위해 자본주의 사회가 가속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유와 공정을 계속해서 외쳐대는 사회.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아래 누군가는 철저하게 배제될 수밖에 없고,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서로 연결되어도 힘든 사회에서 그러지 못하고 개인만을 생각한다면 구성원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결국은 행복산업이 만들어낸 허상에 집착하게 되고, 행복산업의 허울에 중독되어 갈지도 모른다.
만일 여러분도 홀로 어떠한 물질에 강박적으로 빠져있다면, 그것이 행복하기 위한 의례적 행위는 아닌지, 그것이 오히려 심신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둘러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을 찾고, 같이 걸어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