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나를 버티게 해 줬던 단 한 가지는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영원히 이렇게 힘든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나의 삶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힘든 것도 좋은 것도 모두 삶이니 한 번 겪어보자는 마음으로 버티었다. 그런데 방콕에 있으면 오래오래 살고 싶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보다가 장을 보고 와서 저렴하고 신선한 과일로 아침을 먹는다. 아무도 없는 피트니스 룸에서 혼자 운동을 하고 수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낮에는 아름다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을 하고 밤에는 아무런 상념도 없이 이른 저녁에 침대에 누우면 바로 깊은 잠에 빠진다. 이런 삶이 영원히 계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울에서는 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고 방콕에서는 그냥 지나가버리는 매 순간이 아쉬워 늘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 버티는 삶과 매 순간을 느끼는 삶. 서울은 멋진 도시고 그곳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이들도 많겠지만 내가 언제쯤 서울과 화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일요일 오후, 정원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행복감을 준다. 귀한 사랑 속에 있다. 매 순간을 느끼며 사는 중이다. 방콕, 방콕이다.
- 몇 해 전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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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보다 방콕에 오래 머물기 시작한 지도 벌써 사 년이 흘렀다.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서울과도 많이 화해를 했다. 서울과 떨어져 있으니 오히려 서울의 좋은 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서울과 완벽하게 화해를 했다고 말은 못 하지만 태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지칠 때쯤 서울로 돌아와 지내면 몇 주간 마음 편안히 지낼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걸 알게 된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면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이 “언제 또 나가니”라는 것이고 답은 늘 “아직 잘 모르겠어”다. 정말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어서 그렇게 대답을 하곤 한다. 서울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제 나가야겠구나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 마음이 들 때까지는 언제 다시 방콕으로 돌아가야지라고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는다. 고요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 날 번쩍하고 그 순간이 찾아온다. 숨이 턱 하고 막히면서, 매일 그리운 방콕과 치앙마이가 그리고 후아힌과 푸껫이 죽을 것 같이 그리워지는 순간. 가장 그리워지는 그때, 그때 다시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산다. 그날의 감정에 충실하며 살다 보면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을 알려준다.
지난 몇 년간 사람을 잘 만나지 않고 살았지만 요즘엔 예전에 함께 연극을 했던 친구들이나 함께 여행을 했던 친구들 그리고 함께 방송을 했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잦다. 한국을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오히려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역시 좋은 관계라는 것은 지나치게 가까이 있을 때보다 조금 떨어져 있을 때 완성이 되는 건가?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아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요즘에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되도록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에 비하면 늘 집에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아무튼 내 기준에서 나름 사람들을 열심히 만나다 보면 당연히 나처럼 태국을 특별히 좋아하는 친구들도 만나게 된다. 그 친구들은 태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나의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하곤 한다. 내 입장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간절한 문제였기에 서울을 떠나 방콕에 머무는 결정을 했던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친구들은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며 나를 치켜세워주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을 동경하게 마련인가 보다. 어쨌거나 태국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동지의식 같은 것이 생겨 마음이 푸근해지곤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들이 태국을 좋아하는 이유가 꼭 나와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매일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모여 파티를 즐길 수 있어서 태국을 좋아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저렴하게 마사지를 받을 수 있어서 태국이 좋다고 했다. 누군가는 골프 때문에, 누군가는 친절한 태국 사람들 때문에 태국이 좋다고도 했다. 누군가는 태국 음식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남부의 아름다운 바다 때문에 태국이 좋다고 말했다. 태국은 참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태국을 좋아하는 이유도 제각각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태국 덕분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지니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이방인의 삶이다.
만나고 싶고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있으니 이제 서울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매일 같이 도서관 서가 구석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모국어로 된 책을 볼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면 모국어로 대화를 할 수 있다. 티브이를 틀 때마다 ‘유느님’을 만날 수 있고 극장에서든 집에서든 한국어 자막이 나오는 영화를 볼 수 있다. ( 요즘 태국에 머물면 한국에서처럼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한국이 그리울 때가 많다 ) 그리고 매일 같이 한식을 먹을 수 있다. 밤이든 낮이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길들이 있고 곳곳에 멋진 공원들이 너무도 많다. 계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 년 내내 무더운 방콕에 비하면 야외활동을 하기에 좋은 날들이 많다. 날씨만으로도 선물인 봄과 가을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태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러한 것들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부모님과 형님, 누나 그리고 조카들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된다. 방콕에서 이방인으로 지내온 시간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머무는 것이 힘들었던 서울이라는 도시와 다시 화해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러니 떠나고 볼 일이다. 일생에 한 번은 이방인으로 살고 볼 일이다.
어제는 예전에 같이 작품을 했던 감독님께 연락이 와서 방송을 다시 하자고 하셨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배 작가님과 점심 약속도 잡았다. 언제나 마음이 들떠있는 방콕에서와는 달리 서울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아 조금 더 일에 집중할 수 있고 보다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누군가 언제 방콕이 가장 그립냐고 묻는다면
‘매 순간’
매 순간이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매 순간 그리워요. 온갖 언어, 온갖 표정, 온갖 체취들이 뒤섞여 완성되는 혼란스러운 방콕의 풍경. 언제나 안심이 되는 치앙마이에서의 평화로운 일상, 청춘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안다만해의 바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볕을 맞으며 머물던 시간들, 비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우고 있던 태국 사람들의 그 웃음들이 매 순간 그립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매일 밤 혼자 맥주를 마시다 잠이 든다. 이제는 수면유도제 없이도 잠들 수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며칠 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님의 공연도 보았다. 사석에서 만나면 그저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응시하는 무대 위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무대 위에 서본 적이 있었지. 무대 위에 있을 때 나는 조금 더 우주에 가까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았지. 좋았던 일, 아팠던 일, 옛 기억들이 떠올라도 이제는 이겨낼 수 있다. 서울과 화해를 했다. 더 많이 화해를 하는 중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행복하다. 그렇지만 언제 그곳이 가장 그립냐는 질문을 받으면 매 순간, 매 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