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by Gorae

눈물이 나서 한참을 미뤄두었다 꼭꼭 눌러쓰는 편지 같은 것.


고민 끝에 조금 일찍 한국에 들어갔다 오기로 했다. 한국인들은 태국에 입국하면 삼 개월 간은 무비자로 지낼 수 있는데 태국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은 삼 개월이 되면 주로 이웃 나라로 출국한 뒤 다시 입국해 다시 무비자 삼 개월 기간을 받는 ‘비자 런’을 하곤 한다. 나는 무비자 삼 개월이 다 되면 한국에 가서 일을 보고 다시 태국에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직 삼 개월이 다 되지 않았지만 조금 일찍 한국에 들어가 일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폭탄테러가 터지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후로는 스트레스와 수면장애가 더욱더 극심해져서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방콕의 좋은 것들을 열심히 즐기고 싶은데 건강이 좋지 않으니 좋은 것들을 모두 누릴 수 없고 방콕의 나쁜 점들만 보인다. 해군으로 입대해 함정근무 발령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임이 체벌을 한다고 냉동고에 나를 가둔 적이 있는데 그때 폐소 공포증이 생겼다. 야채 고만 해도 괜찮았는데 육고는 정말 끔찍했다. 한동안은 폐소 공포증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이제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로는 다시 그 증상이 나타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너무 공포다. 마흔두 살 먹고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내가 웃겨서 혼자 빵 터진 적도 있지만 공황상태에서 오는 그 더러운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거다. 발밑에 갑자기 크고 깊은 우물이 생겨 끝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그 기분.


컨디션이 좋지 않은 와중에 환율까지 올라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집에 있고 자주 요리를 해 먹기에 생활비가 덜 들지만 외식 문화인 태국에서는 요리를 해 먹는 것이 썩 편하지는 않다. 흔히들 태국이 물가가 싸다고 하지만 실제로 생활을 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단기 여행객들이야 노점의 팟타이나 쌀국수 같은 것만 먹으면서 태국 물가 싸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는 나 같은 한국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매일 노점의 팟타이만 먹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지불해야 하는 돈이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많다. 한국에서 한식당에 가면 메뉴 하나만 시켜도 여러 가지 반찬이 나와 배불리 먹을 수 있지만 여기는 메뉴 하나를 시키면 정말 그것 하나만 나오고 대체적으로 양이 작다. 그래서 보통 식사 때는 메뉴 하나만 시키면 양이 차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태국 사람들도 식사 때는 대체적으로 여러 가지 메뉴를 주문하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주 간식을 사 먹곤 한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가면 물 혹은 음료를 꼭 주문해야 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방콕에서 지내면 서울에서 지내는 것보다 식비를 포함한 생활비가 결코 적게 들어간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리고 방콕은 택시비가 싸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걸어갈 거리도 무더운 날씨 때문에 택시나 지하철 등을 타고 이동하기 일쑤라 교통비가 한국에서보다 더 많이 든다. 그리고 조금 이동하다 보면 지쳐서 카페에 가서 음료를 한 잔 마시며 쉬어가야 한다. 정말 나처럼 숙소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방콕은 밖으로 나가는 즉시 줄줄 돈이 새어나가는 곳이다. 한국에서는 잘 가지 않는 마사지샵이나 루프탑 바도 상대적으로 저렴해 자주 들르게 되고 길을 가다가도 펍에서 흘러나오는 라이브 공연 소리에 이끌려 펍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기 일쑤다. 방콕에서는 돈을 쓸 수밖에 없다. 단기 여행객들이 몇 주간 태국에 머문 후 자신들이 현지인화 다 되었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에어컨이 없고 벌레가 출몰하는 낡은 아파트에 살며 매일 같이 위생이 열악한 더운 노점에서 식사를 하는 현지인들의 삶, 월급날 비싼 펍에서 하루 기운 내고 또 한 달간은 비싼 펍에 가지 못하고 길바닥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는 로컬들의 삶. 그런 현지인들의 삶처럼 살 수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물론 방콕에는 부자들도 많지만 그 사람들이 농담처럼 말한 현지인들은 부자들을 지칭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방콕에서 꿈꾸는 삶이 그런 것 일리는 없다. 때로는 로컬들이 주로 오는 식당에 가거나 그 식당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조심스러울 때도 있다. 외국인들이 오기 시작하면 로컬들이 가던 식당의 음식값이 올라가게 마련이니까. 그러면 그 식당을 애용하던 현지인들은 또 어디를 가야 하나.

이곳에서는 수입품들에 대한 관세가 세서 수입품들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한국보다 가격이 비싸다. 인건비가 싸기에 분명 한국보다 가격이 저렴한 품목들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방콕의 생활비가 서울에서 사는 것보다 결코 작게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같은 돈을 쓰면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요즘엔 자꾸만 방콕이 미운 점이 보인다. 내가 변한 걸까? 방콕이 변한 걸까? 방콕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한국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 수 있어서 좋았던 걸까?


그렇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이대로 방콕을 잃을 순 없다. 지금 내 모습은 마치 변해가는 연인 앞에서 투정을 부리고 있는 사람 같다.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해간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변해가는 것들 속에서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지만 어쩔 수 없다. 변해가는 것들 속에서 나도 변하고 당신도 변하고 방콕도 변한다. 이 사랑을 지키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연인이 전과 같지 않은 말투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던 그때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내가 참 초라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나라고 변하지 않았을까? 나도 변했을 것이다. 나는 변화를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태국에 한 번 들어오면 가능한 한 오래 머무는 것이다. 방콕을 떠날 때의 그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마음을 되도록 겪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나를 바꾸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바꾸려 들 것이다. 변해야 한다. 약해지는 마음을 이겨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언젠가 막 스무 살이 된 친구가 실연을 하고 나에게 힘든 마음을 안고 물었다. “나이가 들고 여러 번 사랑을 해보면 이별이 두렵지 않게 되나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담담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했는데 어떻게 그립지 않을 수 있고 아프지 않을 수가 있는가? 수십 번 수백 번을 해봐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다. 담담해지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없다. 아프고 또 아픈 시간을 보낼 수밖에. 아프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나는 지금 마음이 아프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려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시 아프다고 해도, 그 아픈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두렵다고 해도 다시 그 사랑 속으로 갈 거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행복했기에 변해버린 방콕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늘 방콕을 그리워할 거고 다시 만나러 올 거다. 다시 이렇게 아픈 마음을 겪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워준 당신을 잊지 않을 거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다시 만나자, 방콕.

캐리어에 짐을 싸고 택시를 타고 엠퀘티에 백화점으로 가서 미리 캐리어를 공항으로 보내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홀가분해진 몸으로 스쿰빗의 거리거리를 걸어본다. 쏘이 아리 끝에 있는 빅씨에 가서 내가 오랫동안 이용한 비싼 향수의 향과 비슷한 싸구려 향수를 하나 구입하고 대련 반점에 가서 마파두부를 먹는다. 윈 모토 싸이 ( 오토바이 택시 - 태국어 공부를 하다 보니 랍짱은 비속어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윈 모토 싸이라고 쓸게요. )를 타고 통로로 가서 메리어트 호텔 루프탑 바 옥타브에 가서 노을을 보며 칵테일 한 잔을 마신다. 마치 영원히 방콕과 이별하는 것처럼.

새벽 한 시 비행기인지라 루프탑에서 혼자 두 시간이 머물고도 시간이 남아 스쿰빗의 거리거리를 걷는다. 그러다 발목을 접질렸다. 방콕의 거리는 보행자 친화적이지 않다. 방콕에서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귀국을 하는 날에는 의례히 일어나는 일이다. 방콕이 나를 그냥 보내줄 리가 없다. 태어나서 발목을 접질린 적이 대여섯 번 정도 있는데 한 번은 군대에서 농구를 하다가 접질린 것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방콕을 떠나던 날 일어났던 일이다. 방콕이 떠나는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방콕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가? 여전히 내가 떠나는 것이 싫은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길 바란다. 여전히 당신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발목이 퉁퉁 부어버렸다.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그냥 멍하니 있었다. 내가 다시 방콕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인데.

이전 26화태국을 닮은 맛, 똠얌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