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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Jan 03. 2019

계약직 사무노동자의 12월 31일

실은 마주앉아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정해진 일정이 다가옴에 따라 이미 마음에서는 작별을 마쳤고, 사무실의 책상 서랍 곳곳, 데스크탑 컴퓨터의 일년치 기록 모두 깨끗하게 정리한지 며칠이나 지났기 때문이었다. 


소리없이 몇 주 동안 주변을 정리하며 마음 정리까지 마친 사람에게 떠나는 그 순간은 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의의 마음으로 남겨진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자 하며, 헤어지는 순간의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순간은 못내 아쉬움과 감사함을 담아 조금 낯간지러운 퍼포먼스를 누가 더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는가를 견주며, 이에 따라 그간의 오랜 노고를 무력화 시킬 수도 있을 서로의 뒷 모습이 결정될 수 있는 야속한 순간이 된다.


그래서 나는 노력해보았자 내놓고 보여주기 안쓰러운 죽상이었을 테지만, 시원섭섭함을 표현해줄 얼굴 근육을 몇 시간째 짜내고 있었을 테고, 예의를 갖춘답시고 입꼬리를 줄곧 아래로 내려 어딘가 썩은 듯한 표정을 하고, 양팔을 앞으로 모으고 어깨를 안쪽으로 구부려 어딘가 송구스럽고도 예의를 잃지 않은 하인의 자세로 마주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한 말이 귀 속으로 스며들어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하루종일 낯간지러운 이별이라는 행위를 변주하느라 정신이 새하애졌고, 어쩔줄 몰라 어색하게 움직이는 몸뚱이와 애잔한 눈빛의 콤비네이션은 엇박으로 우스꽝스러웠는데, 이를 무마해줄 예의적절한 인삿말조차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여튼 생각지 못한 이별 퍼포먼스의 홍수로 호되게 지쳐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으며, 누군가의 호기로운 새출발을 엄청나게 질투했다. 실은 어처구니 없이 폭력적인 감정에 휘둘려 이를 질투라는 귀여운 단어로 무마할 순 없을 것 같지만, 어마어마한 빈부격차의 악몽으로 점철된 고등학교와 대학원 시기가 도래해 케케묵은 성깔의 향연을 부렸으니, 그간 떠들어온 인간의 자비심이니 인격의 고결함이니... 참으로 의미없다.

 

요지는 지난 하루의 일을 돌아보니 내 마음은 자리에서 떠났을 뿐만 아니라 나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별 퍼포먼스가 필요한 시점에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으며 이를 지켜보는 유체이탈현상 또는 소격효과가 발생해 적잖이 괴로웠다는 것이다. 새벽에 이 감정을 낱낱이 쓰고 있는 자신의 냉정함을 보라. 그래도 나는 정중하게 안녕히계십시오. 그간 감사했습니다 라고 허리굽혀 말하는 연습을 해야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당연한 인사를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하는 무정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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