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혁명이 끝난 후 아방가르드는 어디에 있는가
몇 해 전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은 전세계 각지에서 소리치고 저항하며 피흘리는 민중의 절절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사회변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예술작품들을 보면서 이러한 작품들과 아트액티비즘과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재료일까 콘텐츠일까? 아니면 내포된 예술성이나 매끈한 마감기술일까? 이들은 외려 동일한 매체를 사용하고 동일한 정치 의식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왜 예술작품은 화이트큐브에 초대되어 ‘작품’으로 인정받고, 아트액티비즘는 길거리의 무명의 외침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다시 말해, 소위 예술계가 인정한 예술가의 다큐멘터리가 각광받는 한편, 아트액티비스트의 작품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기록물로만 다루어지는 것일까.
예를들어 당신이 정치적 예술에 한껏 고양되어 미술 전시장을 나설 때를 생각해보라. 당신은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해 보았는가? 아니면, 몸서리치며 보았던 세계의 고통과 비참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최근 미술의 트렌드를 훑어보기 위해 바삐 다른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는가? 예술가는 정치적 이슈를 바쁘게 클릭하며 자신의 명성과 몸값을 올리는데 분주하고, 큐레이터들은 이른바 ‘트렌드’를 쫓기 위해 정치적 이슈를 클릭하는데 골몰하고, 예술계는 이에 두 팔 벌려 환호하고 있을 때, 액티비스트들은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과 함께 거대한 경찰병력에 둘러싸여 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근대 이후 정치상황을 반영하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19세기 서구의 산업혁명 전후로 생산되어왔다.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지나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플럭서스에 이르러 삶과 예술의 실천으로서의 실험적 예술이 이어졌고, 68혁명 이래로 수많은 예술 저항활동들이 세계적으로 펼쳐졌다. 따라서 예술은 곧 삶의 실천이자 반영으로써 삶의 최전선을 걷는 저항이자 자율적 행위였다. 그런데 오늘날 삶의 최전선을 걷는 자들은 누구인가? 액티비스트들을 ‘전위’에 남겨둔 채 예술가들은 역사의 관조자가 되어 과거의 혁명을 곱씹거나 타인의 고통을 전용하며 안전한 ‘후위’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미술계를 해방 전후부터 현재까지 살펴보면 예술가들은 자본권력과 지식권력을 모두 갖춘 부르주아출신이었다. 이들은 일본이나 외국에서 유학할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국의 트렌드를 한국적 전통과 버무린 예술작품을 시도한 사람들이었다. 최근의 한국 예술계를 구성하고 있는 예술인들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몇몇 학교를 중심으로 한 예술집단과 해외파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고, 이들에 의해서 예술의 흐름이 결정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이들에게 ‘정치적 실천’이란 1980년대를 상기시키는 고루한 단어이거나 비제도권 출신의 아마추어리즘일 뿐이고, 서구산 담론이야말로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습득하고 재생산해야 할 문화적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이들이 먹다 체한 서구산 담론은 현장과 괴리되어 형이상학적 아카데미즘을 기계적으로 송출해내며 예술계의 고립을 자처하기 일쑤다. 담론 생산자가 되기 위해 예술가들은 매일같이 최신 서구산 담론에 샤워하고 싶어하지만, 실상 SNS 세계와의 꼬리잡기놀이에 빠져 담론이 아닌 트렌드를 뒤쫓기 바쁘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 역시 SNS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이들과의 적극적인 인터렉션을 통해 힙한 트렌드를 찾아내거나 뉴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스펙타클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예술이 비정치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화려한 수사와 뉴미디어 기술로 치장한 최첨단의 스펙타클을 재현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유미주의, 아카데미즘)과 “삶과 예술의 통합”(아방가르드) 사이에서 갈피를 잃은 채 혁명의 언어를 피상적으로 전시하며 당면한 현실의 삶을 외면할 때, 삶의 현장에는 누가 남아있는가? 바로 무명의 액티비스트들과 거리의 시민들이 예술과 삶의 경계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을 실천하고 있었다. 예술이 때 지난 혁명의 언어로 장송곡을 반복할 때, 살아있는 현장의 언어로 자율적 저항행위를 실천해 온 것은 아트액티비즘이다. 여기서 나는 유미주의와 리얼리즘을 논의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미술의 진정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나는 정치적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예술가와 예술계가 정치적 이슈와 담론을 도용(appropriation)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정치적 예술이 아트액티비즘을 통해 화이트큐브 밖으로 나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배치될 때 사회적 행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삶-예술의 최전선을 걷는 행위, 아트액티비즘
액티비즘이 사회변화를 이끄는 직설적인 방식의 외침이라면, 예술은 액티비즘에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정서적인 접합력을 부여한다. 아트액티비즘의 전략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작동하게 만드는 ‘감응의 힘’을 이용한다. 현장의 절박한 외침이 예술의 창조성과 결합하여 불가역적인 정치사회문화적 변화를 도출해 낸 역사적 사례들이 도처에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액트업(ACT UP)과 시카고 예술행동, 세르비아의 오트포르(Otpor!) 그리고 일본의 사운드 데모와 탈원전 운동은 아트액티비즘의 창조적인 힘을 통해 사회변화를 위한 문화의 저변을 확장했다. 아트액티비즘의 다양한 전략을 몇몇 사례와 함께 살펴보면서 ‘예술밖의 예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을 살펴보고, 한국의 현 주소를 돌아보고자 한다.
① 미국의 액트업, 대중매체의 자극적인 상업광고전략을 전복적으로 활용하기
1980년대 후반 미국 정부의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냉대로 수많은 에이즈 희생자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액트업의 예술가들은 게이를 상징하는 분홍색 역삼각형 엠블럼에 ‘침묵=죽음 Silence=Death’을 새기고,‘키스는 죽음이 아니다 (Kissing Doesn't Kill)’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상업적 슬로건과 이미지를 정치적 예술로 전복하는 전략을 사용하여 아트액티비즘을 실천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포스터와 광고를 시내 곳곳에 붙이고, 티셔츠, 엽서 등을 배포하며 프로파간다로서의 예술을 자처했다. 에이즈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죽음으로 명명하고, 적극적으로 대중매체를 활용하여 운동의 가시성을 확보하고 일반 대중을 향한 노출빈도를 높였다. 액트업은 또한 지도자나 조직화된 구조가 없는 탈중심적인 방식의 직접행동주의이기도 했다.
②시카고 예술행동: 시각성, 공공성, 이동성, 일시성의 전략으로 법규의 틈을 파고들기
시카고의 아트액티비즘은 단일한 양태로 일어나기 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시키고라는 지역 기반의 이슈를 중심으로 시기적절하게 모이고 흩어졌다. 주로 1900년대 이후 미국의 저항운동의 유산을 이어받은 이들은 법에 저항하는 예술행동을 이어나갔다. 이들의 활동을 시각성, 공공성, 이동성, 일시성의 네가지 주요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시위 전략으로서 이들은 대중에게 그리고 미디어에 노출될만큼 눈에 띄는 시각적인 형태의 오브제들을 사용했고, 보이지 않는 탄압과 차별을 시각화하여 대중에게 알리는데 목적을 두었다.
예를들면 도시개발과 주택문제로 인해 쫓겨날 처지에 이른 공간의 가구와 집기등을 도로위에 옮겨놓는 방법으로 공공장소를 이용해 개인의 문제가 곧 사회구조적 문제의 연장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공공의 장소에 사적인 물건들을 가져다 놓는 방법을 사용하여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바꿔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스티커와 그래피티, 스텐실 등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이동성과 일시성을 특징으로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도시 곳곳에 자신들의 요구를 알렸다. 이러한 활동과 더불어 심해지는 도시의 시위 규제로 길거리 피켓팅과 sit-in, 드러눕기, 슬로건 외치기 등은 물론이고 시위 규제가 강화되자 관료행정적 규제 방침으로 처벌하기 곤란한 어슬렁거리기(loitering)와 같은 행위들로 저항행동들을 고안하기도 했다.
③ 세르비아 오트포르! : 웃음과 유머로 독재자에 대한 공포를 허물기
오트포르!(Otpor!)의 리더중 스르자 포포비치의 ‘독재자를 쓰러뜨리는 방법’은 테드 강의, 다큐멘터리와 책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오트포르는 저항이란 뜻을 가진 비폭력 저항운동단체로 2000년 세르비아에서 밀로셰비치를 무너뜨린 주역이었다. 이들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가로지르며 전방위적인 방식으로 독재에 대항하였다. 그 중 차별화된 전략으로 손꼽히는 것은 전국에서 펼쳐진 거리의 연극이었다. 세르비아의 풍자극 전통을 활용하여 독재자를 재치있게 조롱하면서 시민들에게 드리워진 독재권력의 공포를 극복해내기 위해 웃음과 유머를 되찾아주었고, 정권의 취약점을 드러내 반정부적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고자 했다.
“우리 오트포르 활동가들은 하얀 꽃을 준비했다. 날마다 머리에 흰 조화를 꽂는 밀로셰비치의 아내를 상징했다.” 이들은 그 하얀 꽃을 칠면조 머리에 꽂았다. 꽃으로 치장한 칠면조들을 거리에 풀어놓았다. 사방으로 흩어져 꽥꽥거리는 칠면조들 사이로 밀로셰비치의 경찰들이 바보처럼 뛰어다니다 넘어졌다. “우스꽝스런 광경에 시민들은 즐거워했고, 칠면조 뒤를 쫓는 경찰들은 전보다 덜 겁나는 존재가 됐다.”
오트포르는 뮤직콘서트와 문화축제를 열고 반-밀로세비치 자료들을 만들어 대규모로 배포했다. 인터넷, 핸드폰, 팩스, 대안적 미디어를 사용하여 저항의 메시지를 퍼트리고 이를 반-밀로세비치를 조직하는데 사용하였다. 청원과 보도자료 배포, 성명서와 대중연설은 물론이고 오토포르의 학생들은 도시 전체를 오토포르의 아이콘인 꽉쥔 주먹 포스터, 티셔츠, 슬로건으로 뒤덮었는데 이는 밀로세비치의 상징인 핏빛 주먹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더욱이 탈중심화 전략으로 벨그라드 시의 외부에서 풀뿌리 세력을 키웠고, 액티비스트를 위한 트레이닝 세션과 워크샵을 열었고 훈련 매뉴얼을 배포했다.
④ 일본 사운드데모 : 놀이와 축제로 시위문화를 탈바꿈하기
사운드 데모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 활성화된 거리 데모 형식이다. 사운드데모는 데모에 처음 참가하는 많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트럭에 음향장비와 래퍼, 가수, 디제이, 밴드를 싣고 이를 따라 드럼부대, 브라스밴드, 일본전통밴드가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탈원전을 주제로 매일 많은 수의 사람들이 데모에 참여하여 2013년에는 6만명까지 집결하기도 했다. 사운드 데모는 1970년대 전후 일본 학생운동의 전투적인 시위 방식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일본인들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 그리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참여해 자유롭게 정치적인 의견을 마음껏 표현 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시대적 맥락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액티비즘을 생성해낼 수 있다. 기본적인 액티비즘의 형식인 대중을 계몽하고 설득하는 방식은 대중을 향한 일방적인 ‘외침’으로 끝날 수 있다. 더욱이 개개인의 자율성이 공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될 때 개인은 공권력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잃게 마련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야말로 아트액티비즘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다. 미국의 액트업(ACT UP)과 시카고 예술행동, 세르비아의 오트포르(Otpor!) 그리고 일본의 사운드 데모처럼 아트액티비즘은 권력에 맞설 때의 공포와 긴장을 이완시켜 정서적 이완을 통해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되찾아주는 역할을 해낸다.
3. 한국에 아트액티비즘은 있는가 : 한국형 시위문화의 흐름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1945년 해방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긴 투쟁의 연속이었다. 한국의 시위 문화를 거칠게 1987년을 기점으로 하여 민주화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시대적 상황과 특징을 살펴보면서 한국에 정착된 비폭력평화시위의 흐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독재정권과 군부정권 하에서 시위는 그 자체로 불법 행위로 간주되었다. 반정부적 행위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위는 게릴라적으로 행해졌고 정부는 이에 경찰, 군인, 그리고 깡패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시위 자체가 개최되기 힘든 상황에서 시위가 무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시위 정보는 기밀로 유지되었고 상당히 세심한 전략과 전술을 토대로 게릴라성 시위를 펼쳤다. 시위는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단체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정책부에서는 투쟁의 목적과 근거를 제시하고, 조직부에서는 동지들을 조직하여 시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였고, 교육선전부에서는 대중에게 투쟁의 취지를 알릴 수 있도록 홍보와 교육을 맡는 등의 체계를 갖춘 단체가 주도적으로 시위를 기획하고 준비했다. 이들은 실제 시위에서 닥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감지하고 경찰병력의 예측에서 벗어나 방어벽을 우회하거나 뚫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등 시위 자체를 진행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최대한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시위는 정확한 목적성, 주도면밀한 전술, 폭력에 맞설 시위 도구의 준비 등 면밀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시위대는 폭력에 노출될 각오를 해야했으며 주동자들은 연행은 물론 징역생활까지 감수해야했다.
민주화 이후 헌법에 명시된 집회의 시위에 관한 권리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많은 시위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폭력적으로 제압되었다. 최루탄이나 백골단도 사라지고, 시위도 허용되었지만, 정부는 집회와 파업을 불법행위로 정의했다. 따라서 한국의 시위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위대와 경찰의 긴장감 높은 대치 상황은 폭력적 진압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시위대는 여전히 경찰에 맞설 조직화된 단결의 힘이 필요했으며, 경찰은 모든 병력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두세배로 에워싸며 대중과 시위대의 접촉을 막았고, 대중매체는 연일 교통혼잡 및 일상생활의 긴장감 고조 등의 문제를 운운하며 시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추겼다.
기존시위의 분위기는 일반시민이 감히 감당하기 힘든 에너지를 뿜었다. 무대에는 결의에 찬 투사적 연설과 연사들의 웅변적이고 영웅적 스피치와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활인화를 구현하는 듯한 절제된 몸짓의 문선대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무대 바로 아래에는 시위 참가 단체의 깃발들이 엄숙하게 도열해있었다. 무대를 바라보며 일렬로 늘어선 시위대는 마초적이며 투쟁적 에너지로 가득찬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목청껏 외치는 구호에 따라 하늘을 향해 꽉 쥔 주먹을 치켜드는 팔뚝질의 파도와 들끓는 듯한 민중가요의 에너지에 경도된다. 시위대는 폭발할 듯 휘몰아치는 감정으로 통일된 질서정연한 대규모의 행렬을 이룬다. 이렇게 장엄한 풍경은 단위별로 고도로 조직화되고 학습된 개개인들이 모여 단일한 공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위 문화는 독재정부의 폭력적 탄압과 공권력을 앞세운 정권의 억압에 대항하기위한 민중들의 시위 전술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시민사회의 비약적인 성장과 연이은 민주적 정권교체의 흐름에 따라 2000년대 이후는 문화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시위가 등장했다. 노동계가 여전히 기존의 시위 방식으로 그들의 이슈를 표출했다면, 여성, 교육, 환경을 주요 이슈로 하는 시민단체들은 소규모 문화행사를 개최하여 당면한 이슈에 대항했다. 이들은 거리에서 저마다의 이슈를 참여자들과 나눴고, 굿즈를 판매했으며, 사회참여적 아티스트들로 이루어진 문화행사를 치뤘다. 이렇게 시위문화가 변화하던 시점인 2002년, 2명의 중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기 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들었다. 고인에 대한 추모를 위해 촛불을 들고 모여든 사람들은 미군에 대한 항의와 처벌을 요구하며 ‘촛불추모제’를 열였다.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기존의 시위문화를 재연하기 보다는 평화로운 추모와 항의를 위한 추모제가 되기를 원했고, 이것이 한국의 비폭력 평화시위로 대표되는 촛불시위의 시작이었다.
한국의 2000년대는 문화제라는 형식을 통해서 액티비즘이 아트액티비즘으로 변모해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정부는 사안에 따라 공권력을 투입하여 시위대와 마찰을 빚는 등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유머와 풍자로 대표되는 이른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위 문화가 등장했다. 2008년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이하 2008년 광우병 반대집회) 는 건강권 운동에서 시작되어 정권퇴진 운동으로 확장된 운동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로 광화문 사거리 일대가 가득찼고, 이들은 말그대로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는 일반시민들이었다.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패러디로 정권을 비웃으며 광화문 거리일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소규모로 모여 토론을 벌였고, 흥이 날대로 난 사람들은 자신의 저항의 몸짓을 담아 거리 한 복판에서 춤판을 벌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별칭이었던 쥐박이를 상징하는 마우스를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들, 경찰에 연행되어 철창을 친 경찰차(소위 닭장차)를 타고 유치장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1박2일 닭장차 투어’를 선전하는 리플릿을 뿌리는 사람들, 경찰이 쏘는 물대포에 샤워하는 사람들 등 서울 한복판의 광활한 거리를 점거한 난장 파티는 식을 줄 몰랐다. 자율성, 익살, 재치, 패러디 등 권위주의에 대한 자유로운 풍자와 적극적인 놀이의 힘이 대규모의 인원으로 이뤄진 장기간 집회를 이끌었던 전례를 남겼다. 민주정권 집권 10년의 결과는 자율적인 개인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주체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났다. 이는 집단 지성의 힘이 웃음과 유머로 표출된 아트액티비즘의 출현을 알린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정부는 공권력을 대량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경찰은 참여자들이 비교적 적은 새벽녘에 시위대를 기습 공격하여 시위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들 중 일부는 국가로부터 고발을 당해 고초를 겪게 되었다. 권위주의적이며 독단적인 정권의 무지막지한 진압의 결과는 이후 10여년 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극단적 억압과 비민주적 사회로의 퇴행, 사회전반의 정치적 긴장과 불안, 정권에 대한 불신은 정치허무주의를 심화시켰다.
지난 몇 년간 전세계에 큰 인상을 남겼던 ‘2016년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시위(이하 2016년 촛불시위)’는 시민사회운동이 역풍을 맞아 크게 움츠러든 시기에 시작되었다. 광화문 일대를 질서 정연한 촛불로 뒤덮은 촛불의 행렬은 촛불시위가 한국형 비폭력평화시위로 완전히 뿌리내렸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성숙한 민주시민들이 이뤄낸 진일보한 저항문화의 본보기로서 평가되었다. 세간의 찬사와 민주주의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온 시민들이 보인 비폭력과 질서에 대한 강박과 집착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나는 2016년 촛불시위에서 자율성과 저항성이 충분히 발현되었는지를 묻고 싶다. 안전한 폴리스라인 안에서 경찰과 마찰을 피하며 허가받은 장소 내에서 이루어지는 시위, 즉 법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모범시민들이 이뤄낸 시위는 발전된 민주 시민의 면모를 보여준 것일까? 반대자들에게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으려는 강박적 자기검열의식과 ‘불법폭력시위’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에서 비롯된 ‘평화시위’는 아니었을까? 삶이 위협받을 때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의 불복종 저항행위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는 자율적 행위이다. 하지만 그 ‘자율성’의 잠재적인 범위를 공권력이 인정하는 한도 내로 정했다면, 2016년 촛불시위가 진정 ‘자율성’을 담보한 저항행동의 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2008년 광우병집회에서 아트액티비즘의 출현을 보았지만, 정권의 폭력적 탄압으로 시민사회운동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 결과 ‘모범적이고 온순한’ 시민의식으로 포장된 2016년 촛불시위는 겁박당한 자율성과 엄숙주의, 자기검열의식과 안전에 대한 염려로 상처받고 겁에 질린 내면의 반영이기도 했다.
4. 자율적 저항 행위로서의 아트액티비즘
현재 한국사회의 경직된 시위문화에 필요한 것은 자율성 회복을 통한 다원성의 표출이다. 겁에 질린 시민성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아트액티비즘이다. 우리는 창조적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율성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다.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저항적 예술행위로 확장된 사유의 체계와 인간 본성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질서유지라는 이름아래 인간의 사유능력과 판단능력을 제한하는 방법들이 곳곳에 있다. 시위를 제한하고 시위대를 연행하는 등의 결박행위는 사상적, 물리적, 심리적 위축을 동반한다. 시위에 참여한 개인들은 맨손으로 폭력에 맞서고 있다는 부담감과 무력감, 그리고 불법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자기 검열에 빠진다. 결국 개인의 자율성을 짓밟고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행위 전반은 국가가 개인의 주체적 의지와 자율적 사고를 전면적으로 결박하는 효과를 얻는다.
앞서 언급한 아트액티비즘의 사례들은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들이 연대와 공동체활동을 통해서 문제의식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전략과 전술을 구체화한 결과물이다. 개개인이 느끼는 부담감과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 개인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저항적 예술행위가 필요하다. 예술은 감각과 기술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이용하여 법의 담을 타고 넘을 수 있는 파급력 높은 영향력을 담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