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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얀 May 02. 2021

가계부를 소설처럼 씁니다

어떤 INFP의 가계부 작성법(feat.스프레드시트)

나는 소심한 관종이라는 INFP다. 성격 설명 중 가장 웃기고 공감간 부분이 "가계부를 소설처럼 쓰는 사람"이다. 사실 처음에 뜨끔했다. 혹시나 이 유형의 사람은 가계부의 본질을 못 지키는 인간인 건가? 가계부의 기본이 예산을 수립하고 이에 맞는 지출을 엄격하게 통제해서 절약을 달성하는 것이라면, INFP들은 돈을 아끼기보다는 왜 그돈을 썼는지 디테일을 구구절절히 적기 때문이 아닐까. 예컨데 애호박이 990원인지까지는 기록할 필요는 없지만, 애호박이 싸서 좋았다고 적어놓는 것처럼. 또, 때로 예산이 초과되면 변명도 잔뜩 늘어놓나보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왜 이 소비를 하는지 있었는지 돌이켜 생각보는 사람"이란 뜻으로 좋게 해석하기로 했다.


사실은 나는 가계부에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맞다. 가계부엔 이마트에서 장본 재료값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쓴다. 나는 가계부를 구글 스프레드시트(구글 드라이브에서 쓸 수 있는 엑셀과 유사한 프로그램)로 쓰는데, 여기엔 "적요"라는 항목이 있다. 나는 여기 그 소비에 관한 일화를 시시콜콜하게 적어둔다. 애호박을 990원에 샀는지 1290원에 샀는지 변동폭은 중요하니까. 3년쯤 지난 요즘은 귀찮아져서 정확한 금액은 안 쓰고 지나갈때도 있다.

12월 가계부 예시. 간식(빵)이 왜이렇게 많은가.


항목을 적을 때 계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날짜별 예산은 잡지 않는다. 대신 카테고리를 기반으로 수식을 걸어두어 계산하고(sumifs 만세!)), 가끔 용돈을 쓴 항목에 대해서 트래킹하는 열이 있다.(권/김은 각각 나와 배우자를 가리킨다.) 유달리 지출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게 있다면 B열의 항목명을 모아 따로 계산하기도 한다. 예컨데 "둘이서 간식(빵)" 항목명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4분기에 갈 곳도 없으니 주변에서 빵을 사먹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러니 빵 지출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 따로 트래킹해서 관리하고 있다. 이러다 관리 주의대상에서 해제하는 경우도 있다. 가끔 카테고리를 쪼개거나 통합하거나 이동할 때가 있다. 예컨데 의류/미용 항목에는 미용실 비용과 의류 구매, 샴푸, 칫솔, 치약, 비누등이 혼재되어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를 의류/잡화, 미용 항목으로 분류했다.


나도 결혼 이전엔 소비내역을 자세히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왜 이렇게 없나 싶을때만 쓴 돈을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돈을 쓴게 전부 과거의 나였구나 하고 자학하는 사람. 하지만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사용하는 돈을 트래킹했고, 2인 가구가 되면서 이 가계부 형식을 만들었다. 해가 가도 형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항목을 조금씩 고치긴 했지만, 지금도 크게 형식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달 한 달 시트를 쌓아가다보면 "월간 소비 패턴을 계산할 수 있다. 달별로 지출내역이 판이한 경조사, 내구재 등은 분기별로 계상한다.

이후 함수를 요리조리 조합해 월간 항목은 차트로 그려둔다. 작년 8월에 식비가 천장을 뚫었는데, 아마 코로나 재택+마켓컬리배송때문인듯..

분기지출을 따지는 경우 큰 소비건에 대해 메모 기능을 사용해 달아둔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가계부를 사용해 어떤 일을 했는지 돌이켜본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며 기억력이 나빠졌는데, 이럴때 도움을 받는다. 예컨데 이번에 전세보증보험 가입할 때, 언제쯤 전세 잔금을 치렀나 돌이켜볼 수 있었다. 또 2018년에 가려다 취소한 여행은 얼마짜리 티켓이었는지 돌이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가계부를 일기로 쓰니 내가 그때 돈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회고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렇게 하다보면 돈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있어 좋다. 결혼 전, 외벌이 확정을 앞두고 나는 겁이 나서 "2인 가계부 신혼부부"등을 검색했다. 그리고 겁이 났다. 관리비는 대체 왜이렇게 비싸고, 얼마나 드는게 많이 쓰는지 감도 안 와서 더 겁이 났다. 사람들도 다들 비슷했는지, 요즘은 남의 가계부에 대한 컨텐츠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영수증 팟캐스트(공중파까지 진출했지만 진행자 리스크로 망해버렸지만)를 시초로, 가계부 브이로그

들이 자주 눈에 띈다. 확실히,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면 남의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가계부를 3년째 쓴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 소비에 대한 정답은 검색만 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소비란 사람의 사고방식을 담고 있어서, 정말 천차만별이었다. 남들의 기록을 참고하면 각오는 할 수 있지만 결국 정답은 내가 가계부를 쓴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책을 살 때 행복하지만 너무 많이 사면 후회하기도 하고, 옷을 살 때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한동안은 반찬을 시켜먹었지만 요리해 먹는게 훨씬 좋았다. 누군가는 운동 없이 살 수 없을테고, 누군가는 옷에 멋을 낼 테다. 반찬을 시켜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차없이는 못 사는 사람도 있겠지.


그래서 나는 가계부를 일기처럼 쓰는 것을 당신에게도 권해본다. 물론 귀찮을수도 있지만 억지로 쓰고싶은 말이 많은데 말을 아끼는것보단 훨씬 낫다. 소비에 대한 생각을 적고 이를 돌이켜보면, 내가 어떤 소비를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예산관리 안 되는 자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대단한 팁보다는 가계부를 통해 깨달은 자기중심적인 소회나 나누고 끝을 낼까 한다.


하나, 옷과 책은 환금성이 꽝이다. 2-3만원의 옷을 싸다고 여러벌 사니 100만원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데 정작 내가 무슨 옷이 있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난다. 처분도 곤란하다. 당근 마켓에 보면 그렇게 옷이 헐값이 나오는데도 안 팔린다.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신간이 아니면 돈을 많이 못 받는다.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15000원 짜리 책도 3000원이면 후하게 쳐주는거고, 책이 조금이라도 상하면 퇴짜를 놓는다. 그래서 요즘은 전자책은 영구소장용으로 사고, 종이책을 살 때는 아예 지인들에게 나눠주며 영업할 책들이려니 하고 사도록 신중하게 포트폴리오를 짜둔다.


둘, 내구재는 영원하다. 우리집 책상은 하나라 배우자와 영역다툼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책상을 하나 더 샀다. 재택근무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고, 서로의 작업 공간은 소중하니까. 그리고 좋은 내구재는 팔기도 좋다. 맥북이 몇 년이 지나도 중고시장에서 거래가 되는것처럼 말이다. 맥북 중고를 보다보면 6년 지난 노트북도 절찬리에 팔리기도 하니 말이다. 작년에는 식기세척기와 음식물건조기를 샀는데, 덕분에 작년 4분기에 외식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셋, 경험재의 무제한 소비를 경계하자. 우리는 내구재의 반대말을 "라쿤재"로 부르고 있다. 쓰고 없어질 돈이라는 의미로. 이 말의 의미는 아래 짤에서 따왔는데, 라쿤이 과일을 씻어먹듯 솜사탕을 씻어먹다가 다 물에 흘려보내고 나라잃은 표정이 된 사진이다. 예컨데 여행, 호캉스, 좋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등이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물건보다 경험이다"라고 라쿤재를 추구했는데, 그러다보니 통장잔고가 살살 녹았는지 어디로 돈이 샜나 싶다. 예컨데 결혼할때 나는 꽃장식과 식에 신경을 썼고, 배우자는 전동식 책상과 침대를 골랐는데 꽃장식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전동식 책상은 영원했다.


이 움짤의 마지막 모습은 정말 황망함 그자체다. 귀엽고 가엾어라..

넷, 잘 고민하고 하는 기부와 후원은 기분이 정말 좋다. 무작정 사다가는 거지꼴 못 면하겠지만, 좋은 컨텐츠에 대한 후원을 하면 마음이 많이 뿌듯해진다. 내가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의 콘텐츠를 후원하거나 뜻을 보태면 얼마나 후련하게요? 그러고보니 최근 후원한 책도 코로나 시국의 가계부를 다루고 있다. 대외활동으로 알게 된 지인이 작성한 코로나 월렛이라는 책이다. 맞벌이 직장인 2인가구가 재택을 실행하며 소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시시콜콜한 TMI가 돋보인다(재밌게 잘 읽었다는 뜻이다. 나는 TMI읽는걸 좋아하니까). 이 책의 리뷰도 다음에 써두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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