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무서웠던 경험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 가는 길이 편치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비행기에는 30명쯤 되는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몇몇 여학생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무지막지하게 컸다.
수학여행 가면서 신나는 건 경험해봐서 잘 알지만, 공공장소에서 저렇게까지 시끄럽게 해도 되나? 이륙 전에 승무원이 가서 조용히 시킬 줄 알았다. 그런데 승무원들은 한 마디도 안 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학생들 옆에 앉아 있던 남자는 내 뒤로 좌석을 옮길 정도였다.
그런데 누구 하나 눈치를 주거나 조용히 시키지 않았다.
"골이 다 울리네."
고여사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길래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말했다.
“저기요, 저 학생들 너무 시끄럽지 않아요? 목소리 좀 낮춰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 못해요. 그렇게 시끄러우면 니가 가서 직접 얘기하든가.”
승무원은 내게 짜증을 내고 가버렸다. 목소가 저 데시벨이면 기내 난동 수준인데, 한 마디도 안 한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내가 직접 가서 얘기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그 나라 사람도 아닌 여행자니까.
내 옆에 앉은 동남아시아계 아주머니가 참다 참다 “저기요 숙녀들 제발 좀!”이라고 외친 후에야 목소리가 약간 잦아들었다. 아주 약간.
조금 조용해졌나 했더니 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승무원이 동료들과 더 큰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사면초가로구나. 학생들이 또 떠들기 시작했다.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소음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비행기가 착륙했다.
“엄마, 드디어 라스베이거스야! 우리 여기서 돈 왕창 따가자!”
나는 애써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출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얼굴에 훅 끼치는 후끈한 공기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피곤했다.
“아 짜증나. 대체 올 거야 말 거야.”
리프트 앱에서 택시를 잡은 지 30분이 지났는데, 올 기미가 안 보였다. 택시는 지도 위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기사가 길을 못 찾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공항 근처에서 운행하는 택신데 공항 택시 플랫폼을 못 찾겠는가? 콜을 잡긴 했는데 막상 목적지를 보니 태우기 싫어서 시간을 끌다가 우리 쪽에서 취소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취소 안 하고 이만큼 기다렸으면 와야 하지 않나?
우리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그 많은 사람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학생들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 고여사와 나만 남겨져 있었다. 9월이었지만 라스베이거스는 후텁지근했다. 등 뒤로 땀이 흘렀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른 택시 잡아봐.”
“가만있어봐 엄마.”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택시도 10분 동안 기다려서 겨우 잡은 거였다.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보자. 마침내 기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고 있는 거예요?”
“아 네, 네. 가고 있어요. 길을 잃었었어요. 미안. 가는 중입니다.”
“알겠어요. 잠시 후에 봐요. 안녕.”
얼른 호텔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다 왔다던 택시는 또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린 지 30분이 넘어서야 드디어 택시가 도착했다. 캐리어 두 개를 트렁크에 넣고 뒷좌석에 앉았다.
운전자는 라틴계 남자로,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룸미러로 날 쳐다보는 눈빛이 쌔했다.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봤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 뒤 동승자가 있다면서 누군가를 태웠다. 젊은 백인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백인 남자가 차 문을 힘차게 닫았다.
“자, 가 봅시다!”
차가 출발하고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백인 남자는 LA 오렌지 카운티에서 왔으며, 이번 주말 친구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둘이 대화하는 중에도 기사는 룸미러로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조금 불안해졌다. 왜 그러지? 내가 취소 안 하고 계속 성가시게 해서 짜증난 건가?
공항을 벗어나자 황량한 주변 풍경이 보였다. 불안한 마음에 리프트 앱 지도를 계속해서 새로고침 하고 있었다.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호텔로 가는 루트를 벗어나 있었다. 뭐지? 우리 호텔 가는 길이 아닌데?
백인 승객이 말했다.
“그런데 왜 이 길로 가요?”
“아.. 계속 지도를 보고 있었어요?”
“당연하죠.”
“저 둘보다 당신 먼저 데려다주려고요.”
“오 노노. 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들이 먼저 탔으니 먼저 내려줘야죠.”
“아니에요. 당신부터 내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기사가 룸미러로 나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왜 저 사람을 먼저 내려줘? 내려주고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갑자기 10년도 더 전에 본 영화 <데스프루프>가 생각났다. 싸이코 살인마가 여자들을 차에 태우고 살인을 저지르는 그 영화. 서부, 차, 룸미러로 노려보는 시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떡하지? 엄마랑 타지에서 험한 꼴 당하면. 미국은 총도 있잖아. 그냥 공항에서 다른 택시를 잡을걸 그랬나? 조금 비싸더라도 공항에 상주하는 택시를 잡을걸 그랬다.
‘제발 무사히 도착하게만 해주세요.’
그 사이 택시는 호텔 가는 경로에서 꽤 멀리 벗어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신고를 해야 하나? 그런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신고가 되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백인 오빠가 말했다. 멋지게.
“어 그러지 마세요. 저쪽 팀 먼저 내려줍시다.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건 안 돼요.”
“헤이 브로, 진짜 그러길 원해요?”
“진심으로요.”
운전기사는 조금 더 가다가 우회전했다. 마침내 리프트 앱의 차 아이콘은 우리 호텔로 가는 경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침내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전까지 모든 리프트 운전자가 도착 후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준 것과 다르게, 이 사람은 트렁크 오픈 버튼을 띡 누르고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이드 미러로 날 쳐다보면서.
나는 캐리어 두 개를 꺼내 땅에 놓고 트렁크를 쾅 닫았다.
“가세요 안녕!”
십년감수했다. 엄마는 안 무서웠으려나?
“엄마 무섭지 않았어? 운전기사가 거울로 자꾸 나 쳐다보고... 다른 길로 가고. 나 여기서 스릴러 영화 찍는 줄 알았잖아.”
“뭐가? 난 몰라. 택시 안이 시원해서 좋던데? 얼른 들어가자.”
고여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평소 공포 영화를 안 봐서 그런가, 고여사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다. 내가 후덜덜할 동안 고여사는 태평하게 에어컨 바람을 즐기고 있던 거였다. 딸 없으면 어쩔 뻔했어.
누군가는 망상이라고 했지만, 난 타지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날로 썰을 풀고 다닌다. 여행길에서는 안전이 제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