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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tabook Dec 02. 2022

엄마의 뒷모습은 추억을 부른다 _에메랄드 레이크(1)

30년 전, 다섯 살과 서른다섯 살의 우리

재스퍼에서의 마지막 날. 이제 에메랄드 호수로 향할 시간이었다. 오늘의 숙소는 에메랄드 호수 옆 로지(lodge)였다. 1박에 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예약한 곳이다.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보내는 고요한 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여사와 아침을 간단히 먹고 일찍 숙소를 나섰다. 출발 전 마트에 들러 차에서 먹을 간식을 샀다. 고여사는 딱 하나 골랐다. 바로 그녀의 최애 커피로 등극한 스타벅스 프라푸치노 병 커피.


"엄마 스타벅스 커피에 꽂혔구나. 나 한국 가서 그거 보면 엄마랑 여행한 거 생각날 것 같아."


고여사가 꽂힌 음료가 한국에서 팔아서 다행이었다. 여행 후반기에 접어드니 문득 남은 시간이 아쉬워졌다. 14박 15일이면 꽤 길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에메랄드 호수 가는 길에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첫 목적지는 애써배스카 폭포(Athabasca Falls)였다. 숙소에서 남쪽으로 3시간쯤 달려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니 사람들이 모여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까마귀였다. 덩치가 좀 있는 이 새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새야 새야 까만 새야 차 지붕에 앉지 마라(?)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어째 더 추웠다. 나는 한국에서 우람이한테 빌려온 침낭을 꺼냈다. 캠핑과 등산 매니아인 우람이는 보유한 17개의 패딩 중 2개를 빌려주었다. 역시 돈이랑 장비 많은 친구가 최고야.


고여사는 가방에서 아이젠을 꺼냈다. 울 엄마도 등산 좀 다녀본 아주머니답네.  


"엄마, 아이젠이 필요할까?"


"혹시 모르잖아. 무겁지도 않은데 가져가자."


역시 엄마 말을 들어야 탈이 없다. 폭포 가는 길은 초반부터 길이 미끄러웠다. 나무들이 키가 커서 해가 안 드는지, 며칠 전 온 눈이 얼어 있었다. 고여사와 나는 아이젠을 운동화에 장착했다.


"오우, 완전 신박한 아이템인데! 어디서 났어요?"


한 외국인이 고여사와 내 아이젠을 보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한국에서 챙겨가지고 왔어요."


"와우, 정말 유용해 보이는군요. 쏘쿨~"


외국 사람들은 아이젠을 일상적으로 안 쓰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고여사와 내 발에 쏠렸다.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 곁을 지나 큰 걸음으로 경사로를 단숨에 올라갔다. 부러워하면 뽐내줘야지.  


폭포까지의 길은 숲길이었다. 하이킹 초입까지 많던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 숲속은 조용했다. 사방에는 눈과 고드름, 키 큰 나무들만 있었다.


핸드폰을 들이대면 "사진 찍지 마~" 하던 엄마도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물론, 고여사는 여기서도 천천히 걷지 않았다. 나를 두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엄마 안 힘들어?"


"응 괜찮아. 딸, 미국에선 예쁜 경치가 없었잖아. 미국에선 멋있다, 웅장하다, 그러기만 했지 예쁘지는 않았잖아. 근데 여기는 가는 곳마다 다 예쁘다. 우리 이번 여행하면서 이렇게 예쁜 거 봤어?"


"그러게. 근데 엄마 예쁜 거 봤잖아."


"뭐?


"내 얼굴."


"야, 여기 표지판에 뭐라고 쓰여 있냐. 2km 더 갈 수 있다고 되어 있네. 가면 너무 멀까?"


역시 대답을 안 하네. 좋아, 다시 한번!


"괜찮아 2km 더 가자. 아 근데 엄마, 이쁜 거 봤잖아. 내 얼굴~"


"여기는 뭐라고 쓰여 있는 거니? 무슨 폭포야?"


"...Sunwapta Falls. 선왑타 폭포네."


상대도 안 해주네 쳇. 남의 엄마들은 자기 자식이 최고로 이쁘다, 천재다 추켜세우는데... 고여사는 얄짤 없다. 저번엔 누구 집 딸이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하길래 "엄마 딸이랑 그 집 딸이랑 누가 더 예쁘냐"라고 물었더니, "엄마 곤란하게 하지 마. 거짓말도 못하는데."라고 대답했다. 네, 그 집 딸이 더 예쁘다는 거네요. 참 정직한 분. 청렴결백(?)한 것도 좋지만, 가끔은 무작정 "내 새끼가 제일이다!" 이래도 괜찮은데 말이에요.


숲길을 조금 더 걸으니 폭포가 나왔다. 이 추운 날씨에도 폭포는 얼지 않았다.


"와 멋지다! 물 콸콸 쏟아지는 거 봐!"


"진짜 장관이다."



폭포 투어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미적지근한 길이의 하이킹이 아쉬워 우리는 20분 정도 차를 타고 내려가 선왑타 폭포(Sunwapta Falls)에도 들렀다.


오전에는 날씨가 흐렸는데 여기 도착하니 해가 쨍쨍해졌다. 저 위 폭포에서부터 흘러온 물이 반짝반짝 빛났다. 역시 날씨가 좋으니 풍경이 훨씬 더 멋졌다. 이곳도 하이킹하기에 좋은 코스였다. 눈은 쌓여 있었지만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걷기 좋았다. 중간에 긴 나무다리를 건너 폭포에 다다랐다.


하늘과 산과 폭포와 눈


겨울 폭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폭포 근처까지 와도 물소리가 나지 않아서 좀 작은 폭포인가 했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힘차게 흐르는 물과 검은 바위, 흰 눈이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폭포에서 떨어진 푸른 물은 계곡을 따라 흘러 흘러 내려갔다.


폭포도 멋졌지만 오고 가는 길이 정말 운치 있었다. 아까 애써배스카 폭포 가는 길도 멋졌지만, 이곳의 나무들은 키가 훨씬 더 컸다. 사실 커다란 나무들을 보고 싶어서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가고 싶었던 건데, 이곳의 나무들은 줄기가 날씬하긴 하지만 키는 못지않게 큰 것 같았다. 빨강색 패딩을 입은 고여사의 뒷모습과 키 큰 나무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씩씩하게 걷는 고여사의 뒷모습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났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유치원 버스 시간이 간당간당한 날이면, 고여사는 내 손을 잡고 우다다 뛰었다. 처음엔 나도 기를 쓰고 뛰었지만 꼬맹이가 따라가기엔 당연히 부족했다. 중간부터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아 고여사 손에 들려 질질 끌려갔다.


그때 우리 고여사는 팔 힘도 세고 달리기도 빨랐다. 초등학교 때 반에서 키는 제일 작아도 6년 내내 계주 선수로 뛰었다는데, 삼십 대에도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애초 이 여행은 고여사가 붉은 단풍을 보면서, 지나간 세월을 떠올리며 눈물 맺히는 컨셉으로 기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여사는 웃으며 즐겁고 다녔고, 눈물이 고이는 건 오히려 나였다. 우리 고여사 키가 왜 이렇게 줄어들었지? 지치지 않고 걷던 사람이 왜 이리 숨을 몰아쉬지? 우리 고여사 언제 이렇게 나이 들었지?


하지만 이는 '엄마가 한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 늙었구나' 하는 아쉬움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멋지게 산 그녀가 이제 삶의 후반부에 들어섰다는 데서 오는 서글픔이었다.


고여사도 여느 엄마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한 면도 있다. 하지만 엄마라는 역할만으로 살지 않았다. 자기 삶에서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항상 꿈꾸며 살았다. 끝없이 뛰고 싶어서 마라톤도 하고,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 여행도 많이 했다. 책도 많이 읽고, 아마추어 볼링 선수도 하고, 영어도 공부하고, 합창단에서 노래도 불렀다. 무엇보다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씩씩하게 이겨내고 10년 후 완치 판정까지 받았다.


나는 '엄마=희생과 사랑'의 등식으로 보지 않는다. 고여사를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본다. 고여사 또한 자식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 모든 걸 다 해주는 대신, 각각 독립된 존재로 인정해주고 스스로를 지키며 사는 법을 터득하게 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고여사가 늘 하던 말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너야. 그러니까 너 자신을 최고로 아껴주고 사랑해야 해. 다른 사람은 그다음이야. 알았지?"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라. 어쩌면 내향형 인간 고여사와 외향형 인간인 내가 죽이 잘 맞는 건, 삶을 사랑하고 열정이 많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마음에 있는 모든 얘기를 터놓고 절친처럼 지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두 폭포를 보고 하이킹을 하니 어느덧 오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에메랄드 호수 로지로 갈 시간. 숙소까지는 멀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숙소 건물까지는 나무다리를 걸어서 건너야 했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여행객이 캐리어를 끌고 나무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어머 딸, 호수 너무 예쁘지 않니?"


나무다리는 에메랄드 호수를 가로질렀다. 물이 에메랄드 빛이라고 이름을 에메랄드 레이크라고 짓다니. 너무 정직한 네이밍이었지만, 직접 보니 그럴 만하다고 느껴졌다. 나무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모두 경치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누구지? 고여사가 아는 사람 만났나? 나무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던 동양인들이 우리를 돌아봤다. 엇, 재스퍼 호스텔에서 본 목사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아니 이런 우연이 있나. 저희는 어제 호스텔에서 나와서 이제 뵐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데서 마주치네요."


"그러게요, 인연인가 봐요. 오늘 숙소가 여기세요?"


"아뇨 저희는 밴프에 숙소가 있어요. 여긴 잠시 구경 온 건데, 이렇게 또 만나니 신기하네요."


"저희는 오늘 여기 묵거든요. 우리 딸이 조금 무리해서 50만 원짜리 방을 예약했어요! 호호."


"하하 좋으시겠어요."


우리 고여사 님, 또 50만 원 얘기한다. 맨날 저렴한 숙소만 잡아서 아쉬우셨나? 라스베이거스의 허름한 호텔이 생각나며 약간 뜨끔했다.


"그럼 따님이랑 잘 놀다 가세요. 다음에 만나면 3번 만나는 거니, 진짜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밥 한번 먹어요."


"좋죠. 즐거운 여행 되세요."


우리는 목사님 부부와 인사하고 체크인을 하러 들어갔다. 방을 안내받고 2개의 바우처와 안내 팜플렛들, 방 열쇠를 받아서 나왔다. 손에 짐이 많아서 바우처랑 팜플렛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여전히 무거운 고여사의 주황색 캐리어를 끌고 우리 방이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오솔길을 따라 로지들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10월이지만 벌써 곳곳에 크리스마스 오너먼트가 걸려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곧이구나.


오늘 숙소는 얼마나 좋을까? 설레는 맘으로 오솔길을 걸으며 우리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참고로, 여행 끝날 때까지 목사님 부부와의 세 번째 만남은 없었다)


활짝 웃으니 너무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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