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게 살아야 인생이 특별히 행복할까?
어릴 적 김포공항 근처에 살았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 김포공항이 해외 항공편을 모두 책임지던 시절. 비행기가 뜨는 걸 보면 너무 설렜다.
"엄마, 나 비행기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아?”
“글쎄, 무슨 느낌일까?”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가 막 쏴아아아- 해."
"정말? 통했다. 엄마도 그런데. 우리 나중에 여행 많이 다니자."
하늘로 상승하는 비행기를 보면, 당장 저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난 떠나는 행위 자체에 선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멀리. 역마살이었나? 역마살이 있는 초딩이라…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많이 놀러다녔다. 낚시와 캠핑을 좋아하는 아빠 때문에. 아빤 굉장히 즉흥적이었다. 멀쩡히 집에서 TV 보다가 꽂히면, 짐을 챙겨 우리를 차에 태우고 어디로든 출발했다. 하지만 비행기는 즉흥적으로 탈 수 없는 법. 비행기가 뜨는 걸 보면서 언젠가는...하며 먼 미래를 기약해야 했다.
그로부터 약 25년 후. 우리 모녀는 샌프란시스코 공항 수화물 찾는 곳에 있었다. 고여사는 서 있고 나는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 너무 피곤해. 이제 비행기에서 잠을 잘 못자겠어. 기내식도 별로지 않았어?”
"응. 엄마도 비행기 타는 거 좋아하는데 이제 좀 힘드네."
비행기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던 나, 최소 4시간 이상 날아가야 진정 놀러가는 기분이 든다고 했던 고여사. 세월은 어쩔 수 없나보다. 하긴, 아무리 인생은 60부터라 해도, 65세에 체력이 청춘 같을 수 있나. 그런데 35세 청춘인 나는 왜 힘든걸까?
뱅글뱅글 돌던 컨베이어 벨트에 고여사의 거대한 주황색 캐리어가 등장했다. 손잡이를 쥐고 내리다가 하마터면 끌려가서 넘어질 뻔했다. 다시 두 손으로 꽉 부여잡고 겨우 내렸다.
“엄마 이거 진짜 왜 이렇게 무거워! 아주 돌덩이야!”
고여사의 거대한 캐리어는 내가, 내 기내용 캐리어는 고여사가 끌었다. 미리 사놓은 유심칩을 핸드폰에 끼고 lyft 앱을 열었다. 리프트는 우버 같은 서비스로, 우버보다 훨씬 저렴했다. 공항에서 리프트를 잡아 타고 숙소로 갔다. 숙소는 샌프란시스코 남쪽 오클랜드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선 3박 4일 있을 예정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거실과 부엌을 쉐어하고 개인방에서 지내는 곳이었다. 방에는 심플하게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만 있었다. 고여사가 주황색 캐리어를 바닥에 눕혀 지퍼를 열었다.
"엄마! 이게 다 뭐야??"
고여사의 짐 싸는 실력은 어릴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끝판왕이었다. 큰 캐리어에 담긴 다양한 부피와 모양의 물건이 조금의 틈도 없이 꽉 들어맞아 있었다. 마치 테트리스 고수처럼. 고여사는 이렇게 정리하는 데서 쾌감을 얻는 게 틀림없다. 반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같이 살 때 고여사는 내 방만 보면 혈압이 올라간다고 했다. 저혈압이었던 고여사의 혈압이 정상으로 올라간 건 내 덕분일 것이니.
고여사의 예술적 짐싸기는 식량 파트에서 꽃을 피웠다. 컵라면, 햇반, 김, 김치, 진미채, 멸치볶음, 볶음 고추장, 맥심 커피믹스... 컵라면은 분해되어 면과 스프는 각각 3개씩 지퍼백에, 컵라면 컵들은 차곡차곡 겹쳐져 있었다. 라면 끓이는 휴대용 버너까지, 이 정도면 세계일주도 가능해 보였다.
"세상에. 이걸 누가 다 먹어? 생각보다 더 심하네. 이러니까 내가 캐리어 드느라 어깨 빠질 뻔 했지. 엄마 맨날 밥이랑 컵라면만 먹을 거야?”
"너, 15박 16일 생각보다 길다. 먹다가 못 먹으면 누구 주고 오면 되지. 걱정도 팔자다 얘.”
"에휴... 알았어. 엄마, 해 지기 전에 나가서 동네 둘러보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마을은 한적했다. 샌프란시스코 숙소비가 너무 비싼 탓에 오클랜드에 숙소를 잡았지만, 잘한 것 같았다. 복잡한 다운타운보다 조용한 마을이 낫지. 길가에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집집마다 창문으로 노란 불빛이 흘러나왔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안으로 저녁 준비하는 부부가 보였다. 시간이 꽤 이른데 다들 퇴근하고 저녁 준비하는구나. 여유로워 보였다.
"엄마, 한국 너무 답답하지 않아? 맨날 쫓기듯 살고. 나 예전에 미국 교환학생 갔을 때 있잖아, 언제든지 미국에 다시 올 수 있을 줄 알았어. 어쩜 취업해서 거기 살지 않을까 했는데. 현실은 그냥 한국에 죽치고 있네."
"그러게, 나도 너 외국 나가서 살 줄 알았는데. 엄마도 그 덕에 해외 많이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안 됐네."
"엄마, 한국이 세계에서 중력이 제일 센 곳이야. 일단 한번 발 붙이니까 못 나가겠더라고."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난 어려서부터 외국 생활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 능력을 키워 해외로 출장을 많이 다니거나 해외에서 살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외국에서 단기간 머물 기회는 있었지만 아예 터전을 잡고 몇 년이든 살아볼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하긴, 선망이 있는 것 치고 사실 별로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전부였지. 이쯤 되면 내 무의식은 그냥 한국에 머무르는 걸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너, 그래도 한국이 살기 제일 편하고 재밌는 거 알지? 해외에 살아봐야 잠깐이나 좋지, 막상 살게 되면 불편할걸?
그러게. 어쩜 나는 해외 생활이 아닌 새로움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꿈꾸던 비일상이 일상이 되면 또 지루해지겠지?
New things get old just like the old things did.
새로운 것들은 낡아지지. 낡은 것들이 그랬듯.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 나오는 대사다. 늘 새로운 것, 특별한 것을 찾아 헤메는 내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말이었다. 어쩌면 비일상을 자주 즐기는 게 나에겐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65세 엄마와 단 둘이 하는 여행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