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로에서 충고에 대처하는 법
영화 곡성에선 주인공이 집에 들어갈지 말지. 앞에 있는 무명의 말을 들을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딸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인공 종구는 조언을 건네는 무명의 정체를 묻고, 그 말의 진위를 의심해본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는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긴 했다.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기로가 있다. 삶이란게 360도 펼쳐진 종횡무진의 광야처럼 느껴질때도 있다. 그치만 일반적으로 사회가 주는 상황에 맞춰서 자신을 굽히게 된다.
다음 번의 행보를 걸어가려다 보면, 말문이 막히고 숨이 답답해진다. 마치 한 발자국을 잘못 내딛을 때 절벽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처럼. 한번의 실수가 지옥도를 불러오기도 한다. 지금 고백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섰을 때면, 숨이 텁텁해지는 것이다.
어떤 복학생이 과에서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남자가 여자에게 들이대는게 맞을까. 주변에서는 무조건 들이대야 한다. 그게 젊음이고 청춘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 입장이 되어보면 또, 그렇게 고백하고 사귀자고 했다가 차이면, 그 뒤엔 어떻게 볼건데 하는 절절함이 남아있다
곡성의 종구는 사랑하는 딸이 죽느냐 사느냐. 온가족이 생존하느냐 악령에게 처참한 최후를 맞을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있다. 이 때 주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이 때 잘해야 한다,
우린 절박한 상황에 놓였을 때 흔히 누구의 말을 들어야할 지 고민하게 된다. 사실, 타고 들어가면 누구의 말도 신뢰할 순 없다. 과학적인 논리나 데이터조차도 수많은 오류와 오해로 쌓여있고. 말하는 화자의 권위조차, 말의 내용에 대해 절대적인 증명자가 될 수 없다. 이 부분을 오해한다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가 답답해진다.
이렇게 기로에 설때, 가장 필요한건 평소에 가지고 있던 판단적 가치관이다. 아예? 판단을 할 수 없을만큼 급박하고 위태롭다면, 그리고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면, 주저앉아 울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든 하나를 고르고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만 한다.
곡성의 주인공 종구를 보면서 그가 하고 있는 일들이 바보같지만은 않았다. 나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나 자신의 단편을 그 안에서 보았다. 결과론적으로 비극이냐 희극이냐는 기로에서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책임지고 감수해야하는 주체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그 누구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삶을 망쳐버리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