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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계란 Jul 22. 2019

23. 실낱같은 희망

돌이켜보면 대학생활은 딱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이 좋았다. 그 한 가지가 과 활동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공에 대한 흥미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번 당 삼백여 명이 넘는 경영학과 혹은 공대의 몇몇 전공의 경우, 과 활동을 하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았겠지만, 겨우 30여 명이 한 학년인 학과에서 학과 활동이란 무척 중요했다. 더군다나, 전공 특성상, 혼자 하는 활동보다는 5~6명이 해야 하는 활동이 많고, 졸업논문도 여러 명이 함께 써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학부에서 학과로 전공이 나눠진 2학년부터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물론 나보다 먼저 학과에 1년 먼저 들어온 친구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같이 수업 듣는 동기들과의 관계는 쉽지 않았다. 물론 학과 밖에서, 크게는 학교 밖에서 너무나 많은 좋은 사람들과 친구들을 만났기에 인간관계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혼자 공부하거나 숙제할 수 있는 한계가 많았던 전공 수업을 듣는 것이 굉장히 괴로웠다. 잘 기억에 남지 않지만, 항상 그룹을 정해야 할 때는 그룹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뭉쳐 그룹이 된 것이 다반사였다. 과 활동은 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자 했던 욕심이 많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더욱 나를 외롭게 했고, 시간이 갈수록, 학년이 올라갈수록 과 활동을 겉도는 이가 되었고,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다른 곳에서 수업 듣고, 교직이수까지 하다 보니 완전히 멀어져 버렸었다. 그래서일까 학부를 다닐 때, 단 한 번도 전공이 좋은 적이 없었고, 전공수업이 너무 가기 싫어서 머릿속에 온갖 나쁜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졸업 한두 달 전에 누군가 내게 그랬었다. 과 동기들이 나를 "아싸"시킨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아싸"시킨 것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나의 욕심이 그 지경까지 만들지 않았을까. 석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 대학원에서는 Graduate assistantship을 받았기 때문에 내게 석사와 박사들이 모여 있는 오피스에 자리를 하나 주었다. 그곳은 참 낯설고 어려운 곳이었다. 오피스 안에 있는 30여 명 학생들 중, 50%는 랩이나 컴퓨터로 하는 일 때문에 오피스에서 본 적이 없었다. 몇몇은 하루 종일 오피스에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연구에 참 바빠 보였다. 나는 묵묵히 앉아있었지만, 무엇을 할지 잘 몰랐었고, 어느 누구 하나 내가 무엇을 하든, 집에 가든, 아무것도 하지 않든 관여하지 않았다. 하루빨리 지도교수를 찾아 논문을 시작해야 했었지만, 그 또한 쉬이 결정한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솔직히 마음속으로 S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염두에 두고 입학했기 때문에, Advanced marine geology는 내게 너무 중요한 과목이었다. 하지만, 항상 모든 과제에서 나는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고, 거의 항상 꼴찌였다. 처음에는 "다음번에는 더 잘하자" 생각했지만, 역시나 두 번째든, 세 번째는 아무리 시간을 투자했으나 70점에도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다. 그 점수를 본 어느 날, 앉은자리에서 눈물을 주르륵 흐르며 통곡했다. 잠을 잘 때마다, 가르치던 학생들이 나오고, 일했던 학교가 나오고, 왜 나는 H1B(워킹) 비자가 되지 않았을까 묻고 또 묻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수업 과제 중 일부로 내가 처음으로 쓴 프로포절에 S 교수님께서는 "W, Unfortunately a large part of this is copied from the papers you are citing or internet sources. See attached image. This is plagiarism and represents academic misconduct. Please do not do this again, because I will need to give you zero points on the assignment. Even if you provide a citation, it is still not okay to copy. I know that writing is difficult for you, but this will not help you to become a better writer. You can visit the University's Center for Writing Excellence to work on the improvement of you writing and for moral support. It is located in B Hall and they do a fabulous job.Try it!" 표절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알려주셨다. 중간고사도 60점, 중간고사만큼 중요한 프로로 절도 점수를 받지 못하니,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이번 학기를 마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역시 너무 쉽게 쉽게 척척 잘 풀려서 들어왔다고 했더니만, 들어와서 이렇게 삐걱거릴 줄이야. 하지만, 정말 운명이 이끄는 길이었을까? 도와주는 구원의 손길이 여기저기 있었다. 물론, 개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구원의 손길을 누군가 먼저 내밀지는 않는다는 것은 기본이었다. 당연히 내가 먼저 매달리고, 부탁해야만 했다. 물론 도와주지 않는 미국 사람들도 있었으나, 도와주려는 손길도 많았다.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인 미국 수업에는 "더 잘해야지"라는 마음보다는 각자가 잘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큰 듯 보였다. 물론 경쟁의식을 같은 몇몇도 있었지만, 같이 수업 드는 앨리, 준 등 도와주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교수님의 Office hour에 빠짐없이 갔고, 묻고 또 물었다. Writing center는 일주일의 세네 번을 갈 만큼 고치고 또 고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고, 깜깜한 어둠 속 한줄기의 빛은 박사 오빠, 마이크를 만난 것이었다. 뉴욕 출신의 금발머리 마이크는 4년 차 박사 중이었고, 학과 중 유일하게, 학부, 석사 모두 지질학을 전공한 나의 동아줄이자, 수호천사였다. 이해 없이 한국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만 바짝 외워 전공 공부했던 생활을 했던 내게,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었다. 단 한 번도 논문을 읽어본 적 없이 들어온 대학원이었기 때문에, 논문을 어디서, 어떻게 찾는지도 몰랐었다. 숙제의 질문을 해석해주고, 숙제를 교정해주고, 논문들을 읽고 설명해주고, 발표 슬라이드를 고쳐주고, 내가 가진 엉터리 지식을 교정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라이팅도 교정해주고(Science writing은 Writing center를 가도 2% 부족할 때가 많았다), 물어보려 대화를 하다 보니, 영어를 써야 했고, 백인 영어 선생님께 지질학뿐 아니라 영어를 배우는 듯했다. 흔히 미국에서 선생님을 하면 영어를 잘하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쓰는 영어는 굉장히 한정적이다. 미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단어 수준은 높지 않고, 아무리 학교 선생님들이랑 친하고 밥을 매일 같이 먹어도, 하는 이야기는 "음식, 여행, 남자 친구 등" small talk였는데, 역시 수업 듣고, 읽고, 물어보고, 쓰다 보니 영어 실력이 달라짐을 느꼈다. 지질학을 좋아하는, 박사 4년 차는 달라서 일까, 박사 오빠가 도와준 과제와 발표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S 교수님께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대학 4년, 억지로 이해도 없이 외운 지질학을 공부한 것보다 맞춤 과외를 통해 배운 것이 훨씬 많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묻고, 또 묻는 내 성격에, 귀찮을 법도 했었는데, 한결같이 도와주었다. 만약 학부 때, 박사 오빠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인생이 달라졌으리라 믿을 만큼, 박사 오빠는 지질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을 다니는 데 있어 영어 선생님이자, 지질학 선생님 그리고 비공식 지도교수였다. 단 한 번도, 학부 때 지질학을 전공한 것, 미국에서 석사를 시작한 것, 티칭에서 지질학 공부로 다시 돌아온 것 등을 감사하기보다는 원망했다. 하지만, 박사 오빠를 만난 것은 기적이고, 정말 매일 감사하는 일이다. 덕분에 열심히 하게 되었고, 하나씩 알게 되었고,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힘들지만, 시간은 가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2년 하고도 반년 만에 한국 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많은 눈물과 아픔이 있었고, 다사다난했던 2017년이 끝나간다는 것이 마치 종이 한 장을 뒤로 넘기는 듯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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