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번 수백 번을 망설여서였을까 정말 아차 하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샌드에이고를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더 설레기도 하고 더 긴장되기도 했다. 하루 전까지 학교에 나가, 지도교수님과의 미팅으로 바빠 여행 준비는 하나도 못한 채 비행기에 타서였을까,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싶기도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자고, 쉬다가 와야겠다 마음먹었다. 정신없이 자다 보니 겨울이 가까워진 날씨가 아닌, 햇볕 가득한 뜨거움이 느껴지는 날씨가 나를 마중했다. 그리고 그리던 내가 딱 좋아하는 날씨였다. 내가 좋아하는 한결같은 날씨, 동남아 같은 날씨였다. 날씨만으로도 천국에 온 듯싶었다. 호텔에 도착해 랩탑을 켜서 내일은 무엇을 할까 찾아보았다. 여러 가지 장소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미국 여행카페를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했던 경로들을 추천해준 것을 보고, 이것대로 따라다녀야겠다 생각하던 중, 정말 우연하게 ‘샌디에이고 여행 동행자를 찾습니다’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날짜도 비슷하고, 혼자 온 것 같은데 같이 다닐까 싶기도 했지만, 선뜻 모르는 누군가에게 연락할 용기 나지는 않아서 고민만 한 채, 잠이 들었다.
역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내 체질이 아닌 것일까. 일어나자마자, 드라마 <상속자들>의 배경이라고 알려진 발보아 공원에 갔다. 숙소에서 가까워 20분 정도 걸으니,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은 너무 예뻐서, 왠지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것 같아서, 사진을 꼭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많은 곳이어서 일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가 너무 미안했다. 셀피라도 몇 장 남기고, 숙소에 돌아와 낮잠을 잤다. 걸어 다니는 내내, 카페에서 본 동행자 구하는 글이 머리에 맴돌아 다시 카페에 들어가 쪽지를 보냈다. 기다려도 답이 없길래 포기하고 코로나도 섬에 갔다. 코로나도 섬은 오바마 대통령의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었고, 해변 가득 보이는 섬이 너무 예쁘고 예뻐서 모래사장을 걷고 또 걸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끝없이 걷다 보니 세상 다 가진 것 마냥 행복했다. 올드타운에 가서 멕시칸 음식을 먹으며 공연을 보았다. 올드타운은 미국이 아닌 멕시코 같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 던 중, 쪽지에 답이 왔다. 본인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간다며 다음 날 여행을 같이 다니자고 했다. 다음 날은 멕시코 티후아나 투어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런데, 다음 날, 여행사에서 예약한 사람이 나 혼자라는 이유로 투어 취소를 통보했다. 멕시코에 가고 싶어서 여권을 들고 다녔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쪽지를 보내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했다. 저녁만 먹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너무 말이 잘 통했다. 사람이 싫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멀리 도망 온 여행이었는데, 그 아이한테 그동안의 일들을 털어놓은 순간, 모든 것이 치유되었다고 할까. 그 아이는 LA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었던 동갑내기 동성 친구였다. 헤어지기가 아쉬워 내가 묶던 호텔방에 데려와 늦게까지 웃고 떠들었다. 내가 과제를 하는 동안, 그 친구가 내일 갈 곳을 찾아보고 계획을 세웠다. 그 친구는 내 덕분(?)에 하루 더 머물게 되었고, 난 그 친구 덕분에 든든한 여행 메이트가 생겼다.
샌디에이고의 마지막 날, 그동안 가지 못했던 곳들을 가보았다. 그 친구는 샌디에이고에 여러 번 와 본 경험이 있어서, 이곳저곳 소개해주었다. 예쁜 샌디에이고의 풍경도 좋았지만, 난 아마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듯싶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싶었다. 실마래처럼 쌓이고 쌓여 정리되지 않았던 고민들이 하나씩 정리되는 듯싶었다.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안 듯이, 말이 잘 통했다. 그리고 가까운 누군가에게 터놓지 못하는 말들을 참 많이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짧은 관광을 마치고, 그 친구는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LA로 돌아갔다. 사람을 가리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내게 무슨 끌림이 있었던 것일까? 비록 그토록 가고 싶었던 멕시코는 못 갔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필요했던 사람을 만났다. 지금도 샌디에이고 하면 그 아이가 떠오른다. 세계 수많은 휴양지를 가보았지만, 그렇게 내게 샌디에이고는 최고가 되었다. 시드니, 발리, 하와이, 베네치아, 싱가포르 등 내가 갔던 모든 곳들보다 더 좋았던 곳. 현실은 냉혹해서였을까,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처럼 비행기를 타기가 싫었고, 공항에 도착하니 현실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이제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아서였을까. 과제는 왜 이리 많은지. 지도교수와의 미팅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지. 모든 것이 깜깜했다. 일상은 팍팍했다. TA를 하고, 수업을 듣고, 논문 준비를 하고, 시간 짬짬이 과외를 가는 등 정신없이 바쁜 일상이었지만, 충전을 가득으로 하고 나서 일까. 참을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 여행 전에는 ‘왜 저럴까’, ‘뭐가 문제일까’ 원망하고 화가 났지만, 여행 후에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런가 보지. 저런가 보지. 그러니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분의 삼을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그렇게 내가 원치 않았지만, 가야만 했던 그 힘든 길의 4분의 3을 지나왔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