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포츈 ;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진짜' 행운

N잡러의 현실을 담은 가장 2026년 다운 엔딩

by 박찬우

매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연말연시가 되면, 저는 습관처럼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영화들을 찾아보곤 합니다. 화려한 블록버스터보다는 사람의 체온이 묻어나는 이야기들이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데 제격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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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있어 그런 '난로' 같은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와, 서울의 풍경과 사람의 인연을 담담하게 그려냈던 <미망>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들이 주는 잔잔한 위로는 꽁꽁 언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으니까요.


2026년의 새해를 맞이하며 선택한 영화들도 이러한 결을 같이했습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 <척의 일생(The Life of Chuck)>은 예상대로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편, 제목부터 행운을 가득 담고 있을 것 같았던 아지즈 안사리 감독의 <굿 포츈(Good Fortune)>을 골랐습니다. 포스터만 보았을 때는 키아누 리브스와 세스 로건이 나오는 흔한 할리우드 코미디, 혹은 뻔한 권선징악의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제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비틀린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굿 포츈>, 천사가 만든 인생 역전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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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 포츈>의 줄거리는 기발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화려한 저택에서 현실 감각 없이 살아가는 억만장자 '제프(세스 로건)'와, 앱 하나에 의존해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아지(아지즈 안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불평등한 관계를 보다 못한, 자칭 '천사'인 가브리엘(키아누 리브스)이 개입하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갑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아지에게 제프의 삶을 살아볼 기회를 줍니다.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님을, 혹은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천사의 의도는 고전적인 교훈을 향해 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영혼이 바뀌거나 환경이 변한다고 해서 본질적인 행복이 찾아오지 않음을,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냅니다.


웃음 뒤에 숨긴 웃픈 현실들


아지즈 안사리는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배우, 감독입니다. 시트콤 <파크 앤 레크리에이션>으로 인기를 얻었고,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터 오브 논>을 직접 제작·연출해 에미상과 골든글로브를 수상하며 작가적 역량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현대 사회의 모순과 인간관계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지적인 코미디에 능합니다. 이번 <굿 포츈>은 그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특유의 사회 비판적 시선과 유머가 탁월하게 결합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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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본 아지즈 안사리 감독의 인터뷰는 이 영화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상황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 집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아이를 낳는 것도 사치가 된 이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감독이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실제 긱 이코노미(Gig Economy)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알렉산드리아 J. 라베넬(Alexandrea J. Ravenelle)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감독은 단순히 '가난한 주인공'을 그리는 것을 넘어, '폴리임플로이먼트(Polyemployment, 다중 고용)', 즉 2~3개의 일을 쉼 없이 하면서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 노동자의 초상을 정확히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대역전(Trading Places)>이나 <설리반의 여행> 같은 고전 영화의 문법을 빌려오되, 그 안을 채우는 공기는 철저히 2026년의 팍팍한 현실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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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독의 디테일한 설정 덕분에 주인공 아지의 처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프로 N잡러'들과 소름 돋게 닮아 있습니다. 영화 속 아지는 미국의 심부름 대행 서비스인 '태스크래빗(TaskRabbit)'의 노동자처럼 묘사됩니다. 가구 조립부터 줄 서기, 청소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수행합니다.


이는 한국으로 치면 '해주세요' 같은 심부름 앱 기사님들이나, '숨고', '배민 라이더'를 통해 건당 일감을 받아 처리하는 프리랜서들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자유로운 근무 환경'이라는 허울 아래 놓여있지만, 실상은 알고리즘이 배정하는 일감에 목을 매고 고객의 별점 하나에 생계가 휘청입니다. 영화는 '내가 원할 때 일한다'는 미명 아래, 사실은 언제 호출될지 모르는 대기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불안정한 현실을 '웃픈(웃기고 슬픈)' 에피소드들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랑과 화해 대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 차가운 엔딩


일반적인 할리우드 코미디라면 엔딩은 뻔합니다. 부자와 빈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돈보다는 사랑과 사람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기며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겠지요. 하지만 <굿 포츈>의 결말은 달랐습니다. 갈등의 해소는 '사람'의 온기나 '사랑'의 위대함으로 귀결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타협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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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지점이 무척 좋았습니다. 억지스러운 휴머니즘으로 포장하지 않고, 자본주의 계급 사회의 벽은 그리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결말을 보며 문득 미셸 프랑코 감독의 영화 <뉴 오더(New Order)>가 떠올랐습니다. 장르는 다르지만, 계급 간의 격차와 갈등이 단순히 개인의 선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임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굿 포츈>은 코미디의 탈을 썼지만, 그 내면에는 <뉴 오더> 만큼이나 서늘한 사회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전에 <양극화, 이제 중도는 없다>라는 글에서 이야기했던 양극화의 근본적 원인, 구조적 불평등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적 박탈감을 유발하고, 이는 '우리'와 '저들'을 가르는 정치적 분노의 자양분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 중도가 없는 양극화의 현실이 궁금하시다면


평단은 이 결말을 두고 "낭만적인 거짓말 대신, 차가운 진실을 택했다", "위선적인 희망 고문을 하지 않는, 가장 2026년 다운 엔딩"라고 호평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는 그대로 둔 채 개인의 마음가짐만 강조하는 기존 영화들과 달리, 부조리한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는 엔딩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극장 밖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화가 말하는 <굿 포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이 아니라, 이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은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인간의 도구화와 휴먼터치


마케터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어떻게 도구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텍스트입니다. 긱 이코노미는 기업과 소비자에게는 혁신적인 편의성을 제공합니다. 앱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군가가 달려와 내 귀찮은 일을 대신해 주니까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자를 '사람'이 아닌 '수행 단위'로 격하시키는 비인간적인 환경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마케팅 데이터를 분석할 때 소비자와 노동자를 숫자로 치환하는 데 익숙합니다. "매칭 성공률 98%", "서비스 처리 시간 10분 단축"과 같은 목표 뒤에, 억만장자의 변덕스러운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아지'들의 감정 노동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합니다. 영화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우선시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블랙 코미디를 빌려 꼬집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마케터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고도화되고 비대면 서비스가 늘어날수록, 마케터는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켜야 합니다. 모든 것이 앱으로 해결되는 세상에서,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차별점은 결국 '진정성'과 '공감'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마케팅 트렌드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명확해집니다. 효율만을 강조하던 플랫폼들이 이제는 '상생'과 '파트너 케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라이더나 파트너들에게 따뜻한 휴식 공간을 제공하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은 단순한 이미지 세탁이 아닙니다.


소비자들 역시 이제는 서비스의 편리함 뒤에 있는 '사람'을 인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굿 포츈> 속 주인공들이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다뤄질 때 느끼는 박탈감은, 역으로 우리 마케터들이 고객과 내부 구성원(혹은 파트너)을 대할 때 무엇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반면교사입니다.


그래서 제 평가는요...


너무 무겁게만 <굿 포춘>을 설명드려 코미 영화로서 재미가 없을 것 같이 이야기했네요. 아닙니다. 재미있는 풍자가 몇 번을 크게 웃게 만듭니다. 그리고 키아누 리브스의 캐스팅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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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누 리브스는 대중에게 <존 윅>의 고독한 킬러이자, 현실에서는 미담이 끊이지 않는 '검소하고 선한 이웃'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배우 본연의 '브랜드 자산(Brand Equity)'을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그가 어설픈 천사 '가브리엘' 역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무장해제되고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하지만 연말연시 영화로는 관람 후 음주를 유발하는 요소가 있어 <척의 일생>보다는 적절치 않고요, 블랙 코미디 영화로서는 <굿뉴스>보다 좋았습니다.



이건 너무 힘들어
사람들이 어떻게 이걸 하지?
어떻게 다들 그냥 불행해하고 화나 있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

아지의 궁핍한 삶을 살게 된 제프의 절규는 영화가 끝나도 계속 귓가에 맴돕니다.


<굿 포츈>의 가브리엘은 천사였지만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짜 인간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케터는 처음부터 인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천사처럼 행동하려 합니다. 소비자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하고, 브랜드를 '구원자'처럼 포지셔닝하며,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마치 전지전능한 도구처럼 다룹니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건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하는 것입니다. 배달 앱을 마케팅할 때, 단순히 '빠른 배달'만을 강조할 게 아니라 '배달하는 사람'도 생각해야 합니다. 플랫폼 경제의 편리함을 알릴 때, 그 편리함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만들어지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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