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단에서 비판적 동반자로, 팬덤의 역할 재정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레고가
문제 기업과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가?
2022년 초, 레고의 앰버서더 네트워크(LEGO Ambassador Network, 이하 LAN) 내부에 비판의 글의 올라왔습니다. 당시 레고는 인기 게임 '오버워치 2'를 테마로 한 대형 세트(Titan) 출시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2022년 2월 1일. 제품 카탈로그에 등록되고, 프로모션 이미지가 공개되고, 트레이서와 메이 미니피겨를 담은 옴닉 타이탄 세트는 매장 진열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시 3주 전인 1월 11일, 레고는 돌연 공식 입장을 발표합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Activision Blizzard)와의 파트너십을 재검토 중이며, 검토가 완료될 때까지 76980 Titan 세트의 출시를 중단합니다."
중단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당시 액티비전 블리자드 내부의 지속적인 직장 문화 의혹, 여성 직원에 대한 처우 문제, 다양성과 포용 환경 개선의 미흡한 진척으로 심각한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레고가 "아동의 권리와 발달을 옹호하는 책임 있는 기업"으로서 더 이상 묵인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결과는 '사실상의 취소'였습니다. 공식 표현은 "일시 중단(pause)"이었지만, 재출시 일정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일부 물량이 유통망에 진입했다가 회수됐다는 커뮤니티 증언이 돌았고, 76980은 정식 발매되지 않은 '레어 세트'로 2차 시장에만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유령 상품이 되었습니다. 오버워치 테마 전체가 사실상 정지된 채, 레고는 조용히 이 IP와의 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결정의 트리거였습니다. 제품 자체의 문제도, 시장 수요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IP 파트너의 평판과 가치 충돌이 완성된 제품의 출시를 출시 직전에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신호탄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부 팬 커뮤니티, LAN에서 올라왔습니다.
이 사건은 브랜드 팬덤이 단순한 '응원 조직'을 넘어 '가치 기반의 레드팀'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레고는 LAN의 목소리를 경청했고, 단기 매출보다 장기 브랜드 신뢰를 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팬들은 브랜드의 가치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했습니다.
군사 및 정보 보안 분야에서 유래한 '레드팀(Red Team)'은 아군 시스템의 취약점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적군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을 의미합니다. 실전을 가정한 공격 시뮬레이션을 통해 방어 체계의 허점을 드러내고, 조직이 스스로 보지 못한 위험을 식별하는 것이 핵심 임무입니다.
브랜드 팬덤 구축을 위한 5가지 핵심 질문의 첫 번째 질문, "팬덤이 만들어지면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나요?"에 대한 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역할이 '제품이나 서비스의 홍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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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팬덤의 역할을 조금 확장하여 '레드팀'의 개념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관여 팬덤은 브랜드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레드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고의 LAN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제품을 소비하고 칭찬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브랜드가 간과한 리스크를 먼저 포착하고, 때로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브랜드 가치의 일관성을 감시합니다. 이들의 레드팀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작동합니다.
첫째, 제품 검증(QA Red Teaming)입니다. 출시 전후 제품의 설계 오류, 품질 문제, 조립 경험의 결함을 실사용자 관점에서 찾아냅니다. 기업 내부 QA팀이 놓칠 수 있는 미세한 사용성 이슈나 디자인 모순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피드백하는 역할입니다.
둘째, 시장성 검증(Strategic Red Teaming)입니다. 신제품 아이디어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기업이 보지 못한 틈새시장을 제안합니다. 마케팅팀의 장밋빛 전망보다 실제 시장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먼저 검증하는 현장 감각을 제공합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화·윤리적 검증(Cultural Red Teaming)입니다. 브랜드가 표방하는 가치와 실제 행동이 충돌하는 지점을 감시합니다. 군사 무기 묘사, 문화적 전유, 협업 파트너의 윤리 문제처럼 브랜드 신뢰를 훼손할 수 있는 요소들을 조기 경보합니다. 오버워치 사태에서 LAN이 한 역할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들의 비판이 '안티'가 아니라 '팬'의 언어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브랜드를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라 더 나은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불편한 진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브랜드는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레고는 이 팬덤 레드팀의 신호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 결과 단기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장기 브랜드 자산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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