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글을 쓰는 작가가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책상에 앉아 펜을 움직이는 장면을 제외하고, 화면에 담을 만한 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여행과 나날>은 이 어려운 질문에 정면으로 응답하며, 각본가 '이(심은경)'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가 쓰는 글이 곧 영상으로 이어지는 각본이라는 점을 활용해, 영화는 ‘쓰는 사람의 시간’과 ‘쓰인 이야기의 장면’을 중층적으로 교차시킨다. 이후에 쓰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이'는 홀로 여행을 떠나고, 영화는 그 여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영화에는 여러 개의 여행이 겹쳐서 존재한다. 먼저 주인공 '이'는 모국인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하는 각본가이다. 이미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와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늘 이방인이자 여행객의 위치에 놓여 있다. 두 번째는 '이'가 쓰는 각본을 통해 이루어진다. 글쓰기는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이르게 되고,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이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여행이다. 여름 바다를 배경으로 한 각본 속 남자와 여자,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소통은 '이'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각본가로서의 재능을 의심하게 된 '이'가 홀로 떠나는 실제 여행을 따라간다. 큰 준비 없이 설국의 작은 마을로 향한 '이'는 숙소를 구하지 못한 채 밤을 맞이하고, 어둠이 짙어진 후에야 깊은 산속에 있는 작은 여관에 닿는다. 그곳에서 여관 주인 '벤조'를 만나며, 또 하나의 시간이 시작된다.
영화는 글을 쓰는 '이'의 모습을 클로즈 업하며 시작한다. 글을 쓰며 '이'는 흐뭇하게 웃기도 한다. 글이 쓰이는 '이'의 노트가 교차 편집돼서 보이다가, 이내 각본에 쓰인 이야기의 장면이 등장한다. 해변에서 한 소년과 한 소녀가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 대낮에 만났던 그들은 해가 한참 저문 깜깜한 밤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모두 집을 떠나왔다. 그리고 바다를 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들은 결국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다만 어떻게든 지금을 긍정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소년은 남긴다. 다음날 폭우에도 다시 만난 둘은 함께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수영을 하며 둘은 모두 웃지만 어딘가 묘하게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어느덧 영화 속 영화는 끝이 나고, 주인공 '이'와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어느 대학 강의실로 장면이 옮겨진다. 쓰는 사람의 시간이 쓰인 이야기의 장면을 거쳐, 다시 쓰는 사람의 시선으로 돌아간 것이다.
강의실에서 일종의 GV가 열리게 되고 '이'는 한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며 답한다. 영화를 보며 나는 재능이 없다는 걸 느꼈다고. 유독 솔직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보다 엄격한 것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는 진심으로 고뇌한다. 이후에 '이'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은사의 카메라를 선물로 받게 되고, 은사의 부재 속에서 은사의 마지막 조언대로 홀로 여행을 떠난다.
경계 없이 눈으로 가득 찬 설국의 마을 보며 '이'는 잠시 감상에 젖는다. 그리고 따듯한 면 요리를 맛있게 먹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숙소 두 곳이 모두 빈 방이 없어 숙박할 수 없게 되자 위기에 처한다. 두 번째 숙소 직원의 안내에 따라 산속으로 향하지만 순식간에 덮친 어둠과 아름답게 보였던 눈은 '이'의 걸음을 방해한다. 결국 어둠 속에서 약간의 불이 들어와 있는 벤조의 여관을 발견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맞이한 손님에도 벤조는 어딘가 모르게 무심하다. 하지만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이'를 챙긴다.
이후 영화는 벤조와 '이'의 대화와 일련의 행동들로 이루어진다. 마치 여름 바다에서 소년과 소녀가 함께 했던 것처럼. 하지만 벤조는 늙었고 말이 없는 편이다. 반면에 '이'는 계속해서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잘 진행되지 않는다. 말에 묶이는 일상에 벗어나고 싶어 여행을 떠났지만, 다시금 말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벤조는 자신의 여관을 소재로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이'는 잠시 혹해 몇 가지 질문을 벤조에게 던진다. 그러나 의도와 다르게 벤조의 심기를 거스르고 만다. 벤조에게 가족과 관련한 아픔 내지 상처가 있음을 암시하며 둘은 밤을 맞이한다.
벤조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고, '이'는 여관의 연못에 잉어를 기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이'는 벤조의 제안이 영 마음에 들지 않고, 벤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벤조는 '이'의 제안을 바로 한번 실행해 보자고 하며, 이와 함께 이웃집 연못으로 향한다. 약간의 우여곡절들을 거치며 황금색 잉어를 훔쳐서 오지만 그 사이에 물이 얼어버리고 만다. 그 가운데 벤조는 자신의 아들을 만났지만 아들은 포옹을 거부한다. 아들에게도 거부당하고, 잉어도 얼어 죽어버리고, 벤조는 가뜩이나 기분이 상한다. 그런데 '이'는 상황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 연못 정원에 떨어트리고 온 카메라를 들이대기까지는.
경찰이 벤조를 데려가고 '이'는 여관에 남아 잠깐의 잠에 든다. 분명 긴 꿈을 꾼 것만 같은데, 세숫물이 차가워 순식간에 꿈을 잊어버리고 만다. '이'는 자신이 묵었던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향한다. 온통 하얀 설경 가운데 홀로 엉거주춤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고요하면서도 은은하게, 알게 모르게 다시 회복된 그녀의 일상을 암시하면서.
삶은 여행이다. 그러니 삶 속의 일상, 나날들은 모두 여행의 한 순간들이다. 다만, 출발점과 돌아갈 곳을 모르기에, 어쩌면 한 순간에 꾸는 꿈만 같은 여행일지도 모른다. 세숫물이 차가워 깜빡 잊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긴 꿈같은 여행. 그 속에서 우리는 너무 얽매이고 엄격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여행은 스스로를 얽매여오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리고 여행은 우리의 나날들을 이전보다 더 가볍게 만든다.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 무게를 보다 가볍게 해 줄 또 다른 여행의 존재를 우리는 항상 찾아 헤매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