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무덤덤해지고 재미없어지면 현실을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마치 집단 가스라이팅하는 듯한 뉴스에 분노하는 것도 지쳤다. 현실을 외면하기에는 드라마나 영화만 한 것이 없다. 요즘 인기 드라마의 트렌드는 웹툰에 연재된 작품을 기반으로 퓨전 사극과 콜라보를 이루는 전생의 기억,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과 힘의 표출이 대세다. 「철인왕후」,「이 연애는 불가항력」,「힙하게」,「힘 센 여자 강남순」,「오늘도 사랑스럽개(犬)」,「연인」 등등.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현실처럼 통쾌하거나 달콤하게 실현되는.
직원 결혼식 참석하고 이왕 발걸음 한 김에 가까이 있는 포항 여행을 하기로 했다. 포항 생각을 하면 예전엔 여행지든 아니든 포스코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요즘은 다르다. 인터넷이나 SNS 등에서 지명을 입력하면 유명 핫 플레이스가 뜨는데 포항은 스카이워크가 으뜸이다. 찾아가는 길에서부터 주차 요령 주의할 점 등 여행자가 알아야 할 깨알 정보들까지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스카이워크는 포항의 철 이미지를 살린 상징성과 작품성을 조화롭게 살린 대표적인 명소가 되기에 필요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바다가 보이는 야산에 자리 잡고 있어 장소적 요건도 완벽하다. 고소공포증을 유발하는 높이와 진동이 있었지만, 한 고개를 오르고 난 후의 안정감 때문인지 돌풍이 휘몰아칠 때 빼곤 긴장감과 스릴을 즐기기엔 그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는 데 날개 없이 하늘을 걷기 위해 올랐으니 고소공포증 없을 리가 없다. 젊었을 때도 있었지만 나이 들면서 증세가 심해졌다. 고소공포증이 생기는 이유가 아무래도 상상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삶 속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쌓여 상상이 더해지며 두려움과 공포가 만들어진다. 높은 곳에 서는 두려움은 추락에 대한 상상과 고통의 두려움이 현재를 엄습하는 결과의 반영이 고소공포증이다. 그걸 극복하는 길은 상상력을 닫는 것인데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포항 스카이워크에서 제일 가파른 첫 고개를 오를 때 온몸으로 느껴지던 진동과 고소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고 나니 다른 오르막에선 면역이 작동했는지 두려움이 덜어졌다. 꽉 잡은 손잡이 쇠에서 전해지는 진동에서 알 수 없는 단단함에 믿음이 생겨났다.
첫 방문지에서의 강한 짜릿함으로 인해 어젯밤 죽도시장을 찾아가던 거리의 황량함과 쓸쓸함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었고, 내려오는 길에 미술관에 들러 조형물과 디지털콘텐츠 창작품들을 둘러보며 정서적 안정감을 되찾았다.
환호공원에서 강렬했던 철의 상상력을 체험했다면 구룡포에서는 드라마의 상상 속에 빠져 따뜻했던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2019년 9월에 방영됐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에서 촬영되며 그곳을 더욱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미혼모인 동백이와 용식이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로 20%가 넘는 시청률로 인기가 있었다.
인기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가 관광지로 변한 예는 동서양에 꽤 많다. 국내에서는 겨울연가의 남이섬, 도깨비의 강릉, 미스터선샤인의 안동, 스물다섯스물하나의 전주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아바타의 장가계와 맘마미아 2의 크로아티아 남부의 달마티아 제도의 비스섬, 반지의 제왕의 뉴질랜드 등등.
드라마 인기 탓인지 일요일 오후였는데도 구룡포의 일본인 가옥거리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드라마에서 술집이었던 카멜리아는 카페로 변신했는데, 그곳을 찾는 여자는 동백이로 남자는 용식이로 불렸다. 유치하긴 막상 내가 그렇게 불리면 주인공이 된 듯 나쁘지 않다. 나도 몰래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아내가 왼발 무지외반증으로 스카이워크와 미술관을 걷으며 불편을 호소했었는데, 계속 걸으면서 내가 아픈 듯 신경이 쓰여 슬리퍼라도 사주려니 살 곳이 없었다. 그런데 동백이네 카페에서 동백꽃 장식이 달린 흰색 크록스 슬리퍼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괜찮냐고 묻는 내게 웃으면서 참을 만하다며 극구 사양하더니 신고 난 후엔 너무 좋고 편하다며 연신 웃으며 발을 들어 보였다. 작은 불편 하나 덜었을 뿐인데 내 마음의 짐을 던 듯 홀가분해졌다.
동백이와 용식의 사랑도 작은 배려와 보살핌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에 자기편 한 명 없던 동백이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기꺼이 자기편이 되어 준 용식이에게 마음을 열었으니까.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는 건 크고 강한 경제력이나 정치권력이 아니라 작은 관심과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아니라고 부정할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발점은 그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 한 번 둘러보자.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내 주변의 작은 배려와 관심이 필요한 곳이 어딘지.
호미곶해맞이 공원의 확 트인 광장은 이국적이었으며, 청량감 넘치는 가을 하늘과 바닷물에 담긴 상생의 손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가을햇살을 맞았다. 아침 10부터 시작된 하루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촘촘하게 하루를 쪼개 알차게 여행했다. 돌아오는 길이 아쉽고 쓸쓸해야 다음 여행을 기약하는데 이번 여행은 돌아오는 어두운 길조차 내내 좋았았어서 다음을 계획하고 기대하기가 두려워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