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숙함은 조금 지루하다

⌜애매한 영화 애호가의 왜 좋냐면⌟ 나는 왜 초기작을 좋아하나

by Aha


얼마 전 진단받았다. 현재까지의 나는 무감각증을 앓는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아마도 중간 강도의 감정은 잘 느끼지 못하는 감각의 구조. 내가 감지하는 건 늘 극단적인 강도뿐이다. 그래서 퐁네프는 느껴지고, 홀리 모터스는 흥미롭지만 덜 와닿는다. 화양연화의 우아한 정숙함을 머리로는 알아도, 심장이 떨리게 하는 쪽은 언제나 중경삼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감각의 구조다. 이 글은, 내 감각이 예술을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대한 관찰 혹은 고백이다.


사람들은 종종 '초기작이 좋다'고 말하기를 망설인다. 마치 그것이 '더 성숙한 것을 이해 못하는' 치졸한 고백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혹은 평단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판단했다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일까. 나는 초기작을 사랑한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는 감정과 창작의 에너지가 아직 제어되지 않는 시기를 선호한다. 어설픔과 잠재력의 간극이 좁혀지기 전, 작가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 나는 더 큰 흥미를 느낀다.




카락스: 퐁네프 vs 홀리 모터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서사는 언뜻 구색으로 착각된다. 카락스는 "왜 미쳤는가"에 대한 분석보다는 미친 상태 그 자체를 시각화하는 데 혼을 불태웠다. 그는 광기를 폭로하고, 정면으로 몸을 던진다. 외부 세계를 파괴하진 않지만, 그 앞에서 몸을 부르르 떤다. 감정과 사건이 거의 동일한 수준에서 충돌하는 영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락스의 영화는 광증을 다루는 방식 자체를 하나의 기술로서 다루게 된다. 발전이라 부르거나, 절제라 부를 수도 있다. 삶을 지속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카락스에게는 좋은 일일 것이다. 다만 내겐 조금 지루하다. 광증이 기술로 번역되는 순간, 감정의 직접성은 약화된다.


나는 초기작을 사랑한다. 미성숙을 편드는 것이 아니다. 창작자가 자기 언어를 획득하기 전의 언어는 더 원형적이고 개별적일 수 있다는 가설이다. 성숙한 언어는 독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만큼 보편화된다. 보편어가 될수록 나만의 언어에서 멀어진다.


왕가위: 중경삼림 vs 화양연화

나는 언제나 중경삼림을 외친다. 하지만 대체로 화양연화가 '완숙한 왕가위의 핵'으로서 더 많이 언급된다.


중경삼림은 실존하는 시간, 장소,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스냅숏이다. 파편화된 도시인의 정서가 그대로 옮겨져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미숙해 보일 수 있다. 반면, 화양연화는 감정을 미학으로 번역한다. 그 과정에서 익숙하고 표준화된 슬픔이 탄생한다. 슬픔이 상징성과 조명 속에서 작동한다. 세간에는 흔히 이를 “완성도”라 부른다.


나는 의심한다. 완성도가 종종 보편성을 얼마나 잘 확보했는가를 의미하는가를. 만약 그렇다면 질문은 간단하다. 보편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고유성은 얼마나 남는가.


연회장과 대도시의 슬픔

완숙한 영화들은 국제 영화제라는 연회장에 초대되기 쉽다. 그곳은 조명이 고르게 비추는 공적 공간이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표준어를 구사해야 하는 장소다. 감정은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예절과 규범 속에서 품위를 지킨다. 그것이 완성도다. 반면, 중경삼림과 퐁네프는 연회장에 들어가기에 아직 발이 덜 말랐다. 그들은 셋방 단칸방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난 감정 같다. 어디에 기대야 할지, 몸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모른다. 그래도 그 방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빛의 결이 있다. 서툴지만, 그 서툼 자체가 곧 자신의 언어다.


영화도 도시처럼 발달한다. 대도시들이 서로 비슷해지는 것처럼, 성숙한 영화들은 서로의 문법을 닮아간다. 도쿄 같고 서울 같고 뉴욕 같은 슬픔. 정제된 감정이 세계화될수록 원래의 지방색, 사투리, 방언들은 사라진다.


그래서 완숙함은 조금 지루하다. 화양연화는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온 영화이고, 중경삼림은 여전히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 영화다.


로메르는 왜 예외인가

여기까지의 서사는 "감정의 직접성 → 감정의 해석과 통제"라는 축을 따른다. 그런데 내게 있어 <녹색광선>은 이 축 위에 놓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감정 자체의 폭발을 포착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감정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의 윤리를 탐구한다. 그리하여 미숙함/완숙함이라는 구분과 무관하게, 관찰하는 인간의 상태를 사유하게 만든다. 로메르를 예외로 두는 것은 일관성의 파괴가 아니다. 분류 체계의 차이 때문이다.


이것은 비평이 아니라

고백하건대, 완숙함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게는 조금 지루할 뿐이다. 화양연화는 덜 좋은 영화가 아니라, 세련된 영화다. 그저 내게는 중경삼림이 감정의 원형에 더 가까울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을 길게 해야 겨우, "초기작이 더 좋다"는 한 문장을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완숙함의 권위에 길들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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