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르의 담담한 악수 - 판단 없는 사랑에 대하여

애매한 영화 애호가의 왜 좋냐면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2)

by Aha

에릭 로메르의 영화 철학

로메르의 정직한 시선


로메르의 영화는 찌질하고 공감성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람의 취약한 구석구석을 누구보다 민망할 만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것을 조롱하거나 과장하거나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괴로울 만큼 담담하고 대담하게 그대로를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본다. 괴롭고 동시에 안전한 기분이 든다.


때론 사회적 정치적 정의나 대의에 대하여 말하는 개인들이 각자 뒤집어쓰고 있을 모순이 있다. 그럴싸하고 웅장하고 대담한 사회적 헤게모니와 슬로건, 정의 아래에 각 개체들이 가진 개인적 문제들, 모순들, 취약성과 부적절함들이 공존한다.


광장에 나서기 전, 웅장한 주제 앞에서 모이기 전에 해결할 문제들. 오히려 개인적 우주에서 일어나는 분열이라 누구의 도움도 없이 각자가 혼자서 다루어야 하는 문제들. 대충 숨기고 미뤄둔 채로 죽을 수도 있는 문제들. 로메르는 그것에 대해 가장 정직하고 우회 없이 정답을 보여주는 악수 같다. 포옹도 아니다. 그 어떤 정서적 과잉도 없다. 이건 그냥 미지근하고 단단한 악수다.


로메르의 사랑


로메르는 사랑이 많은 사람, 사랑하는 자였을 것이다.

그는 캐릭터들의 모든 잡담, 철학적 방황, 자기중심적 독백을 끝까지 들어준다. 그들이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고,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믿어준다(인내로운 사랑). 그는 캐릭터들의 실수와 모순을 비웃거나 비판하지 않는다(판단 없는 사랑). 그는 피상적인 매력이나 성취보다 각 인물 안에 있는 진정한 가치와 진실을 보려고 노력한다(진실을 추구하는 사랑).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전달하는 사랑).


로메르는 아마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사랑을 계속 강화하고 완성해 갔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따라간다. 영화와 영화, 대사와 대사, 그리고 그 사이의 침묵들을 반복하면서 로메르는 점점 더 로메르가 되었을 것이다.


로메르의 겸손한 위치


로메르는 관찰 대상에 대한 애정과 연민에 오만한 공감에 대한 확신도, 초월적 이해에 대한 자만도 없이, 내가 관찰 대상의 외부 세계이며 불화하는 세계의 일부이자 타인이라는 한계를 꽤나 냉정하게 전제한다.


그는 델핀(「녹색 광선」)의 고독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세계의 일부이면서도, 동시에 델핀의 고독을 목격하고, 그녀의 희망을 응원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세계에 전달한다.


로메르는 완전히 세계 밖에 서 있는 초월적 관찰자도 아니고, 세계에 완전히 융합된 참여자도 아니다. 그는 경계에 서서, 세계와 그것이 배제하는 것들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재자다.


이 겸손은 교만의 반대가 아니다. 이것은 정확한 자기 인식이다. 나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고, 그 노력을 기록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로메르의 섬세한 천착


로메르의 영화는 아주 미묘하고 집요하게 쥐고 따라가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섬세한 것들에 천착한다. 말 사이의 간격, 일상의 작은 리듬, 감정의 흔적. 이런 섬세함에 대한 천착은 아마도 로메르 자신의 내면 세계가 그만큼 섬세하고 풍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메르는 표면적 대화 이면의 대화 참여자들의 복잡한 심리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아마 고도로 예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연을 좋아하고, 누벨바그를 선택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한 것, 그 모든 것이 그의 특별한 감수성을 말해준다.


주파수의 문제

예술과 감상자 사이에는 '주파수 동조' 현상이 있다. 정신병 환자들에게 고흐의 그림이 유독 인기가 많다거나, 내적 불안과 분열이 심하던 시기에 고흐 그림에 더 크게 감각적 감정적 반응을 하는 것처럼. 특정 감수성을 지닌 시기에 어떤 시들이 언어 이전의 감각적 본능적 이해가 가능한 체험이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금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반대의 체험이 있다.


유사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로메르의 영화에서 받는 느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감상은 조금 층위가 다를지도 모른다. 로메르의 영화가 주는 깊은 개인적 연결과 섬세한 뉘앙스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와 비슷한 감수성의 스펙트럼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로메르가 포착하는 미묘한 순간들 - 어색한 침묵, 말하지 못한 것들, 관계의 미세한 균열들 - 은 특정한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보인다. 그것을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이 있다.


보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유사 심리치료로서의 로메르


로메르의 시선은 "유사 심리치료"와 같다. 그의 카메라는 좋은 치료사처럼 판단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고치려 들지 않고, 그저 인내심을 갖고 지켜본다. 그 시선이 우리로 하여금 가장 취약한 모습으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안전함을 느끼게 한다.


레네트가 얼마나 어설프든, 델핀이 얼마나 찌질하든, 로메르의 카메라는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끝까지 함께 있어준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이들은 조금 더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비로소 믿을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나의 불완전함이 나를 가치 없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어설픈 말들 너머에 혹는 그것들의 얼기설기한 합 속에 진실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세요. 이것이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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