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화된 고통 소비하기와 기억하기
나는 정직한 것을 사랑하지만, 유약하고 비겁한 것은 싫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싫어하는 그 비겁함의 내부에, 종종 고통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식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비극 앞에서 몇 가지 부류의 창작자를 목격한다. 자기 밖의 세계를 공격하며 고통을 폭발시켜 표출하는 부류, 또 다른 하나는 침묵 속에서 고통을 견디며 품위를 유지하는 부류이다. 전자는 미시마 유키오나 보들레르처럼 세계와 결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감각을 정당화하며 어떤 이들은 광증이라는 형식으로 스스로를 폭로하여 파괴를 미학화한다.
반면 또 다른 자들은 시끄럽거나 고요하게 미쳐가면서도 버티는 사람들이다. 자기에게 남겨진 일상으로 타자를 공격하지 않기 위해 광기를 자기 세계에 가두고 삼켜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통은 외부로 향하지 않고, 그렇기에 낭만적 비극이라는 연출을 거부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전자의 서사에 더 열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적이고 선명하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의 고통은 침묵 속에 숨어 있어 종종 개인적이고 납작한 불행으로 취급된다.
고통을 외부세계에 대한 공격으로 전개할 때, 우리는 암묵적으로 외부세계를 “악”의 자리에 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때 비극은 고통의 증언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편의적 단죄가 된다. “고통스러워 하는 나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로서의 세계”라는 서사적 전략은 고통에 방패를 씌우며 자신을 면책시키는 방식이 된다. 그러나 고통 자체는 타인을 악역으로 만들 권리를 주지 않는다. 외부세계를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비극은 타인을 향한 새로운 폭력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낭만적 비극이 가진 윤리적 비겁함이다.
현대 사회에서 고통은 콘텐츠를 통해 대량 소비된다. 창작자는 자신 안의 비극을 낭만적 이미지로 포장하여 전시하고, 독자/시청자는 안전한 거리에서 그 고통을 관음한다. 이때 창작자와 소비자는 의도치 않게 공모 없는 공범이 된다. 예술이라는 변명 아래 타인의 고통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낭만적 비극의 윤리”가 가진 근본적 위선이다.
자기 비극을 다루는 창작자들을 가상의 윤리적 스펙트럼 위에 세워본다. 고통의 낭만화(보들레르) ― 우아한 침식(파 프롬 헤븐의 캐서린) ― 붕괴의 전시(부코스키) ― 광증의 폭로(까락스)로 이어지는 이 스펙트럼에서, 각 창작자는 자기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마다 상이한 윤리적 장단을 갖는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이들은 모두 타자에게 관람을 허락한 고통이라는 점에서 관음의 구조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보다 윤리적인 기록 방식은 없을까. 나는 그 힌트를 에릭 로메르 같은 감독들에게서 더듬어 본다. 그는 어느 영화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지극한 정성으로 타자를 왜곡하지 않는 방식을 추구했다. 고통을 미화하거나 클리셰로 해석하지 않고, 그저 꾀죄죄한 존재를 따라가는 방식은 눈 앞의 고통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정직한 태도 중 하나 같다.
비극적 서사를 소비하는 문제는 타인의 고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과거마저 비극으로 재가공하여 관음의 대상에 올려놓을 수 있다. 고통을 전시할 때, 나는 동시에 두 인물이 된다. 고통을 겪은 피해자 나, 그 고통을 감상하는 관람자 나. 말하자면 스스로를 관음하는 기묘한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여기에 작은 도취가 있다. 비극 속에서 어떤 미학적 서사를 발견하면, 그 비극은 “볼 만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고통은 현실이 아니라 콘텐츠가 된다. 이것은 퇴행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매우 흔한 자기 방어다. 고통을 “지켜보는 나”가 생기는 순간, 고통 속의 “나”는 감시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나 이 분리는 오래갈수록 나를 타자화한다. 스스로를 감상 대상으로 만들며 자기 내부의 고통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소비하고 있을까.
모든 고통은 개별건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각각의 고독을 오독 없이 버텨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할 때조차, 그 기억은 하나의 재창작이므로 관음의 윤리가 적용된다. 즉,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는 타자이다. 그것과 다시 만날 때 전유하지 않고, 판결하지 않고, 감상하지 않고 존중의 방식으로 대면해야 한다. 고통 속에서 외부세계를 악으로 규정하는 비겁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통 또한 타인의 고통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낭만적 비극이 가진 위선을 넘어서는 첫 걸음이다. 정직한 대면 이후,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할 자유. 그것이야말로 비극을 낭만화하는 문화적 경향을 넘어서는 윤리적 대안이다.
결국 고통 앞에서 필요한 것은 미화와 경탄이 아니라 정직한 버티기다. 우리는 비극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대신, 생존을 정직하게 다루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고통을 세계에 대한 면죄부로 삼지 않고, 누구도 악역으로 만들지 않으며, 고통을 소비하거나 장식하지 않는 방식. 낭만적 비극의 위선과 관음적 소비를 넘어, 고통의 기록과 소비에 대한 새로운 윤리가 분리와 동시에 화해를 허락하고, 구질구질함을 모두 버텨낸 대면 후에야 불완전한 용서, 결별, 망각 외에 보다 온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