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하고 권태롭게 승리하는 삶

비겁하고 지루해질 용기와 남아서 살아가는 일

by Aha

인간의 경험 중에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들이 존재한다. 설명할 수 없어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형식 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 감각이 본래의 형상을 잃기 때문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감각은 말이 되기 이전의 소리, 말이 되기 어렵게 살아남은 잔여로서 존재한다. 나는 이 감각을 혼자서 ‘비명’이라 불러왔다. 비명은 울부짖음이 아니라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말, 존재가 스스로에게만 남기는 은밀한 증언이다. “나는 여기 있다”라고 말할 언어를 아직 갖지 못한 존재가 선택하는 가장 원초적 방식.


이러한 비명 중 일부는 사회적 규범 속에서는 종종 수치와 결합된다. 부끄러움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부여된다. 수치심은 원천적으로 사회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롯되고, 그 시선을 내면화하면서 자라난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잠식하며 삶의 영역을 압축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 생각했다. “나는 수치를 팔아 과자라도 사먹겠다.” 나를 옭아매던 감정을 나를 위한 사소한 도구로 전락시키겠다는 선언, 나를 소비하려 드는 것들을 오히려 내가 즐겁게 소비해 버리는 반전이다. 수치는 감추어야 하는 상처가 아니라, 내 삶을 존속시키는 재료가 된다. 이 전환은 은밀한 복수이며, 행위자의 즐거움이다.


이렇게 수치가 뒤집히는 순간, 긍정이 조금 생경하게 등장한다. 나는 긍정을 깨끗하거나 고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되려 긍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여러 겹 누적된 뒤에야 생겨난다. 낙관주의는 처음부터 기품 있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런 긍정을 “넝마 같은 낙관주의”라고 부른다. 짖궂은 세계에 맞서, 매 순간 부정과 비관을 꿰매 이어붙인 끝에 기어코 살아남은 잔여적 긍정. 그것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긍정이다. 낙관은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아니라, 버티고 남은 빛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유구하게 미화되어 오던 비극적 서사의 허상을 보기 시작했다. 짧고 강렬하게 죽은 천재들 ― 27클럽이 상징하는 세계의 우상들 ― 나에게도 그들의 서사가 아름답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환하게 타올라버려 영원히 순간으로 박제된 시절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서 사라진 가능성들을 더 크게 읽는다. 채 남기지 못한 문장들, 완성되지 않은 생각들, 뻔해지고 지루해질 기회를 얻지 못한 삶. 비극으로 봉인된 천재성은 완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절된 것이다. 연약해서 산화한 찰나의 영광들. 비겁하게 박제된 청춘.


이와 반대로, 우리는 종종 비겁함을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생존은 언제나 비겁함으로 오해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비겁하게 보일 용기, 아니 더 나아가 비겁함을 감수할 용기. 그것이 없다면 삶은 지속되지 않는다. 남는다는 것, 지루한 반복을 살아내는 것은 단순하고 무기력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작은 포기와 매일의 작은 복귀를 필요로 한다. 자신을 해체하지 않고 버티는 기술은 혐오가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다.


결국 삶은 극적인 파국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지루함은 실패가 아니라 생존의 형식이다. 나는 이제 “지루하고 뻔한 어른으로 살아남는 것”을 긍정한다. 극적이지 않아도 좋은 삶, 반복되는 날이 계속되어도 허용되는 삶, 비명에서 시작되어 언젠가 문장으로 완성되(어가)는 삶. 살아남은 자의 서사는, 결코 하위 가치가 아니다. 이 세계를 계속 굴러가게 하는 단 하나의 힘이다.


언젠가는 단명한 천재로 기억되는 대만 작가가 남긴 《악어 노트》를 읽었다. 모두가 그를 천재라고 불렀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조금도 멋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호명 방식이 그의 외로움을 철저히 외면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을 영예로 치환하는 방식은, 생존하지 못한 자의 고통을 구조적으로 미화한다. 그를 천재라 부르는 행위는 그의 붕괴에 열광하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 날부터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죽음으로 완결되는 서사를 소비하는 일은, 살아남을 수 없었던 이들을 축소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다면 살아남는 일은 무엇인가. 살아남는 일은 때로, 아니 그보다 자주 지루하고 뻔하고, 아무런 영광도 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지루함을 감각하는 능력이야말로, 삶의 난이도 가장 높은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끈질기게 남는 것은 때로 비겁함까지도 감수하는 근성과 생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존속을 위한 능력이다. 나는 그 때의 생각 이후, 천재의 비극 대신 넝마 같은 생존의 이야기를 더 아끼게 되었다. 그저 끈질기게 세상에 남아서, 부끄러움도 불안도 껴안고는 몇번이고 비명을 문장으로 꿰기를 시도하며 살아남는 사람에게 마음을 둔다.


결국 삶은 비명으로 시작해 수치로 비틀리고, 긍정의 천 조각들을 꿰매 이어붙이며 버텨낸 끝에 생존으로 완결된다. 지루함은 실패가 아니라 생존의 형식이다. 나는 이제 지루하고 뻔한 어른으로 살아남는 일을 찬미한다. 반복되는 날들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도 좋은 일이다. 오늘도 살아 있고, 내일도 살아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으로도 그것은 이미 하나의 시절에 대한 승리이며, 남아서 살아내는 이야기야말로 이 세계를 진짜로 지탱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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