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너머의 풍경

by Aha

우리는 서로 다른 감각을 살아가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각자가 지각하는 색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두 ‘빨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단어 또한, 사실은 서로 다른 체험을 동일한 말로 포장하는 언어적 약속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사랑의 의미보다, 그 말 아래 덮히어 각자에게 고립된 감각들을 자주 생각했다.


내가 경험해온 감각은 말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 언어 바깥에 머무르려는 어떤 것을 늘 포함한다. 나는 그것을 비명이라 불렀다. 비명은 고통뿐만이 아니라, 언어화될 수 없거나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감각이 스스로를 증언하는 방식이다. 사회가 허용한 표현 체계 속에서 포획되지 않은 잔여, 의미 부여 이전의 소리이다. 비명은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남기는 흔적이자 생존의 표식이다.


그런데 내가 비명이라고 부른 감각을, 많은 예술가들은 사랑이라고 불러왔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거나 행복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원천적 에너지였다. 나를 쓰게 만들고, 누군가를 춤추게 만들고, 어떤 이를 그림 앞에 붙잡아두는 힘. 즉, 창작과 표현의 기원이 되는 충동을 그들은 사랑이라 이름 붙였다. 나는 그 힘을 해갈되지 않는 외로움이라고 불러왔다.


외로움은 결핍이 아니라 원동력이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를 압박할 때, 우리는 쓰고 말하고 표현하게 된다. 타자와 영원히 동일해질 수 없다는 사실, 이해받을 수 없음에 대한 체감은 절망이 아니라 발화의 이유가 된다.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바다보다 큰 바다 위에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띄우는 마음처럼, 거의 도달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지속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다.


따라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위이다. 관계의 완성이나 이해의 성취가 아니라, 도달할 수 없음 속에서 다시 닿으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실패가 아니라 실패의 지속에서 사랑은 형태를 갖춘다. 우리가 서로의 세계에 완전히 닿을 수 없다면, 그 닿지 못함을 인지하는 데서부터 연대가 시작된다. 이해를 전제로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비껴난 채로 근접해 있는 고립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공동체. 그 장면 전체가 사랑이라는 풍경을 이룬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각자의 비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외로움은 온전히 붕괴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어디선가 무언가를 쓰고 있고,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있으며, 또 누군가가 이름 붙이지 못한 감각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서로 닿지 못해도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증명이다. 외로움은 여전히 외로움이지만, 그 외로움이 서로를 가리키는 순간, 조금 덜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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