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의 윤리학

쓸모의 시대에 속지 않도록

by Aha

월요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당신은 두 가지 고통을 느낀다. 몸이 무겁다는 것, 그리고 '오늘도 아무것도 못 하는 나'라는 자책. 전자는 병이지만 후자는 정말로 합당한 고통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쓸모를 경쟁하러 바쁜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가지를 폭로하자면, 쓸모는 언젠가 우리를 배반한다. 정년이 되면 사라지는 직함, 끝나는 부모 역할, 시대가 지나면 불러주지 않는 기술, 가득하지만 입을 것 없는 철 지난 옷장처럼. 도리어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 것은 무용하고 때로는 시시하며 즐거운 것이다.


무용한 것의 근원은 존재 내부에 있다. 목적 없는 흥얼거림, 비밀스런 수집품처럼. 그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요구받은 적 없고 우리에게 의무인 적 없는 것이다. 쓸모는 외부로부터 요청된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아도 외부의 요구가 변하면 쓸모는 사라진다. 그러나 무용한 것은 요구된 적이 없다. 요구되지 않았으므로 철회될 수도 없다. 무용한 것, 쓸모에 무관한 것은 현상의 원인이 존재에 내재한다는 증언과 같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쓸모가 없는, 그 보잘것 없는 순간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적 증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이런 쓸모의 폭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무기력증' 담론이다. 무기력증에 대한 토로가 유행처럼 번진 시대, 무기력이라는 말에 유독 절망이 배어 있는 이유가 뭘까. 무기력증이라는 단어가 오늘날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기력이 없다는 신체적·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아마도 이 단어는 맥락상 자주 '기력이 없는 것', 거기에서 나아가 '그로 인하여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것'을 함께 의미한다. 즉, 기력이 없다는 말은 곧 ‘사회적 쓸모를 잃은 상태’를 뜻한다. “무기력증”이라는 말에 절망이 담기는 것은 무기력을 느끼는 인간이 그 자체의 주관적인 병리적 고통스러움에 더하여 사회적으로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존재론적 위기에 처했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의 사회가 우리의 쓸모로써 존재의 필요성과 존재 그 자체를 끊임없이 증명하기를, 끊임없이 은밀하고 집요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기력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다. 실제로 몸과 마음이 힘들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것. 전자는 당신의 현실이지만, 후자는 사회가 만든 환상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함은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 일을 못 해서 밥을 못 먹는 것과 일을 못 해서 존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찰나의 즐거움이 비극을 무화하지 못하듯이 수행하지 않음이 존재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재가 쓸모로 증명된다고 세뇌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존재 그 자체로써 전복하는 순간이다. 역설의 순간이다. 역전의 순간이며 전복의 순간이다. 존엄을 증명하는 폭로의 순간이다. 몸이 의지를 배반하는 무기력의 병리적 고통은 실존하겠으나 사실은 거기까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자체가 당신의 존엄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 우리가 '하다' 그 전에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쓸모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우리에게 쓰일 데 있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할 것을 가혹하게 요구하는 시대에 물을 주고 햇빛을 쏘이며 귀하게 돌보아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 시시하고 무용한 것들이다. 까닭도 없이 목적도 없이 시간을 소모하는 것들과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달린 꼬리표를 확인하자.


이 글은 그래서 그 흔한 실천적 제안도 하나 없이 무척이나 쓸모 없게 여기서 끝난다. 하나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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