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자각과 정직한 존재 전략
인간은 자기 선함을 믿을수록 더 잔인해질까.
‘따뜻하고 착한 인간’이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불편하다.
인간은 종 스스로를 낭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성', '연민', '따뜻한 마음'을 마치 종의 보편적 특성처럼 이름 붙이고, 일반화하고, 반복하여 호명한다. 그러나 이는 개체 간의 산발적 상호작용을 편집하여 종 전체의 본질인 양 포장하는 자기기만에 가깝다. 배부른 사자도 사냥감을 놓아주고,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사자의 '자비'라고 진지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유사한 행동에만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는가? 힘의 불균형이 고정된 환경에서 약자를 향한 시혜에는 언제나 가증스러움이 깃든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계급 차를 근본적으로 흔들지 않을 수준의 기부와 시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진정한 구조적 개선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안전을 전제로 한 개인적 불편함의 해소이다. 기부자는 이를 통해 도덕적 만족감을 얻고 자기 평가를 높인다. 시혜는 행위자의 지위를 재확인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이 메커니즘은 개인과 계급을 넘어 종 단위로 확장된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다른 종들의 서식지를 침범하면서도, 제한적인 생태보전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자연을 사랑하는 존재'로 낭만화한다. 동물원의 동물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원래 서식지는 이미 파괴했다. 원주민 노예를 해방하라고 외치지만, 그들에게서 땅과 자원을 빼앗은 폭력의 역사 위에 서 있다.
자기만족적 위선에서 나아가 실제로 타자를 위한 이타적 행위가 되려면, 그 모순적이고 얄팍한 지점에 대해 통렬하게 감각하고 있어야 한다. 괴로운 정신활동을 동반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나아가야 진실된가? 동물원을 폐지한 후 갈 곳 없는 동물들은? 계란을 안 먹는 것과 동물복지계란을 소비하는 것 중 무엇이 실질적으로 학대받는 닭을 줄이는가? 이 모든 질문들도 종간 폭력의 근원을 바꾸지 못한다.
현대의 SNS는 자기기만을 가속화하는 양성소 역할을 하고 있다. 종간 교감의 장면들이 편집되어 유통되고,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인간의 보편적 선함을 학습한다. 접싯물 같은 야트막한 정서적 만족감을 주지만, 이미지 이면에 실재하는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나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태와 사실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어쩌면 과거의 노골적 무관심이 오히려 더 정직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적어도 그들의 무관심은 부재 그 자체로 남을지언정 선함으로 포장되지 않으므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또한 일정 부분 위선의 맥락에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사유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장 큰 공리적 효용의 한계는 정신적 자기만족이다. 개인의 생 안에서의 실천이지, 사회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생각보다 요원하고 좌초가 잦은 일이다. 인간이 육류를 소비하지 않는 것은 되려 언뜻 오만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연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 초월적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선언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보다 먼저 포식자로서 동물을 먹는 과정에 수반되는 폭력을 직시하고, 아주 비싸고 때론 역함을 느끼며 어렵게 먹어야 한다. 진정성을 껴안고 직시한다는 것은 세상의 경계들에 존재하는 폭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내며, 숨기지 않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칭호를 객관적 진리처럼 가르치는 세계는 우스꽝스럽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종에게는 동물에게 마음이 있다는 생각조차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스템 안의 부분에 불과한 인간이 생태계의 '이상적 균형'에 대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자연은 예외적 이탈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계속 스스로 변화해 왔다. 인간은 겨우 근과거와 현재 시점의 찰나적 균형을 알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폭력의 역사 위에 우뚝 선 포식자 종의 일원으로서 애써 선하고자 하는 작고 큰 노력조차 위선이라면. 그저 순진함을 가장한 나태와 완벽함의 환상을 버리고,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폭력과 불평등의 구조를 인정하는 것이 모든 것의 영점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위안이 아닌, 고통을 감수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정직한 시선과 그에 따른 불편과 책임의 수용이다.
인즉, 폭력의 주체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다. 선함을 믿는 순간 폭력은 망각된다. 이 정직하고 괴로운 인식이 우리를 위선적인 계급의 성(城)에서 현실의 들판으로 내려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