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 | DEAR MEMORIES
0.
흠결을 찾아내는 것까지는 모두 같지. 흠결을 찾아내고도 여전히 애틋할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면 별 수 없이 사랑하게 된다.
1.
걸어 지나온 길과 풍경을 잊는다는 건 길을 잃는다는 거겠지. 그렇지만 그 모든, 앞뒤의 길과 풍경을 잃는다고 한들 절대 놓칠 리 없는 동행이 있다면 그 여행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 잃어서는 안되는 여행의 이정표가 길이 아니라 잃어질리 없는 당신일 때. 회프커에게 물러서지도 않고 마음도 사리지 않고 계속 해서 말을 건다. 말을 걸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당신이 어제보다 흩어지고 있다는 증명 뿐이어도. 내가 당신의 증인이라서 목격담을, 증언을, 다짐을, 약속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지만 대안이 없는 순간이 끝끝내 와서 요양소로 갔대. 그리고 잘 지냈대. 그래도 당신은 그러지마. 그래, 당신도 그러지마. 우리 약속하자.
2.
아직도 영영 감정 다루는 것이 서툴고 자연스럽지 못해서 얼마 안 되는 지난 일(어쩌면 너 하나)을 몇 번이고 자르고 분해하고 씹고 소화시키고 다시 꺼내어보고 의심하고 오려 붙이고 뒤집어 본다. 그 사건을 소화하는 데에 꼬박 지금까지의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의 너를 '견딘다'고 생각했다. 미숙하고 좀 못된 나는 모르는 무언가를 네가 견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견디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견뎌서 기어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라고, 얼마 전에서야 새로운 질문과 답이 쓰인 장을 발견했다. 아마도 소화시키는 동안 알아서 쓰여진 장이다. 긴 소화의 역사가 끝나간다. 여러 개의 함정, 꼬집고 긁고 밀고 당기는 괴로움을 주워삼키고 또 삼키고 견디고서 너는 기어코 예뻐하(려 애쓰)고 있었다.
3.
언제까지고 구질구질하고 어쩔 줄 모르던 시간들을 마지못해 이만큼 걷고 나서야 내 생과의 사이에 지겨운 기 싸움과 줄다리기가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낙관주의를 사랑한다. 수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겹겹이 쌓아 올린 넝마 같은 낙관주의. 집요하고 짖궃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부정하고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해서 이격마다 덧대고 잠구어버리고 기어코 넝마의 얼굴로 긍정하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순간을 비밀로 남겨두고 불안을 보살펴 융성할 땅을 주지 말자. 비밀은 좀 더 근사하고 고운 것으로 다시 고르자. 비밀이었던 것을 모두 끝까지 목격 당하고, 아무런 대단한 비극과 재난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인하고, 너의 비밀이 너를 해체하지 않았음에 같이 안도하고, 사소하고 어리숙하므로 귀여운 데가 있다고 기어코 말을 해서 잠시 부끄러워한 후에 아무렇지 않아지자.
4.
서로의 흠결을 눈치채고 살필 때, 그 흠결이 어리고 귀엽고, 나의 관용의 울타리 안에 춤 추어서. 흠결로 너를 알아보고ㅡ 흠결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돌보고, 흠결 주변에 무늬를 그려 넣어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고, 함부로 오래 애틋하고 싶어 몰래 발을 구르고, 네가 부탁한 일 없는데도 감히 보살피고 싶어 하는 것. 한 사람의 역사에 사사롭고 중요한 순간의 증인이 되어주기. 관대함의 범위가 다른 유난한 영토에 홀로 너를 심기.
5.
함부로 오래 애틋하게, 한 사람의 사소하고 중요한 생의 순간마다 증인이 되는 이야기를 상상했어.
6 - 추신.
네가 지나간 나의 사랑은 아마도 비로소 헤지고 낡기를 마다하기엔 늦어버린 지긋지긋한 낙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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