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언제 살만해질까
THE DAY : 11월 24일
새벽 3시
과제를 마무리한 후 취침한 시각이었다.
현석이는 그날따라 유난히 졸려하며 일찍이 잠에 들었다.
새벽 4시
소방점검 오면 들리는, 오작동하면 들리는, 화재 경보음이 들렸다. 그래서 처음엔 설마 불일까. 핸드폰과 외투를 입고 문을 열어 왼쪽 복도 보고 상황과 냄새를 체크했다.
상황은 조용했다. 하지만 냄새는 조금 이상했다.
냄새의 증거에 현석이를 깨워 옷 입고 나가자고 말한 뒤, 급한 마음에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나간 후에야 오른쪽 유리창 너머 실외기 실을 보았다. 창에는 금방이라도 불이 쓰나미처럼 덮칠 듯 불길이 가득했다. 그 순간 '살아야겠다. 도망가야겠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유리가 깨져 불이 복도를 덮칠 것 같았다. 현석이에게 빨리 나와라고 소리 지르며 반대쪽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처음 보는 같은 층 이웃들이 뛰쳐나왔다.
그 속에서 현석이는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엘리베이터를 탔고 한 분이 "왜 안 타세요?!"
"남자친구가 아직 안 나왔어요...!"
순간 내가 현석이를 버리고 왔나.. 돌아가야 하나.. 사람들한테 민폐일까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잠시 후 현석이가 도착했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엘리베이터는 작동이 되지 않아 다 같이 계단실로 들어갔다. "불길에 손잡이가 뜨거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라는 말이 들렸다.
사실 이런 이성적인 말들이 긴급한 상황에는 행동에는 잘 전달이 안됐는데,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게 마음에는 감동이었다.
12층에서 1층까지 일정한 속도로 계속, 계속, 내려갔다. 무사히 대피했다.현석이는 내 목도리를 챙겨주었다. 왜 늦었냐 묻자. 꼭 챙겨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고..
아무튼 처음 겪는 화재에 무슨 일인지 어리벙벙했고, 같은 건물에 살던 동생에게도 연락이 왔고,
소방차는 거의 10대가 도로를 가득 채웠고, 누군가 일찍이 신고해 주신 덕분에 불은 무사히 꺼졌다.
분명 전 날까지는 따듯했던 날씨가 추워져 맨발이 시리고 추워 편의점에 들어갔다. 무인 편의점은 피난소가 됐다. 화재의 매캐한 냄새가 싫어 밖으로 나와 다른 갈 곳을 찾아다녔다. 다른 편의점에 가 양말과 마스크를 샀다. 24시간 운영되는 무인카페가 생각나 찾아갔더니 그곳도 이미 피난처가 돼있었다. 우리는 남은 테이블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누웠다.
평소라면 익숙할 캐롤이 들리는 밝은 평온한 이 카페의 분위기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소방차 몇 개가 빠지는 걸 본 후, 집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카페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건물에 들어가 보니, 불을 끄는 데 사용한 막대한 물들이 상층부부터 타고 내려왔는지, 엘리베이터와 계단실 폭포처럼 물이 쏟아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집을 포기하고 라꾸라꾸가 있는 학교, 설계실에 가기로 결정했다. 찬 바람을 너무 많이 쌔 뜨끈한 컵라면을 사서 갔다.
설계실에 들어와 히터를 틀고, 컵라면을 먹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몸은 멀쩡하니... 내일 수업은 가야겠지...? 근데 정신은 안 멀쩡한 것 같기도 하고..." "인생이 원래 사기도 한 번 당하고, 화재도 나는 걸까?" "1년에 한 번씩 꼭 이사하다가, 이 집에선 젤 행복한 일상을 보냈는데, 왜 반년도 안 지났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컵라면을 먹고 라꾸라꾸에서 탄 냄새와 함께 눈을 붙였다. 21살 사기를 당하고 회사에서 악몽 속에서 잠들던 때가 생각났다. 오늘도 악몽을 꾸진 않을까...? 이날은 다행히 현석이가 있어서인지 악몽 없이 잠깐이나마 잠을 잘 수 있었다.
오전 9시
10시에 설계 크리틱 수업이 있어 같은 팀 친구가 설계실에 들어왔다. "언니 왜 여기서 자?" "집이 불났어" 친구는 안 믿겼는지 별 반응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잠을 깨고 친구들에게 상황 설명을 했고, 여하튼 크리틱 준비를 해서 오전 10시 잠옷 차림으로 씻지 않은 몸으로 교수님께 설계 크리틱을 무사히 받았다.
참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 같으면서도 평소와 다른 일상 같았다. (이런 하루들을 계속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오전 크리틱을 마치고, 그래도 집에 한 번 가보고,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봐야 할 것 같아. 교수님께 집 내부는 안 타고, 몸은 멀쩡하지만, 집에 불이 나서, 오후 수업을 빠져야 할 것 같다 말씀드리고 학교를 나왔다.
오랜만에 전 회사 동료 언니에게 우리가 요즘 빠진 포켓몬 빵 스티커를 얻었다고 연락이 왔는데, 난 집에 불이 난 근황을 전했고. 별생각 없는 우리와 달리 언니는 놀라며, 오늘 잘 곳은 있냐며, 당분간 우리 집에서 자라고 먼저 손을 내밀어 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오늘 하루 정도만 사우나에서 자고 내일부터 집에서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상황을 보고 다시 답을 주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망가져있었고 12층을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계단은 다 젖어있었고, 불쾌한 탄 냄새가 났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은 뿌연 공기로 가득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냄새만 맡아봐도 오래 맡으면 질식사할 것 같은 공기였다. 현석이만 창문을 열러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은 미세한 검은 필터가 씌어졌다. (어느 정도냐면.. 닫힌 냉장고 안까지 들어갈 정도로...)
피해 신고에 정신없는 관리사무소, 부동산.
우리도 대략적인 피해 신고를 작성하고, 병원에 갔다. 처음엔 이비인후과를 갔다. 이비인후과에서 내과로 가보라고 했고, 내과에서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안내해 줬다. 돌아 돌아 늦은 시간 큰 병원 응급실에 가 검사를 받았다. 처음 가보는 응급실이었다. 사람들이 많을 거라 예상했던 응급실은 아주 한적했다. 호텔 로비 같은 접수대에서 접수를 했다. 대기를 하다 의사 선생님이 나와 우리의 증상은 간단히 물어본 후 놀이동산 입장 팔찌 같은 것을 채워준 뒤 응급실 내부에 들어갔다. 피검사와 엑스레이를 찍었다. 응급실은 모든 게 빨리빨리였다. 수액도 빨리빨리 떨어졌다. 검사 결과 몸엔 이상이 없었다. 남은 수액을 맞으며 잠시나마 편하게 누워 쉴 수 있었다. 한편으론 응급환자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결제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우린 하루이틀이 아닌 꽤 오래 우리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아 사우나가 아닌 세종시에 언니 집으로 버스를 타고 넘어갔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세종시 집에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언니는 정말 감사하게도 혼자 있기 외로웠는데 너무 좋다며 우릴 반겨주었고, 써보지 못한 다이슨 드라이기에 머리를 말리고, 포근하고 따듯한 이불에 잠이 들었다. 2박을 머물면서 기절하듯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