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자는 아이 둘을 낳고 여신이 되었다. 추앙받아 마땅하나, 오늘도 변기를 올리고 소변을 보지 않는 일개 인간과 싸우고 있었다. 여신의 품위를 지키게 하지 못하는, 내 인간적 실수를 반성했으나 앉아서 소변을 보라는 말에는 고개를 끝까지 숙일 수가 없었다. 성 정체성까지 포기하면서 여신을 추앙하기에는, 일개 인간이 살아온 삶은 너무나 거칠고 뻣뻣하였다. 그리하여 전지전능한 잔소리 신공에도 굴하지 않고, 여신과 맞서 싸우고 말았다.
부부싸움에 승자가 있을까?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까짓것 앉아서 소변을 보겠다 하고, 조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어려워서 괜히 언성을 높이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밖으로 나가면 지는 것 같고, 안 나가자니 배도 고프고 소변이 또 마려웠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는 역시 아이들 핑계가 답이다. 나는 애들을 씻긴다는 핑계로 졸렬하게 닫은 문을, 합법적으로 열었다. 그리고 일개 인간임을 확인하듯 추앙을 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확실한 행동이자 추앙, 가스렌지에 라면 물을 올렸다.
내가 아내에게 하는 추앙은 다름 아닌 라면이다. 여신이 인간 세계를 끝내 떠나지 못하는 것도 일개 인간이 끓인 라면 때문이라는 고백을 들은 바 있다. 20년 자취 내공이 고스란히 스며있을 뿐만 아니라, 여수 어머니가 직접 담근 잘 익은 김치까지. 능히 신의 반열에 오를만한 라면을 먹자, 아내는 쫄깃한 면발을 먹으면서도 풀어지고 있었다. 몇 마디 잔소리를 얼큰하게 먹어야 했지만, 부부싸움은 잠시 휴전을 갖게 되었다.
요즘 인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처음 추앙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 사랑이 아니라 추앙이라니. 추앙, 생경한 말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실로 놀라웠다. 추앙이라는 말 하나에 인물의 성격이 바뀌고, 갈등이 생기고 마침내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드라마 명대사는 많아도 단어 하나로 이토록 많은 의미와 여백, 해석을 가능하게 했던 작품이 있나 싶다. 더불어 누군가를 진실로 추앙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아득한 생각도 머무른다.
추앙은 왠지 사랑 이상의 말이자, 종교적인 마음이 깃든 말이다. 높게 받드는 것도 모자라 우러러봐야 한다니. 인간 따위에게 그런 게 가능하겠는가. 앉아서 소변을 보는 일이 내게는 더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새삼 추앙이란 단어도 작아졌다는 것을 알게 한다. 얼마든지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있는 말이자,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말이 되고 있다.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힘내라는 말 이 멋진 말들이 오히려 궁색해 보일 때가 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하는 말이 될 때가 그렇다. 말이 헤퍼지면서 의미가 작아진 것이다. 반면에 추앙은 단어가 작아지면서 의미가 넓어지고 있다. 어떤 고백이나 위로의 말보다 전지전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더불어 추앙은 말에서 끝나지 않고, 라면이라도 끓이게 하는 힘이 있다. 드라마에서도 추앙은 곁에 있어 주는 것, 함께 뛰어 주는 것, 사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 함께하지 않았는가. 오늘은 어떤 말보다 곁에 사람을 추앙해봤으면 좋겠다. 나도 여신을 끝까지 추앙하기 위해 설거지까지 책임지고자 한다. 변기통 똑바로 올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