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게 살아가는 이유다.
제목은 많이 들어서인지 익숙하다. 내용을 보지 않고 제목만 들었을 때 '제작자나 감독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목을 끌려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췌장을 먹고 싶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좀비 영화일 꺼란 생각도 했다.
책과 게임 그리고 알바. 중간중간 영화로 끼니를 때우는 내가 오늘은 이 애니메이션을 선택했다. 이전에는 애니라고 하면 영화보다 한 단계 낮은 영상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애니를 보고는 그냥 영화와 다를 게 없는, 아니 더한 감동을 받았다. 감동에는 영화나 만화나 구별이 없다.
이 영화는 물론 신파로 여겨질 만큼 눈물을 짜냈다. 아니 짜냈다고 하는 건 잘못된 표현이다. 진실된 눈물이랄까? 마음이 미어졌고, 주인공 남자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었다.
췌장을 먹고 싶다는 말에 베베꼬인 눈으로 자극적인 홍보수단이라고 말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이보다 더 주제를 잘 드러내는 제목이 있을까 싶었다. 당연한 제목이었다. 조금의 과장도 덜함도 없이 꼭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무뚝뚝한 남자 '시가 하루키', 죽음 앞에서도 더없이 활발한 여자 '사쿠라'
같은 반 친구인 사쿠라가 췌장암에 걸린 사실을 사쿠라의 '공병 일기(병중 일기)'를 통해 알아버린 하루키. 죽음을 목전에 둔 사쿠라는 모든 관계를 외면하고, 책에만 파묻혀 사는 하루키에게 매력을 느끼고 죽기 전 하루키와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 시간이 지나며 하루키는 점점 사쿠라의 진심을 알게 되며 그동안 자신만 알던 모습에서 변하여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인간으로 거듭나려던 중 사쿠라가 살인사건에 휘말려 죽게 되었음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된다. 큰 중격에 빠진 하루키는 얼마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 충격을 가라앉힌 후 사쿠라의 어머니를 찾아가 사쿠라의 공병 일기를 보여달라고 한다. 사쿠라 역시 하루키가 올 것을 예상하고 어머니에게 미리 말해 두었고, 그 공병 일기를 읽은 하루키는 사쿠라가 죽기 전 자신이 보낸 마지막을 보낸 문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란 말이 사쿠라에게 전달된 것을 확인하고 오열한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으로 사쿠라의 절친인 쿄코와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말에 쿄코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하루키의 오열 장면에서 나도 똑같이 오열하며 그 슬픔에 공감했다. 못난 자신을 알아봐 주고 사랑해주었던 사쿠라를 떠나보내는 내 마음이 미어졌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너의 그 썩은 췌장을 먹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 하루키의 마음이 너무 애처롭고 서글펐다.
영화가 시사해주는 바가 많이 있을 꺼라 생각한다. 먼저 일본 사회의 많은 이들을 타깃으로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히키코모리'라고 하는 '은둔형 외톨이'의 시초가 일본 사회인 것을 안다. 혼밥족의 첫 출현 또한 일본 사회인 것으로 생각된다. 관계가 무너지고 혼자 살아가는 외로운 인생에서 '함께'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루키가 사쿠라에게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거야?'라고 물을 때 사쿠라는 '관계'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며, 싫어하는 사람과 다투기도 하고 우리는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관계로 인해 살아가는 거라고 말했다. 바로 그거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함께 살려고 사는 거다. 관계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물론 모든 관계를 멀리하고 홀로 살아가려는 하루키에게도 매력은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함께 살아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사쿠라의, 아니 이 영화의 메시지인 것이다.
뜻하지 않게 감동을 받고 글을 쓰고 싶어 졌다. 내가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누군가를 돕는다고 노력했지만 그들에게 하루키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 무너져 내리는 삶 속에서 어떤 의미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