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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Feb 27. 2019

아버지의 자서전

이러다 조선왕조실록 나올지도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살아있을까?' 아버지가 현상을 부탁한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곧장 '의미 있는 삶이란 대체 뭘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몹시나 씁쓸하고 못마땅해서이다. 그저 남는다면 사진 한 장 정도 남을 뿐, 아버지가 지인들과 찍은 소싯적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구며, 어디에 살았으며,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이 없고, 그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은 아버지 같은 사람들 또한 그렇게 잊히리라는 사실을 안다는 자체만으로도 지혜라 여길만 하다. 그러니 난 지혜롭다.


  이렇게 날 지혜롭게 만든 것은 삶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때문인 듯하다. 인생은 짧기에 잘 살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인생은 짧기에 별거 없다는 식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난 후자이다.


  예전에는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낙관적 인생관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내뱉는 말들에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느냐. 인생이 안 풀리기 시작 한때부터이다. 긍정 남이었을 때는 사랑, 생명, 공생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정의, 개혁, 전복을 생각한다. 여기서 전복이란 이념 패러다임의 국가전복이다. 자본주의 경쟁방식에 질색하며 이렇게 됐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 사민주의, 이제 다른 어떤 새로운 이념을 기대한다. 이념의 과도기인 시절 왜 그리도 사람들이 이념 따위에 목을 매며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이 났었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삶이 힘들면 나라 탓을 하게 되며, 나라가 취한 스탠스에 목을 매게 되는 법이다.


  사족이 길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결국 삶이 허무하다는 거다. 아버지가 부탁한 흑백사진 몇 장을 쥐고, 땅속에 묻힌 사람들을 생각한다. 대부분의 인생은 세대를 한두 번만 거듭하더라도 거반 기억되지 않음을 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의 위대한 업적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시대의 역적, 나라를 말아먹은 인간들도 후대에 기억된다.


  그러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오랜 역사 속에 남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아니 달리 말해보겠다. 평범한 인간이 가장 오래 기억될만한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역사에 획을 긋는 것이 아닌 그저 한 두 세대에 기억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아버지는 찾으셨다. 자서전이다. 벌써 몇 년째 써내려 오고 계시다. 신실하게 신을 믿는 아버지가 굳이 자서전으로 불멸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면 왜 자서전에 온 힘을 다하시는 걸까? 문명의 혜택이라곤 하나도 받지 못한 채 아날로그도 아닌, 디지털은 더더욱 아닌, 그 이전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사용할만한 붓펜을 들고, 그것도 좌측 세로로 쓰고 한자도 섞어가며 말이다. 그렇게 자서전은 조금씩 조금씩 완성되고 있다.


  올해 84세인 아버지가 자서전을 완성하기 위해 벌써 수 년째 힘과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서전에는 자신의 걸어온 삶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전부다. 완성본을 본 것은 아니나 사진 현상을 위한 스캔을 도맡아 하고 있는 나로서 자서전에 들어갈 사진 대부분을 살펴보니 그러하다.


  그렇다면 결국 자서전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더 좁혀 말하자면 나와 내가 낳을 자식을 위해 쓰고 있는 것이다. 손자가 성인이 될 무렵 너의 할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단다. 너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이런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자서전인 것이다.


  아버지의 자서전에 조력자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그 완성된 자서전을 정말 대대로 물려줄 작정이다. 물려줄 자식이 있을지는 모르나 설령 없더라도 내 당대에 소중히 보관하며 때때로 꺼내보아 아버지를 기억한다면 아버지는 꽤나 흡족해하실 것이다.


  아버지가 자서전 초고 오탈자 확인을 부탁했다. 400페이지가 넘는 초고를 넘겨받았다. 이제 오탈자를 확인하며 자서전 내용 대부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을 들여다보고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꺼내어 볼 시간이다. 내 삶에도 어떠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앞으로 아버지 자서전의 해독과 풀이를 이곳에서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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