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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Aug 14. 2019

평양 가서 평양냉면을 먹겠다.

적응 좀 하고 가자.

평생, 냉면은 함흥냉면만 있는 줄 알고 살아왔다. 함흥냉면이 아니고서는 김밥 땡땡, 명인 땡땡 등지에서 팔고 있는 살얼음 동동 냉면이다. 이름은 없다. 물냉, 아니면 비냉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던 내가 작년부터 평양냉면을 찾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쯤 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오붓하게 냉면 면발을 들어 올리는 장면과 이산가족 상봉 때 옥류관 평양냉면을 먹는 남북의 가족들을 보고 나서부터 였던 것 같다. 살면서 평양냉면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건 마치 함흥냉면의 아류작 같은, 어찌 보면 짝퉁 같은 생각이 들어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명만 갖다 붙이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상술이 싫었다. 그런 상술로 따지자면 개성 냉면, 원산 냉면, 해주 냉면, 개마고원 냉면 등등 다 원조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가.


김정은 위원장이 공수해온 평양냉면을 먹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평양냉면에 대한 사실상 팩트체크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이북에는 평양냉면이 있었다. 이후 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흐르는 평양냉면을 접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호기심이 컸고, 흥남 출신인 아버지에게 함흥냉면이 아닌 다른 냉면도 이북에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옥류관 냉면을 찾아야 했고, 아직 똑같은 것이 없다면 비슷한 무언가라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가 왔다.


미야와 점심을 먹으려 죽전 신세계백화점을 돌아보던 중 평양냉면 전문점이란 글귀가 쓰여있는 정통 평양냉면집과 마주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밖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지만 나의 도전정신은 1시간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러 곳에서 주워들은 얘기가 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둥. 전혀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는 둥. 도저히 안 되겠으면 첨가해 먹어라. 등등의 얘기다. 냉면이 맛이 없을 순 없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둥지 땡땡도 그렇게 맛있는데 하물며 평양의 대표음식이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평타는 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맛이 없었다. 수십 년간 냉면을 최고의 외식메뉴로 생각했던, 민간 전문가의 식견으로 도저히 맛있다고 할 수 없는 맛이었다. 사람들의 평은 어찌 그리 정확한지. 대체 고기육수 맛 쪼끔에 간도 없고, 그리 시원하지도 않은 이 평양냉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맛을 따지지 말고, 추억에만 잠겨 먹어야 하는 음식이란 말인가? 이걸로 평양냉면의 도전기는 끝마칠 위기를 맞았다.


이후 미야의 추천으로 용인에 있는 또 다른 평양냉면집을 찾아갔다. 재도전이다. 이곳 역시 30분 이상을 기다리며, 이 맛없는 음식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의문에 의문 거듭하며 번호가 불려지길 기다렸다. 이전과 같은 맛이라면 이젠 평양냉면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도 될 것 같았다.


사실상 평양냉면이 아닌 메밀 국숫집이다. 살짝 비슷하다니 내 눈높이를 하향 조정한 것이다. 역시 얼음 쪼가리 하나 떠있지 않은 전혀 시원해 보이지 않는 육수와 단정히 말아 나온 메밀면이 눈에 띄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숟가락을 들어 육수를 떠서 입에 밀어 넣는다. 


맛이 없다. 큰일이다. 맛도 없는데 내부는 덥고, 육수조차도 시원하지 않다. 뭐지? 이열치열인가? 간도 너무 심심했다. 아니 이북 말로 슴슴하다는 말이 더 들어맞는 것 같다.


죽전 평양냉면집처럼 비싸진 않았지만 남기고 갈 정도로 못 먹는 음식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끝끝내 입에 적응시켜 본다. 노력이 가상했는지 마지막 국물?을 들이켤 때 뭔가 느낌이 왔다. 이 한단 어가 어울리겠다. '개운하다.' 아니 '깔끔하다'란 표현이 더 내 느낌을 완성시켜주는 듯하다. 성공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나쁘지 않았다는 말로 가름한다.


이후 이곳을 몇 번을 더 갔다. 어느 순간 주인아주머니가 마법의 물약을 탔는지 맛이 달리 느껴진다. 맛있다. 드디어 맛이 있다는 표현이 내 입에서 나왔다. 장족의 발전이다. 그리고 올 초쯤 마지막으로 그곳을 찾았을 때 극찬을 마지않았다. 고개를 가로 흔들며  박수를 쳐댔다. 이곳은 국가에서 음식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주인장은 인간문화재다.



이후 양평에 놀러 갔다가 또다시 미야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훅' 들어왔다. 근처 평양냉면과 비슷한 냉면집이 있다고 말이다. 옥천에 있는 냉면 장인을 찾았다. 허름한 곳에서 건물 짓고 이전했다고 하니 맛이 있긴 있겠군 하고 생각했다. 냉면보다 앞서나 온 수육 같은 머리 고기는 뭐가 메인인지를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역시 메인은 명불허전! 이곳의 냉면은 나의 환상을 완성시켜주는 최종 보스다. 진짜 왕, 끝판왕이다. 평양에 있는 평양냉면이 이런 맛일 거라 상상하며, 만약 그렇다면  난 삼시 세 끼를 이 냉면만 먹을 수도 있다.


국물?을 원샷했다. 양도 푸짐하고 가격도 사랑스럽고 게다가 이곳은 이전과는 다르게 육수가 차가웠다. 진짜 평양냉면과 비슷하긴 할까? 평양에서 너무 멀리 온건 아닐까? 아님 평양으로 착각한 것인가? 어찌 됐든 평양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은 된다고 생각하고 아주 만족스럽게 그릇을 깨끗이 비운 뒤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 정도면 평양냉면 마스터가 됐을까? 처음에 못 먹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적응이 안됐던 것뿐이다. 아버지가 이북사람이니 나도 이북의 피가 흐르고 있어.(그렇다고 빨갱이라 하진 않겠지?) 이런 내가 평양냉면을 안 좋아할 리가 있겠어? (혹은 안 맞을 리가 있겠어?)


이제는 평양으로 향하는 열차표를 산거나 진배없었다. 그리고 섭씨 35도를 웃돌아 푹푹 찌는 지난 주말 오후 어깨를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들어가자고 하여 갑자기 생각난 평양냉면. 찾아보니 분당에도 있더라는 말씀. 반가운 마음에 아내와 이북식 냉면집에 들렀다. 검색을 해보니 이곳은 확실히 평양냉면집이다. 식당에 평양냉면이라고 쓰여있지는 않았지만 이북식 냉면집이라는데 함흥냉면이 아니라면 평양냉면뿐이지 않은가.


이 더운 날 사람들이 많을 꺼라 생각했던 판단이 빗나 갔다. 열 팀 가량 받을 수 있는 작은 맛집 포스의 집이었지만 우리를 제외한 한 팀이 먹고 있었고, 그나마 그 한 팀도 한 명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평양냉면 마스터인 나도 불길함이 엄습했다. 물냉 하나 비냉 하나를 주문했다. 곧이어 몇몇 커플이 들어온다. 지금 들어오는 이들은 단골일까? 우리처럼 신생일까를 생각했다.


냉면이 나오고 감별사답게 숟가락으로 육수를 떠서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입맛은 이제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 입으로 들어오는 이 국물? 은 분명 맛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금 기립박수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평양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나. 맛. 이. 없. 다.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에 빠졌다. 아내와 눈이 마주치고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들켰다. 평양냉면 감별사를 자처하며 전국 팔도 평양냉면 투어를 할 기세였던 내가 여기서 무릎을 꿇다니.


몇 번을 먹어봐도 맛이 없었다. 심지어 손님이 주문하면 뽑기 시작한다는 면조차도 맛이 없었다. 이를 어어할꼬. 아내의 비냉을 뺏어먹었다. 천국의 맛이었다. 비냉은 거의 함흥냉면 수준이었다. 하지만 물냉은 무슨 맛인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평양냉면에 흠뻑 빠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때로. 


식탁에 준비되어 있던 식초와 겨자, 절임무를 듬뿍 넣었다. 맛의 변형이 필요했다. 그리고 육수를 떠먹어보니 이젠 수저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다. 신개념 냉면이 탄생했다. 이름을 명명해야 할 것 같았다.


평양냉면 적응기는 아직도 갈길이 멀지만, 언젠간 기어코 평양에 가서 평양냉면은 맛보리라. 평양냉면 맛을 모른다 하여 통일을 미루지 말라. 아버지와 내가 손 붙잡고 평양을 거쳐 아버지 고향 흥남(함흥)에 가서 두 냉면의 결판을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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