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시인의 시에 나타난 사물과 객체의 물질성에 대한 사유
기후 위기가 21세기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스웨덴 영하 43도에 국가 마비, 영국 300곳 홍수”라는 기사가 뜰 정도로 기후 위기가 심각해졌다. 현재의 기후 위기는 근대 문명의 시작과 함께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해수의 이상기온 현상, 지구온난화 등과 같은 환경 문제가 제기됐다.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먹거리를 걱정할 만큼 심각한 상태인데다 인류세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근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기후 위기를 견인하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근대적 과학혁명의 논증 방식을 철학에 그대로 적용한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주장하면서 존재와 비존재 개념을 탄생시켰다. 그로 인해 인간과 자연, 영혼과 육체, 주체와 객체 등으로 세계가 이분화되면서 사유와 존재의 상관성을 주장하는 상관주의가 태동했다. 이에 따라 사유 밖에 있는 객체들은 모조리 부정됐다.
근대 과학혁명과 근대철학이 인간 외 모든 것을 비존재로 규정했다면 20세기에 탄생한 양자역학은 이분화된 근대적 사유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양자역학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원자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와 더불어 원자로 구성된 모든 존재는 상호 작용을 통해 생성 변화되는 관계라는 것.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인식론적 주체 개념을 거부하면서 사물과 객체의 물질성과 실재성에 집중하는 새로운 철학의 토대가 됐다. 대표적으로 21세기부터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한 신유물론과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 등이다. 신유물론이 원자로서의 물질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힘과 행위성에 주목하는 이론이라면 사변적 실재론은 인간과 무관한 방식으로 사물의 실재성을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이론이다. 또 객체지향 존재론은 모든 상관관계에서 벗어나서 객체의 물질성과 실재성을 사유한다.
한 마디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인식 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원리에 따라 원자론적 존재론으로 설명된다. 이번 평론에서는 영자역학의 성과에서 싹튼 새로운 철학 이론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 후 최근에 발표된 이어진 시인의 시에 나타난 존재론적 접근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를 삼고자 한다.
1. 철학사적 담론을 견인한 과학의 성과
17세기 과학혁명이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을 통해 인간 외 모든 것들을 비존재로 규정했다면 현대 과학이 이룩한 양자역학의 성과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인 근대적 사유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우선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나오는 횡단성 개념에서 ‘신유물론’과‘사변적 실재론’,‘객체지향 존재론’과 ‘양자 도약’과 ‘양자 얽힘’ 관련 연관성을 먼저 개괄해 보는 것으로 신유물론으로 분류되는 철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 횡단선은...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하나의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건너뛰게 해 준다. 그러면서도 이 횡단선들은 결코 다자(多紫)를 일자(一者)로 환원시키지 않고, 다자를 하나의 전체로 그러모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다자와 매우 독특한 통일성을 확립하고, 전체로 환원할 수 없는 이 [모든]파편들을 합병하지 않은 채로 그 각각을 긍정한다...여행은 다양한 장소들의 횡단선이다.... 그러므로 여행은 장소들이 서로 소통하게 해 주지도 않고 장소들을 결합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장소들이 가진 (차이)자체만을 모든 장소들에 공통적인 것으로 확립할 뿐이다. (이[모든 장소들에] 공통된 확립은 확립된 차이와 다른 차원에서, 즉 횡단선에서 이루어진다.
들뢰즈가 설명하고 있는 횡단성의 핵심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하나의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건너뛰게 해 준다.”는 부분이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에 들어있는 원자핵(양성자)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데 이때 전자는 정상궤도 상에서 불연속적으로 순간 이동을 하면서 제 위치를 바꾼다. 이렇게 전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는 것을 양자화되었다고 하고, 이런 전자의 움직임을 양자 도약이라고 명명했다.
위 글에서 들뢰즈는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건너뛰는 횡단성을 전자가 정상궤도에서 불연속적으로 위치를 이동하는 양자 도약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자 도약을 신유물론적으로는 횡단성이라고 하고 ‘객체지향 존재론에서는 감각적인 것을 매개로 다른 객체에 관계한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이 횡단선들은 결코 다자(多紫)를 일자(一者)로 환원시키지 않고, 다자를 하나의 전체로 그러모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다자와 매우 독특한 통일성을 확립하고, 전체로 환원할 수 없는 이 [모든]파편들을 합병하지 않은 채로 그 각각을 긍정한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행성과 별들은 각각의 고유성을 갖고 있어서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동시에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하고 있어서 전체로 그러모을 수도 없다는 것을 ’객체지향 존재론’에서는 고유성을 가진 각각의 객체들이 모든 객체에 대해 물러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각각의 행성과 별들은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질서에 따라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한편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양자얽힘의 관계에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은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에서 세계들의 상호 의존성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를 횡단한다는 것은 양자 도약처럼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인식론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언어체계의 질서인 동시에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창조적인 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현재의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의미로 도약한다는 점에서 전자의 불완전성과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양자얽힘의 과학적 성과는 지금까지 비존재로 명명되었던 사물들의 행위성에 초점을 맞추는 신유물론을 싹 틔우는 기초 토양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동양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던 불교에서는 이미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다고 해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는 것도 주목해 볼 만한 대목이다.
2. 신유물론의 등장으로 되살아난 물질
신유물론 철학자들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힘, 역량, 능력, 행위성에 주목한다. 또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모든 물질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근대의 입자론에서는 물질의 운동을 외부에서 부여된 모종의 힘에 의해 발휘된 효과로 봤다면, 신유물론적 관점에서는 물질의 내부에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과 역량에 의해 운동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신유물론의 핵심은 물질이 가진 특이성에 집중하는 능동적 물질관, 생기론, 포스트휴먼니즘, 몸과 마음의 일원론, 관계론적 존재론 등을 이론화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근대의 이원론에서 가치 절하되었던 물질, 자연, 비인간의 관계적 행위성에 주목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 즉 인간 외 물질을 비존재로 구분했던 근대의 이분법적 관념에서 벗어나 물질로 대변되는 비인간과 인간을 대등한 하나의 물질로 인식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일원론적 관계 복원을 위한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2-1.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실재론’과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
원자론적 존재론에서 사변적 실재론자인 화이트헤드와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이 촉발됐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세계가 기본적으로 원자적인 피조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봤다. 그레이엄 하먼도 화이트헤드의 원자론적 존재론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다. 두 사람 모두 우주론적 견해에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동시에 원자에 대한 이해서 방법론을 도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출발이 같은 두 사람이 지향하는 존재론적 접근 방법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먼이 객체들을 분리된 ‘무수한 작은 진공’으로 볼 때 화이트헤드는 우주를 정교하게 연결된 총화로 본다. 먼저 하먼은 객체들은 모든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언제나 지각과 순전한 인과관계로 적절하게 측정할 수 없는 현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객체는 다른 객체와의 관계에서 소진되지 않으며 또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하먼의 이러한 객체에 대한 존재론적 견해는 양자 관측에서 나타나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해석된다. 분명히 존재하는 실재이지만 측정 과정에서 사라지는 양자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반면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평등은 상호 간의 접촉, 존재들 간 파악을 통해 존재가 다른 존재를 움켜쥐며 반응하고 촉발되는 상호의존 관계로 본 것이다. 모든 현실적 계기는 다수의 파악을 통합하면서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경험으로써의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논리는 양자얽힘 현상으로 설명된다. 양자얽힘은 양자역학의 중요한 현상으로, 두 개 이상의 양자 시스템이 서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상호 의존성이 존재하는 현상이다. 양자얽힘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양자얽힘의 원리에 의해 서로 상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원리이다.
화이트헤드는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적 평등에 대해, 사물들의 상호연결을 부정하는 철학은 진정한 개별자들이 상호연결된 세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실체적인 사물은 다른 실체적인 사물을 불러들이지 못한다고 거부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법론을 상반된 견해로 맞섰지만 결론은 둘 다 원자론적 존재론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입각한 양자얽힘의 원리가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한다면 양자 관측의 불확정성과 우연성에 의해 드러나는 전자의 양자도약의 원리는 ‘객체지향 존재론’에서 발견된다.
3. 사물의 객체성에 집중하는 시편들에 대한 고찰
이원론적 관념론에 대한 회의는 그동안 전 예술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시도됐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도 탈 인간중심주의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사물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전 예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언어를 다루는 문학 분야에서도 얼마 전부터 상관주의적 사유에서 벗어나 사물과 객체의 물질성에 집중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시는 장르의 특성상 언어를 떠나서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시적 영감을 표현하기 위해 비유법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보지만,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본 언어체계의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대상을 사유하려는 노력이 시 속에 조금씩 드러나는 상황이다. 최근에 발표된 이어진 시인의 시 작업을 통해 최근 시 창작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객체지향 존재론’적 접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3-1. 사물의 말을 번역하다
‘객체지향 존재론’적 접근은 우리가 인식 절차에서 놓치고 온 사물의 실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이론적 작업이다. 이와 관련해서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사물은 우리가 그 사물을 포착하고 이해하는 특수한 방식을 언제나 능가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활동한다.고 설명한다. 즉 사물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 하지만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상식이나 경험 내에서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이나 상식선에서 만들어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언어가 가진 딜레마다. 따라서 시 창작 과정에서도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새로운 사유 방식의 언어체계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오후엔 풀밭 위에 앉아 식사를 한다 이것 좀 더 먹어
너는 접시 위에 꽃잎을 올려놓는다 아카시아 무성한 숲
에서 비릿한 잎 냄새가 몰려온다 이런 냄새는 아무리 먹
어도 질리지 않아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멀리서 먹구름
이 후드득 떨어지고 너는 다시 아카시아 향기를 접시 위
에 놀려놓는다
중략
하나만 더 먹어 너는 꽃잎 한쪽을 내 그릇 위에
올려놓으며 꽃 냄새로 빚을 갚을 수 있는지 묻는다 산등
성이에 매달려 있던 구름이 하늘하늘 떨어진다 이런 냄
새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아 우리는 풀밭 위에서 식
사를 한다 꽃 멀미가 이는지 두 눈에 꽃물 든다
-이어진 「식탁 위의 풀밭」 부문
이 시는 누군가와 풀밭에 마주 앉아 식사 중인 모습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풀밭 식탁 위에 올라온 메뉴들이 전부 ‘꽃잎’이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묻어온 비릿한 냄새이고, ‘아카시아 향기’이다. 두 사람은 서로 꽃잎을 접시에 놓아주며 다정하게 식사를 한다. 그러는 사이 산등성이에 매달려 있던 구름이 하늘하늘 떨어진다. 두 사람은 자연이 풍족하게 내어주는 식사에 흡족해하면서 꽃 멀미를 하느라 두 눈에 꽃물이 든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는 자연스럽게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으로 유명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는 작품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모델 선정과 나체 여인이라는 선정성 때문에 당대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다. 마네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을 예상했으면서도 관습법과 원근법에 빠져 있는 당대 미술계의 풍조를 조롱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식탁 위의 풀밭」이라는 시 제목에서 유추해 볼 때 이어진 시인도 현대 시에 드러나는 관습 언어에 대해 회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관습화된 언어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의 행위성에 집중하는 신유물론적 시를 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시로 해석된다. 이처럼 언어적 전환에 대한 문제의식은 신유물론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출발선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을 배우기로 한 사물의 이야기
사람의 말속에 진정한 오해와 편견이 무성하였으므로
솎아주기에 바빴고 진정한 말을 찾아 나선 이름은 진실
한 흙은 만나기 위해 생각부터 집어넣어야 했네
어떤 말들은 부패하여 그네에 얹어 숙성시키기로 하였
으나 갖지 못한 양식과 가난한 사물을 위하여 지붕 속의
말을 데려왔고 나의 생각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심장 속의 말을 꽃피우는 사물
책갈피 위엔 어린 영혼이 걸어 다녔네 깨꽃 같은 글씨
가 흘러들었고 입안에서 어떤 악보는 음악을 연주했으며
꽃말 속으로 구름이 흘러 다녔고 그 구름 속에서 아이
들이 태어나기도 했네
-이어진 「사물의 말」 부분
이 시는 주체와 객체의 전회로 시작된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뇌에 있는 의식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으로써의 기호를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인식 주체는 인간이 된다. 그런데 이 시는 사물이 주체가 되어 바라본 사람의 말이다. 사람의 말에는 “진정한 오해와 편견이 무성”했다는 비판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신유물론적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그동안 사람의 말이 놓치고 온 사물의 본질적 실재를 되찾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생각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인식적 편견을 없애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사람의 말은 이미 부패한 상태라 숙성이 필요한 동시에, 사물에 내재 되어있는 기본적인 역동성을 편집해 버렸기 때문에 “갖지 못한 양식과 가난한 사물을 위하여 지붕 속의 말을 데려왔”다는 것. 즉 사람의 의식에서 편집해 버린 부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지붕 속의 말을 데려”와야 했다는 뜻이다. 그러는 사이 “나의 생각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는 표현은 인간 중심적 편견을 내려놓지 못한 시적 화자 자신을 바라보면서 지른 비명이다.
사물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심장 속의 말을 꽃 피우”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사물을 편집하지 않고 그냥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만 봐도 심장을 두드려서 말을 터트리는 것인데 오래된 인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서 자꾸만 인간의 눈으로 사물을 편집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긴다는 시적 화자의 고백이 녹아있다.
이어지는 “책갈피 위엔 어린 영혼이 걸어 다녔네 깨꽃 같은 글씨가 흘러들었고 입안에서 어떤 악보는 음악을 연주했으며 꽃말 속으로 구름이 흘러 다녔고 그 구름 속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했네”에서는 사물을 사람의 인식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언어에서 풀려난 사물들이 책갈피 밖으로 걸어 나오고 악보가 스스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 또 꽃말 속에서 흘러 다니는 구름에서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이 사물의 실재다. 이처럼 사물을 인식이라는 잣대로 재단하지 않으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우주의 질서에 따라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며 조화롭게 살아간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물과 사물의 얇은 틈에 실타래를 끼워놓고
나를 공기의 음악으로 채워 넣고
이 긴 말들의 놀이로 한 뼘 한 뼘 줄넘기를 할 수 있다면
빌딩과 빌딩의 간절한 간격 사이에 한밤중의 비틀어진
감정을 데려와 내 그림자와 오래 흘러갈 수 있다면
당신과 나의 말들이 머리와 얼굴을 바꾸며 산과 들을
달리는 한 마리 싱싱한 바람이 될 수 있다면
가령 그것은 목을 길게 빼고 하늘에 가볍게 젖어 드는 일
두둥실 누워서 바람으로 떠오르는 일
싱그럽게 공기처럼 흩어지는 일
눈을 감고 당신의 입속으로 스며드는 일
나의 눈동자를 고요한 사물에게 박아주는 일
그리하며 텅 빈 몸으로 사물의 중심을 가볍게 통과하는 일
미치도록 죽고 싶어 다시 돌아오는 봄의 환희
거리에 나서면 그렇게 빼낸 나와 당신의 눈동자들이 겨
울의 무거운 옷을 벗고 무수한 꽃을 바람처럼 통과하는 중
-이어진 「투명인간으로 사물 통과하기」 전문
이 시는 “사물과 사물의 얇은 틈에 실타래를 끼워놓고/나를 공기의 음악으로 채워 넣고/이 긴 말들의 놀이로 한 뼘 한 뼘 줄넘기를 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출발한다. 시적 화자는 긴 말놀이를 시작한다. 그 말놀이는 비존재로 분류되는 사물과 시적 화자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해체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실타래로 사물과 사물을 연결한 후 자신을 공중에 가볍게 띄워서 한 뼘 한 뼘 줄넘기를 하고 싶다는 것. 이것은 사물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또 다른 세계로 뛰어넘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간절함이 전제된 빌딩과 빌딩의 간격이 너무 높고 단단해서 쉽게 뛰어넘을 수 없다. 여기에서의 간절함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반드시 이뤄야 할 소망으로 유추된다. 이 분리 상황을 잇기 위해 “비틀어진 감정을 데려와 내 그림자와 오래 흘러갈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세운다. 다음에 이어지는 조건은 당신과 내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와 소리를 바꿔서 산과 들을 달리는 한 마리 싱싱한 바람이 될 수 있다면 이라는 두 번째 가정이 나온다.
앞에 전제된 두 가지 가정이 성립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가볍게 젖어 들 수도 있고, 두둥실 바람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공기처럼 흩어지기도 하며, 당신의 입속으로 스며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시적 화자의 소망이 담겨있다. 이는 나의 무게를 다 내려놓고 텅 빈 무심의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사물을 가볍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왜 이토록 투명 인간이 되어 사물을 통과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경계를 해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몸과 영혼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무거운 육신의 무게를 견디며 인식론적 관념에 갇혀있다. 이 둘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은 나를 짓누르고 있는 관념의 무게를 내려놓는 것 뿐이다. 이를 위해서 시적 화자는 말놀이를 통해 관념으로부터 사물을 해방시키는 한편 이원화된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싶다는 소망을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적 화자가 가 닿고 싶은 세계는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실재라고 할 수 있다.
물의 습성을 슬픈 화면 안에 담가놓는다
백치의 풍경으로 보이는 모습은 한층 감미로울 것이다
부드러운 살갗의 느낌은 관자놀이에서부터 타올랐다
당신이 보내준 밤과 낮의 줄무늬에선
하양과 검정의 격렬한 감정이 처형되고 있었다
그것을 복숭아가 열리는 과수원의 외연이라고 하자
당신의 지문과 나의 지문은
봄이나 여름, 가을의 시놉시스를 나뭇가지마다 걸어둘
것이다
나무에게 꺼낸 붉은 알맹이는 검은 눈빛 흘리고 있었
는데
당신은 더 아름다운 복숭아의 계절을 찾아 떠나고
그 외연의 통조림을 내게 보내왔다
혀의 관습은 과일의 온도와 밀애한다
당신을 스칠 때마다 돋아나던 눈물
나는 깡통 속에 들어가 한 개의 복숭아와 얼굴을 교환
한다
복숭아가 열리지 않는 계절엔 나의 저녁을 기억해 주렴
-이어진 「시놉시스의 뒷면」 전문
먼저 시의 제목이 시놉시스의 뒷면이다. 시놉시스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짚어보면 서사 텍스트 제작에 앞서 작품의 의도와 줄거리를 요약해 놓은 글이다. 한 마디로 제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핵심 요약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시놉시스의 뒷면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것은 제작자의 의도 밖에서 일어나는 우연성과 불확실성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뜻이다.
1연의 이미지는 물의 습성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슬픔의 배경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다. 그런데 당신의 부재로 인해 하양과 검정으로 격렬하게 대치하던 감정이 처형됐다는 것이다. 감정이 처형됐다는 강한 표현으로 유추해볼 때 밤낮의 변화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상태로 해석된다.
2연에서 시적 화자는 이런 나의 상태를 복숭아가 열리는 과수원에 비유해서 외연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당신의 지문과 나의 지문이 묻은 봄, 여름, 가을의 시놉시스를 복숭아 나뭇가지마다 걸어두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것은 나무에게서 꺼낸 붉은 알맹이가 암전 혹은 암흑을 의미하는 검은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
2연의 암전 상황은 3연에서 “당신은 더 아름다운 복숭아의 계절을 찾아 떠나고/그 외연의 통조림을 내게 보내왔다”로 전개된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당신과 내가 함께 써 내려갔던 시놉시스를 뒤로하고 당신은 더 아름다운 복숭아의 계절을 찾아 떠난 상황이다. 떠나면서 둘 사이에 있었던 추억들로 해석되는 외연의 통조림을 나에게 보내온 것이다. 혼자 남은 시적 화자는 혀의 관습으로 표현되는 일상어로 추억을 곱씹으며 혼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유추된다. 그러다가 “나는 깡통속에 들어가 한 개의 복숭아와 얼굴을 교환한다/복숭아가 열리지 않는 계절엔 나의 저녁을 기억해 주렴?”에 와서는 스스로 통조림 속 복숭아가 되어 복숭아가 열리지 않는 계절에 자기를 기억해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겪은 상실의 아픔이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구름은 말을 눈 안 깊숙이 감추네 내 앞에선
길어진 그림자만 떨구고
봄의 웃음을 얼굴에 쓰고 채소가 늘어선
정오의 시장에 가네
내 눈동자를 빼내어 지폐의 주머니에 넣고
흔들흔들 시장 안을 걸어봤으면
구름의 눈 속에 내 집요한 문자를 한 획씩
집어넣을 수 있다면
이빨들을 빼내어 장미의 주머니에 넣고
산들산들 공원 안을 산책하고 싶어
장미가 얹힌 붉은 담벼락 봄의 말 없는 입처럼 고요하지만
시간은 고개 숙인 태양으로 벽돌의 어깨만 흘리고
나는 봄의 머리를 얼굴에 달고
책의 문장 안에 스며들고 싶어
하략
-이어진 「봄의 무의」 부문
이 시는 제목이 '봄의 무희'다. 직역하면 봄이 추는 춤이다. 봄은 생명을 잉태한 계절이고 또 생명을 발아시키는 계절이다. 즉 봄의 무희는 모든 존재(사물)들의 춤이다. 이 시의 특징은 사물이 가진 행위성과 활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기존의 주어+서술어 방식을 해체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구름은 말을 눈 안 깊숙이 감추네 내 앞에선/ 길어진 그림자만 떨구고”에서 주체로 등장한 구름은 말을 눈 안에 감추고 있는 능동적 행위자다.
바로 다음 행에서는 “봄의 웃음을 얼굴에 쓰고” 있는 채소라는 언술 구조를 통해 채소가 가진 사물의 싱싱한 생명력을 강조한다. “정오의 시장”도 정오라는 시간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언술 구조는 사물의 행위성을 드러내기 위해 시적 화자가 도입한 새로운 사유 방식이다.
“내 눈동자를 빼내어 지폐의 주머니에 넣고/흔들흔들 시장 안을 걸어봤으면”의 정황은 시장 골목을 거닐다 구매 충동이 일어나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내 눈동자를 빼서 지폐 속에 구겨 넣어 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구매 충동을 일으키는 원인인 눈동자를 뺀다는 것은 눈동자가 가지고 있는 힘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 지폐 속에 구겨 넣는다는 것도 지폐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다음 행에서는 “구름의 눈 속에 내 집요한 문자를 한 획씩/집어넣을 수 있다면/이빨들을 빼내어 장미의 주머니에 넣고/산들산들 공원 안을 산책하고 싶어”라고 진술한다. 그동안 집요하게 나를 물고 늘어졌던 기호로서의 문자를 구름 속에 집어넣고, 사물의 실재로 대변되는 장미의 주머니에 그동안의 언어습관을 밀어 넣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 온 기존의 인식체계에서 벗어나 가볍게 “공원 안을 산책하고 싶”다는 시적 화자의 소망이 표출된 부분이다. 시적 화자는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물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장미가 얹힌 붉은 담벼락 봄의 말 없는 입처럼 고요하지만/시간은 고개 숙인 태양으로 벽돌의 어깨만 흘리고” 이 행에서는 시적 화자의 귀에 들려온 사물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문장이다. 봄의 말처럼 고요한 담벼락과 그 사이를 흘러가는 태양의 시간이 시적 화자가 느끼는 사물의 실재이다. 즉 봄이 추는 춤은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하다는 것이고, 봄을 이끄는 태양의 시간도 벽에 기대어 조용히 봄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정도로 해석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보고 느낀 사물의 실재를 받아 적기 위해 “나는 봄의 머리를 얼굴에 달고/책의 문장 안에 스며들고 싶”다고 고백한다. 시적 화자가 쓰고 싶은 문장은 봄 그 자체로서 사물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말로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모든 물질은 생태계의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변형하는 동시에 자신도 변화되는 이중적 과정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개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혹은 개체의 경계가 해체되는 존재론적 춤이다.
나오는 말
신유물론적 사유는 기후 위기 상황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해주는 철학적 접근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주체와 객체, 인간과 사물, 의미와 세계, 존재와 의식 등의 상관관계를 벗어나서 모두 동등하다는 논의에서 출발한다. 그런가 하면 사변적 실재론 역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간 상호 의존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객체지향 존재론에서는 존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배제해야만 객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유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면서 인간만 특권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객체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자신이 다른 객체들과 공생의 구성요소로 참여할 때 모든 존재론적 평등이 유지된다고 봤다. 그러면서 “인간 자신이 객체라는 점과 인간이 자신의 시간과 장소의 단순한 산물이 아니라, 자신이 직면하는 모든 환경에 맞서 대처하면 할수록 그 자신이 객체로서 더욱더 풍성해지고 중요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하먼 2020.p.110)”고 주장했다.
결론은 우주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해체해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태초에 작은 한 점에서 출발했다는 것이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상호의존적 양자얽힘 관계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과 철학적 이론을 넘어 문학에까지 스며든 공존의 개념이 기후 위기 극복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 올랐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