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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Jul 17. 2023

교황청 금지하기까지 한 노래, 그 주인공

제인 버킨이 향년 77세를 일기로 떠났다

우 디두다.


그 뒤의 가사가 프랑스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그 노래는 좋아하게 되는 데는 걸림이 되지 않았다. 그 노래를 처음 들은 시기가 막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니까 당연히 노래에서 어떤 관능성이나 가수에 대한 에로틱한 환상을 갖진 않았다. 하지만 처음 들은 그 노랜 무작정 신기했다. 겉이 하늘색이고 속은 우유맛이 나는 '하드'가 있었는데 그 맛이 생각났다. 


이 노래가 연상시키는 색과 맛은 곧 노란색과 신맛으로 바뀌었다. 국민 비타민 C, 레모나 광고에 이 곡이 삽입됐기 때문. 그게 1990년대 초였던가 그랬다.


"Di Doo Dah"의 표지. 사진은 샘 레빈. 이 노랠 첨 들었은 땐 겨우 이정도 사진만으로도 자그마한 '고추'가 단단해지곤 했다


이 곡 제목이 "Di Doo Dah"이고 이를 부른 가수가 제인 버킨(Jane Birkin)이란 건 1995년에 알게 됐다. 당시 KBS에서 발행하던 <지구촌영상음악(GMV)>라는 해외음악지를 통해서다. 그 책의 마지막에는 항상 컨템퍼러리 넘버들의 가사와 영어 표현을 알려주는 어학 관련 교육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그 잡지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읽다 선생님께 걸려도 혼나지 않는 몇 안 되는 '교양지'였다.


그 코너에서 제인 버킨의 "Di Doo Dah"의 가사를 봤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디두다라는 뜻없는 의성어가 교차해 주문처럼 들렸다. 1995년, 몇 월호인지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데프 레파드가 커버를 장식했던 7월호 전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데프 레파드의 내한 공연이 있었고, 영미권 '팝'은 국내 대중음악만큼이나 잘 팔렸다.


그 당시엔 제인 버킨이란 가수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는 몰랐다. 한참 하드락, 헤비메틀에 귀가 열리던 시기여서 달달한 대중음악은 귀에 걸리지 않았다. 누구나 그런 어리석은 시기를 지난다.


"특유의 섬세한 목소리와 독특한 영어 액센트는 단번에 그녀를 아이돌로 만들었다. 'Je t'aime... moi non plus(사랑해 아니 난' 같은 빛나는 히트곡들과 상반되는 신중함도 돋보였다."(<Vogue> 프랑스 올리비에 랄랑의 제인 버킨 추모 기사)


참고로 남편이자 음악적 동반자가 된 세르주 갱스부르와 함께 한 'Je t'aime... moi non plus'는 당시 교황청이 금지한 노래로 오히려 유명해지기도 했다. 노래가 지나치게 에로틱하다는 것. 사실 크게 음란한 내용도 아닌데 분위기 자체로 '꼴릿'한 포인트가 있다. 여하튼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은 교황이야말로 최고의PR 담당자라고 받아쳤다.



많은 셀럽들은 자유를 외친다. 자유롭게 먹고, 입고, 타고, 쓴다. 하지만 그 중에 진짜 자유를 아는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들에게서 가진 것이 사라지면 곧 어둠에 발목 잡혀 헤맬 이들이다.


그래서 제인 버킨의 삶 특히 노년의 모습은 특별했다. 명품 백의 지존이라는 에르메스 '버킨 백'의 뮤즈라지만, 2010년대 중반 제인 버킨은 "그 가방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잃어버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셀러브리티이면서도 물욕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매력적이었던 젊은 시절의 외모를 억지로 잡아두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늘 수수한 모습과 옷차림이 익숙해 마치 집에서 일상을 보내는 여교수의 느낌이 강했다. 그럼에도 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40대, 50대, 60대, 70대, 그리고 거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던 날까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시간과 물욕에서 모두 자유로웠으니 가히 부처였다. 실제로 뉴욕에 거주하던 시절, 제인 버킨은 뉴욕의 교 지도자들과도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제인 버킨보다 아버지의 외모가 섞인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공식 성은 긴즈버그)를 더 좋아했다. 고집 있어 보이는 아버지의 턱선을 닮았는데, 어머니와는 또 다른 강인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정작 십대 시절에 겪은 친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쉽게 견딜 수 없어 성인이 된 이후론 거의 뉴욕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원래 연예인이 될 생각이 없었고 역사학, 고고학을 전공했는데 피는 속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일단 미모가 이랬다.


2000년 세자르 상 시상식 당시의 샤를로트 긴스버그


요즘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는 느낌이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던 <님포매니악> 당시의 모습부터는 영락없는 어머니 제인 버킨이었다. 창백하고 얇은 피부. 다만 고민 많은 듯한 눈빛은 여전히 아빠의 느낌이 그대로다.


샤를로트의 생일은 7월 21일. 닷새만 기다렸다면 제인 버킨은 딸의 51세 생일을 보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 버킨은 끝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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