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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Feb 28. 2023

그렇게 그는 분당으로 갔다고 한다

<대행사> 최창수를 위한 변명

나는 고아인 편이었다. 이보영의 오랜 팬이어서다. 고아인은 "어느 편도 들지 말라."는 강근철 회장(전국환 분)의 조언이자 경고를 잘 이행해서 얻을 걸 얻어냈는데 나는 이 드라마에서 고아인의 냉정을 배우지 못하고 열혈 팬에 머물렀다.


그래도 최창수 상무(조성하 분)가 싫진 않았다. 권모술수와 사내 정치질의 화신인 것 같지만, 저 정도 대기업 산하 에이전시에서, 임원 자리까지 올라간다는 게 어디 실력이 전제되지 않고 가능한 일인가.


‘사내정치질’은 부작용이 많지만, 사실 정치란 조율에 다름 아니다. 정치력은 기획 직군에 어울리는 이의 천성 혹은 기획에서 살아남으려면 갖춰야 할 적성이다. ‘C’로 시작하는 말장난을 좀 해 보자면, 이해가 첨예하게 걸린 사안을 마주했을 때 당사자들의 타협(compromise)을 이끌어내고 그 대가로 적절한 보상(compensation)을 제공하는 것이 사내 정치의 본질이다.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조직에 대한 충성도(commitment)는 향상된다. 최창수라는 인물이 임원에 오른 것은 그런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행사> 포스터. JTBC 드라마


특히 상업적(commercial) 캠페인(campaign)에서, 고아인의 제작본부 인력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창의성(creativity) 본질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는 고아인도 인정하고 그런 메시지를 중요한 순간마다 보여주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은정(전혜진 분)이 보여주는 똘끼 가득한 창의성은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는 힘이고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이 맞다. 그러나 돌파 이후 지속적인 메시지 발신과 교섭을 위해서는 통속적인(common) 소통(communication) 능력이 필요하다. 고아인도 이를 알고 있고 극 중에서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다. 우원그룹 김우원 회장(정원중 분)의 석방을 위한 기업 광고 캠페인 PT 영상을 준비하며 ‘최대한 신파에 가깝게’라는 메시지가 단적인 예다. 대부분의 광고나 홍보 에이전시들의 사명에도 크리에이티브를 활용한 이름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를 활용해 ‘커뮤니케이션즈’, ‘컴’이라는 용어가 더 많은 것을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최창수를 파국으로 몬 것은 사내정치 행위 자체가 아니라 욕심이었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에는 사내 정치를 하는 중에도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 무게 중심을 잘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VC 기획의 대표 자리를 놓고 고아인과 경쟁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냉정함을 잃었다. 고아인이 정신과 약과 술, 담배에 의존하면서도 균형 감각을 잃지 않은 것과 달리 최창수는 유불리의 프레임으로 경쟁을 이해했다. 그럴 때의 실수가 어떤 것인지 그 표준을 보여주는 게 그의 행보였다. 최창수가 회사를 떠나는 순간 고아인이 ‘상황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메시지는,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는 최창수의 메시지만큼이나 사실이고 진심이었을 것이다.


<대행사> 포스터. JTBC 드라마


이 드라마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화려한 세계로만 그려졌던 광고계의 모습을 과장 없이 담백하게 그리면서도 긴박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드라마 제목처럼 ‘대행사’ 직원들이 경험하는 현실 자각타임도 나온다. 잘 되면 클라이언트의 공이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덤터기 써야 하는 ‘대행사’의 냉정한 현실. 


실제로 광고, 홍보 대행 에이전시들의 인력 이탈이 높은 것도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는 사회 초년생들의 직업관과 맞지 않아서라고 한다. 물론 어떤 직종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곳은 없다. 하지지만 서비스오 컨텐츠 크리에이티브가 뒤섞인 광고, 홍보 영역에서는 정당과 부당의 영역조차 희미하다. 이런 현실이 충분히 드라마에 반영되면서 상당수의 에이전시 담당자들이 이 드라마에 크게 몰입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대행 일은 경험해 봤기 때문에 공감 포인트가 많았다. 최창수와 유정석(장현성 분)이 모두 광고가 ‘지긋지긋하다’고 표현하는 데는 업의 특성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감히, 사회적으로 인식은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객응대근로자 보호법의 시행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콘텐츠와 창의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오면서 결국 능력 있는 에이전시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고 에이전시를 파트너로 생각하는 담당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클라이언트사 담당자가 퇴사 후 에이전시의 문을 두드리거나 반대로 에이전시 장기 근속자가 고객사의 해당 직무로 가는 경우가 잦은 업계 인맥도 서로를 어느 정도 존중해야 될 현실적인 이유가 되겠지만, 어찌 됐든 같은 결과물과 목표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동료라는 인식이 조금이나마 생겨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영화 <황해> 중의 한 장면. 그 유명한 대사 "분당으로 가"가 나온다


챗 GPT 등 AI 역량의 확대일로 상황에서도, 크리에이티브와 조절이라는 에이전시의 역량은 의외로 AI가 대체될 수 없는 가치로 각광받고 있다. 중요한 결정에 개입하는 인간의 감정이나 가치관 등은 AI가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창수의 커리어는, 끝이 조금 좋지 않았을지 몰라도 과소평가돼서는 안 된다.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현실의 모든 최창수가 커리어 종료 이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분당에도 들르고.


덧. 마세라티는 PPL 차량을 많이 제공한다. 근래 가장 성공적인 PPL이라고 전하고 싶다. 마세라티라는 브랜드가 들어가야 할 분위기에 잘 맞아떨어졌다. 고아인은 SUV인 르반떼, 그 외 인물들은 세단을 탄다. 한 번 정도 MC20 같은 차량이 나왔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스토리 상 낄 자리가 없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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