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연코, 올해 최고의 책!!!

-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

by 그리고 책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올해가 아직 넉 달이나 남아 있는 데다, 지금까지의 독서량이 그 어느 해보다 얄팍하기에 제가 보기에도 성급하고 어설픈 단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습니다. 왜냐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단 한 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산뜻하고 재미있으며 뭉클한 여운까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주인공 손열매의 치열했던 여름을 함께 견뎌낸 것 같은 뿌듯함이 남았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손열매는 충청도 바닷가 마을의 ‘창세기 비디오’ 집 막내딸이에요. 눈이 어두운 할아버지를 위해 짐 캐리의 영화 ‘마스크’의 자막을 읽어드리며 갈고닦은 탄탄한 내공으로 마침내 성우가 됐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정신과 의사 자, 손열매 씨, 검사 결과 발성 문제는 우울증의 신체화가 일어난
결과라 할 수 있어요. 여러 지표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되고 심각한 우울증이에요.
손열매는 그 순간 당신이 내 인생에 대해 뭘 알아, 하는 반감이 올라왔지만 꽉 내리눌렀다.
손열매 (황당하다는 듯) 아니, 선생님, 말도 안 돼요. 제가 얼마나 밝은 인간인데요.(헛웃음을 지으며)
이런 말 좀 그런데, 제가 제법 타이틀 있는 성우거든요. 왜 초통령 핑구 있죠, 핑구. 얘들아, 안녕...
정신과 의사 (말을 자르며) 그리고 열매 씨에게는 불안정한 감정 기복과 유기, 버려짐에 대한 극심한 공포
가 있는 것으로 나왔어요. 이상한 말 같지만 우리가 우리 정신은 스스로 속여도 몸은 속일 수가
없거든요. 지금은 목소리가 안 나오는 정도로 신체화가 나타나지만 심해지면....



열매의 말문을 막아버린 우울증의 원인은 대학 선배이자 룸메이트인 고수미의 잠적 때문이었습니다. 열매의 가족은 가난에 휩쓸려 조각조각 흩어진 지 오래였고 열매가 응급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조차 수술비를 떠안게 될까 봐 동의서에 싸인조차 해 주지 않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수미 언니는 그들을 대신해 사인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열매가 참고 있었던 욕을 시원하게 퍼부어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었죠. 그런데 그런 수미 언니가 열매에게 한 마디 설명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투자회사에 다녔던 수미는 주변 지인에게 받은 투자금을 돌려주지 못해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고 열매의 돈마저 융통했다가 감당할 수 없어지자 잠적하고 말았는데요, 한동안 깊은 수렁에 빠져 있던 열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미의 고향집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여름을 보내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가슴 뭉클했던 대목은 어린 고수미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고 신해철 님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 전화 연결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무척 사랑했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 시절 그 방송을 그대로 재현해 내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가 라디오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신해철 오늘도 시민들의 생활 점검을 하며 전화질을 해 볼 텐데요, 날이 날이니만큼 첫 연결은 어린이이
십니다. (웃으며) 지난달부터 천리안을 통해 본인 학교의 외계인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 정확한
주거지는 신변 보호상 밝힐 수 없다, 확실하게 거절할 줄 아는 천리안 아이디 할미새 님인데요,
예, 그럼 한 번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보세요?
어린 수미 네.
신해철 안녕하세요?
어린 수미 네
신해철 (어색한 침묵) 원래 인사가 가면 인사가 오게 되어 있는데 꽤 과묵한 어린이입니다. 긴장하셨나요
지금?
어린 수미 아뇨
신해철 네, 단답형을 좋아하는 어린이, 멋있습니다....(중략)
어린 수미 그런데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사연 보냈어요
신해철 드디어 질문이 나옵니다.
어린 수미 저는 외계인인 건 괜찮거든요.
신해철 그런데요?
어린 수미 정정당당하지 않은 게 문제예요. 제가 아무리 공부해도 일등을 못 해요.
신해철 (웃으며) 응, 그렇지
어린 수미 마왕이라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실 것 같아서요.
신해철 하하하하하하 글쎄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일등이 아니라도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수미의 고향 동네에 살고 있는 어저귀는 수업 시간 내내 졸면서도 일등을 놓치지 않아 외계인이라는 의심을 받게 됐는데요, 그의 남다른 존재감에 의혹을 느낀 열매 역시 수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좁은 동네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어저귀에게 의구심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게 된 열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수미처럼 열매도 어저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돼요. 그리고 그날 열매는 꿈속에서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만나요.



할아버지 산삼? 너 지금 니 아던 언니도 마다한 짓을 하겠다고 나서는 겨?
손열매 귀신은 귀신이네, 모르는 게 없구먼
할아버지 얼라리요, (단호하게) 안 돼야! 그 모냥으로 남은 쥐 새끼마냥 궁지에 몰아넣는 건 사램의 짓이
아니여.
손열매 그러믄 그깟 사램 나 안 할라네, 원래 체질에도 안 맞았은께
할아버지 그렇게 야짓잖게 굴지 말어. 모처럼 맴에 훈풍이 불던디 우째 그걸 모른 척하는 겨?
손열매 아이고매, 곧 여름인데 훈풍이 무신 소용이유. 지금 필요한 건 차갑디차가운 에어컨 바람이지.
이성이라 이 말이여.
할아버지 여름을 왜 식히넌 겨, 여름이 여름다워야 곡식도 익고 가을, 겨울이 넉넉해지지.
순리를 거스르믄 좋을 거 읎어. 털도 내리쓸어야 빛이 나는 겨.



가족의 파탄도, 수미의 잠적도 모두 애꿎은 돈 때문이라고 생각한 열매는 이번 기회에 한몫 단단히 챙겨야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할아버지 말씀처럼 ‘야짓잖게’ 구는 건 어떻게 해도 할 수가 없었죠.


대신 ‘그럼 서로 마주 보고만 있으면 되겠네. 그러라고 여름이 있는 거네’라는 어저귀의 말처럼 열매는

수미 없는 수미의 고향집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과 마주 보며 여름을 살아냅니다.


제가 읽은 책은 5월에 초판이 발행된 이후 5쇄를 찍은 판형이었습니다. 출간과 동시에 올여름 더위 못지않은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라 열매가 겪어낸 여름에 대해서 더 자세한 언급은 삼가겠습니다. 심각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말문이 막혀버렸던 열매가 다시금 자신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 남겨놓을게요.


대신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전해드립니다.


손열매 그들은 조금씩 비틀거렸어
하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달님이 그들을 보살펴 주었네
(천천히, 여운을 주며)
하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달님이 그들을 보살펴 주었네.


계절 앞에 ‘나다’라는 동사를 붙일 수 있는 경우는 그 계절이 지독히 힘겨웠을 때뿐입니다. 혹독하게 더운 여름이나 몸 소리치게 추웠던 겨울이 끝나야만 무사히 그 계절을 났다, 는 안도의 표현이 비로소 허락되는 거죠. 그래서 계절을 났다는 건 그 시간만큼 충실히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여름, 한겨울 같이 혹독한 시절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어요. 그때 잠시 멈추거나 편한 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약해진 마음으로라도 조금씩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 그 시간이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계절도 인생도 완주한다는 건 말로 표현해 낼 수 없을 만큼 값지고 아름다운 일일 거예요.



어쩌면 스무 해 넘게 라디오 작가로 일했던 저의 과거가 이 책에 빠져들게 된 원인일지도 모르겠어요. 문장을 눈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소리가 상상이 돼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으니까요. 아직 오디오북을 듣지 않았는데 그건 정말 아끼고 아꼈다가 올해 마지막 즈음 한 해를 잘 완주한 저 자신에게 선물로 주고 싶습니다.



아, 이 작품을 통해 김금희 작가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습니다. 덧붙여 배우이자 출판사 대표로 이 책을 펴내는 데 큰 역할을 해 낸 박정민 씨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배우로서도 응원하지만 출판사 대표로서도 큰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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