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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고 책 Aug 14. 2020

3.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부모를...(上)

나는 아동폭력의 생존자입니다.

인디언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우선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고 들었다. 자신이 어떤 뿌리에서 비롯됐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야만 지금의 자신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래, 이 세상에 하늘에서 똑 떨어진 사람은 없겠지. 

오늘의 내가 지난 세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듯 살고 있다 해도 내 속에는 부모와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들이 채워져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의 아버지와 엄마에 대해 그리고 그분들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나를 때린 엄마보다 그걸 방관한 아버지가 더 밉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림자 같은 분이다. 

분명 한 집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다. 아버지가 나를 필요로 한 순간들이 있기는 있었다.   

   

아버지는 체질적으로 다른 사람 밑에서는 일을 할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월급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었고 대신 늘 사업을 구상하셨다. 기억하기로는 한 가지 사업을 오래 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도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았으니 우리 집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돈이 나올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곳 저곳에서 빚을 얻었다 썼다. 그리곤 제때 갚지 않아 여러 차례 곤경을 치렀다. 그런데 때때로 그 곤경이 내 차례가 될 때가 있었다.      


한 번은 저녁때였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아버지는 들고 있던 밥숟가락을 던져놓고 다락으로 올라가 버리셨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대로 얼음이 된 우리는 숨도 쉬지 못하고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엄마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가서 아버지 없다고 말씀드려’      


기억에 나는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낯선 아저씨에게 가서 엄마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아저씨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한참 만에 아저씨가 돌아가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숟가락을 드셨다.  

    

그렇게 종종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변명하다 추궁을 당하고 욕을 먹었다. 스무 살이 넘어 돈을 벌게 되자 그런 일은 더 자주 일어났다.      




아버지는 왜 평생을 그림자로 사셨던 걸까?      


아버지는 종로에서 금은방을 하셨던 할아버지의 칠 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기 때부터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밑에 동생들이 다 태어나고도 한참 후에야 본가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맏이였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온 둘째 동생 때문에 집에 돌아가셔도 많이 불편하셨다고 한다. 실제로 둘째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키도 체격도 훨씬 크고 성격도 밝은 분이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에게 많은 열등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    

  

어려서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동생들과도 친밀감을 쌓지 못했던 아버지는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엄마를 만나 가족을 이루셨다. 

다섯 살이 어린 엄마는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두 분은 만나자마자 큰아들을 얻었고 이태 후에는 딸인 내가 태어났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아들과 딸은 결혼과 함께 부차적으로 따라온 존재일 뿐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는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오직 엄마만 중요했다. 

아버지에게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갈구했던 친어머니와 같았고, 

평생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여동생 같았고, 

무엇보다 어떤 요구에도 자신만을 바라봐 주는 여인이었으니까.      


그러니 엄마가 나를 때리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쯤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엄마가 기분 전환을 해서 자신에게 나긋나긋해지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착했고 엄마는 그 집착이 좋았으니 어찌 보면 두 분은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이를 낳고도 부모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평생 나에게나 오빠에게나 큰 상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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