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비의 미재사건파일] 악녀의 말로(末路)

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아니, 악녀는 ‘프레임’을 입는다!

by 머비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밤이 궁금해 오늘은 어떤 사건이 날 부를까?’, [미재사건파일] 시리즈는 명탐정 코난의 오프닝 곡 가사처럼 눈만 뜨면 새로운 사건이 눈앞에 닥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미디어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 대해 다룹니다. 이번 [미재사건파일]에서는 익숙하고 재밌지만,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인 ‘악녀’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시리즈가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사건의 실마리가 되길 바라며, 사건 파일 오픈합니다.


▮ ‘악녀’는 익숙하고, ‘악남’은 어색하고?

잘 쓰던 단어가 문득 입 안에서 맴돌며 내뱉기 망설여질 때가 있다. 일상적이었던 단어는 내가 모르던 분야를 배우고 깨달을 때마다 이질적인 단어로 변했다. ‘비정상’, ‘결손 가족’을 거쳐 ‘출산율’이 그랬다. 특히나 ‘출산율’을 비롯해 ‘미혼’, ‘유모차’와 같은 단어는 오랜 시간 동안 어떤 문제 제기도 없이 사용되었던 단어기에 여전히 혼용해서 사용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단어의 근원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언어는 어느 날 갑자기 자연발생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근원이 있기 마련이다. 이 단어의 근원은 차별이었으며 활용하는 방식은 혐오였다.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여성을 온전하지 못한 여성으로 취급해버리는 방식의 언어는 오랜 시간 동안 문제의식 없이 전해져왔다.

‘악녀’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악녀’는 드라마, 영화, 소설이나 설화 속 캐릭터를 소개할 때, 혹은 현실의 여성 앞에 수식어를 붙일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쓰이는 말이다. 이질은커녕 익숙하기만 한 이 단어도 어느 순간부터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왜 악녀는 쓰면서 악남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 거야?’로 시작된 이 의문은 대중문화 내에서 통용되는 악녀라는 개념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차별의 언어가 점점 사어가 되는 세상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악녀’는 어떤 전통과 힘을 가졌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image02.png

다음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악녀’와 관련된 기사를 검색한 결과다. 쏟아지듯 나오는 기사 사이에서 처음 보도된 기사를 찾기 위해 끝없이 기사 페이지를 넘겼으나, 400페이지에 도달하자 ‘네이버 검색은 최상의 검색 결과 품질을 위해 뉴스 검색 결과를 4,000건까지 제공합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등장했다. 그만큼 ‘악녀’라는 단어를 헤드라인이나 내용에 포함하여 보도하는 기사가 많다는 뜻이다. ‘악녀’ 앞에 붙는 수식어도 ‘희대의’, ‘역대급’, ‘매혹적’, ‘독보적’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같은 사이트에 ‘악남’을 검색해본 결과, 관련된 기사 중 가장 최근에 나온 기사는 2020년 5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장근원’ 역할을 맡은 배우 안보현에 대한 기사였다. 그마저도 마치 대단한 예외라는 듯 획기적인 뉘앙스로 쓰였다. 그다음 기사조차 2016년에 방영한 <내 사위의 여자> 속 배우 장승조가 연기한 ‘최재영’에 대한 기사였다. 기사의 양도 총 8페이지로 약 80개에 불과했다. ‘악남’이라는 단어 대신 ‘야망남’, ‘최강 빌런’, ‘능청남’, ‘흑화’, ‘짠내 악역’ 등의 수식어가 함께 따라붙었다.

이처럼 애초에 잘 쓰이지도 않는 단어인 ‘악남’과 여기저기서 남용되는 ‘악녀’의 차이는 분명하게 느껴진다. 한컴을 사용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착실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맞춤법 검사 기능이 ‘악녀’라는 말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악남’에는 틀린 말이라며 빨간 밑줄을 긋는 걸 보면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image03.png

여기까지만 해도 ‘악녀’에 대한 비판적인 어조를 강하게 밀고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관련 기사를 찾던 중 이런 자료도 접하게 되었다. 남성의 전유물과 같았던 비중 있는 악역 역할을 여성이 연기하면서 새로운 장르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는 곧 악녀와 악녀를 기반으로 하는 서사가 새로운 여성 서사의 한 축이라는 주장과 이어질 수 있다. 여성 캐릭터가 악녀로서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이 우후죽순 쏟아지면서 얼마 없는 파이를 두고 경쟁해야 했던 여성 캐릭터의 점유율이 늘어났고, 이런 부분에서 보면 악녀를 마냥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오히려 이 악녀 캐릭터에 대한 비판이 여성 캐릭터의 선한 모습만을 강조하던 과거로의 회귀로 읽힐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이번 [미재사건파일] 시리즈에서는 ‘악녀’를 살펴보며 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한다. 과거에 비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욕망하는 여성보단 선하고 순종적인 여성이 칭송받는 사회에서 미디어 속 ‘악녀’는 어떻게 재현되고 있으며,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 공공연한 ‘악녀 프레임’

먼저, ‘악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키워드를 벤다이어그램으로 정리해봤다.

image04.png

키워드는 시각적/청각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 수식어로 분류할 수 있었는데, 시각적/청각적 요소에는 ‘진한 화장’, ‘화려한 옷차림’, ‘높은 목소리’ 등의 키워드가 포함되었다. 이어서 감정적 요소엔 ‘질투’, ‘시기’, ‘열등감’, ‘표독스러움’ 등이 떠올랐으며, 수식어엔 ‘독종’, ‘팜므파탈’과 같은 단어가 있었다. 악녀 캐릭터를 떠올렸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키워드가 따라오는 걸 보면 그동안 악녀가 얼마나 많은 드라마에서 일관된 모습으로 등장했는지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 키워드가 ‘남성 악역’이나 ‘빌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떠오르는가? 지금 가장 최근에 본, 혹은 인상 깊게 봤던 작품 속 남성 악역 몇 명을 머릿속에 그렸을 때 일관된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오히려 당장 떠오르는 캐릭터만 가지고도 나름의 카테고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악녀’라고 불리는 캐릭터에 비해 남성 악역은 연령별로, 그리고 장르별로 너무나 다양한 이미지가 떠올라서 하나의 공통된 이미지를 연상하기 어려웠다. 이를 통해 유독 ‘악녀’라는 여성 캐릭터에게만 공고하게 씌워지는 일명 ‘악녀 프레임’이 있다는 것을 도출할 수 있었고, 이 프레임을 총 세 가지로 나눠서 정리해봤다.


1. 진한 화장과 화려한 외형

악녀는 늘 잘 갖춰진 옷차림, 이를테면 화려한 드레스나 원피스 등을 챙겨 입고 등장한다. 이에 맞춰 색조가 강한 립스틱을 바르고 진한 눈화장도 필수 요소다. 한 회차가 끝나면 악녀의 패션과 메이크업이 실시간 트렌드에 오를 정도다. 그렇다고 모든 악녀가 동일한 패션과 메이크업을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설정에 따라 태생부터 금수저였던 악녀는 아역 배우로 등장할 때부터 고급스럽고 휘황찬란한 스타일을 추구하고, 가난했던 과거를 딛고 신분 상승을 노리는 악녀는 목표에 도달할수록 옷차림이 화려해지고 화장이 짙어진다. 공통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악녀가 가진 내면의 열등감이나 부에 대한 집착, 열망이 외적인 요소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왜 악녀는 후드티를 입지 않을까?'라는 기사에서 천서진 역할을 맡은 배우 김소연의 스타일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천서진의 각종 드레스와 장신구, 메이크업은 천서진의 욕망과 과시 욕구의 반영임을 설명한다.

이런 악녀의 특징은 소위 '팜므파탈'로 묘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팜프파탈은 남성들에게 치명적인 여성을 뜻하며, 이 여성의 거부할 수 없는 관능적 매력과 외적 아름다움으로 인해 남성이 죽음이나 고통 등의 파멸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특징은 악녀는 곧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남성을 유혹하고, 그의 이용 가치가 사라진 순간 가차 없이 토사구팽하며 그를 파멸로 이끈다는 전형적인 악녀 서사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남성 악역에 대해서는 공통된 외적인 특징이 존재하는가? 애초에 팜므파탈의 성별을 남성으로 치환할 수 있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고, 여성을 유혹하여 파멸로 몰고 가는 남성에 대한 재현은 극히 드물다. 또한, 이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메두사 신화'처럼 아름다운 외형의 여성을 숭배하면서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신화적 세태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특정 여성 캐릭터와 대립

'가장 기억에 남는 악녀는?'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각자 떠올리는 악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당 악녀와 대립하는 착하고 긍정적인 여성 캐릭터가 함께 떠오를 것이다. 사실상 악녀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으로는 서사를 끌어나갈 수 없는 물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다. 물고기가 숨을 쉬고 헤엄을 치기 위해선 반드시 물 안에 있어야 한다. 물 밖으로 나와도 잠깐 숨은 붙어있겠지만 금세 호흡을 멈추고 만다. 비유하자면 선한 여성 캐릭터와 그를 둘러싼 남자 주인공 등의 기타 캐릭터가 물이고, 악녀는 그곳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다. 애초에 '악녀'라는 명칭 또한 선한 여성 캐릭터와 대비되는 악한 여성이라는 특징을 바탕으로 생성된 것이기에, 그와 대립하는 여성 주인공을 괴롭히고 모함하는 것이 악녀 프레임 속에서 악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악녀는 이런 원칙에 따라 철저히 이 역할을 수행하며 악행을 갈고 닦는다. 이렇게 악녀는 결국 선한 여성 캐릭터의 착하고 밝은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 사용되고, 특정 여성 캐릭터와 대립하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3. 맹목적으로 원하는 목표

악녀의 목표에는 언제나 비교 대상이 존재한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특정 여성 캐릭터와의 대립 관계에서 발생한다. '너보다 내가 못 한 게 뭔데'라는 억울한 얼굴로 늘 2등의 자리에 배치되는 악녀의 목표는 언제나 1등의 자리에 있는 선한 여성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이 목표는 주로 직업상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임과 더불어 선한 여성과 악한 여성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남성 캐릭터로 표현된다. 경쟁 관계 속 두 여성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갈등을 빚게 되고, 악녀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실 이 목표도 악녀 자신의 자아실현이라기보단 타자화된 목표에 더 가깝다. '내가' 잘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쟤보다 내가' 잘하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악녀의 발버둥은 결국 악녀에 대한 '표독스러움', '독종' 등의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데에 일조한다.


그렇다면 이 프레임은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용되기 시작한 걸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악녀 캐릭터의 변천사를 확인해봐야 한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1970년대부터 2020년까지를 돌아보며 시대별 악녀의 모습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사진 속 기사 출처

https://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216860 ‘순악질’ 악녀 전성시대(함상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1117MW090224318812 안방은 악녀 전성시대... 캐릭터도 각양각색(박미영)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122313235122952 국민악녀 이유리 전성시대(?)... 전지현도 제쳤다(온라인이슈팀)

keyword